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超克의 꿈을 꾸지 못한 광대와 사실주의적 감각의 한계
超克의 꿈을 꾸지 못한 광대와 사실주의적 감각의 한계
  • 김경현 캘리포니아대(어바인) 교수(동아시아언어문학)
  • 승인 2013.11.11 13: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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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현 캘리포니아대 교수,「 광해」와「전우치」를 루카치식으로 읽다

SNS와 스마트폰으로 국경 없는 콘텐츠 공유를 하고 있는 21세기에 1천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이자 조선 배경의 사극「광해」와 민담「전우치」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 ‘역사의 질식’으로 표방되는 포스트모던 시대에 사극이 다시 주목을 받는 아이러니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지난달 28일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소장 백원담)에서 열린 정기학술토론회에서 김경현 캘리포니아대(어바인) 교수(동아시아언어문학)는「역사의 종말과 사극의 시작:「 광해」루카치식으로 읽기」발표에서 최근 주목받은 두 영화에서 두 가지 문제를 제시한다. 첫째, 어떻게 조선왕조를 연대기로 만드는 스펙타클이 한편으로는 혁명적 이상의 실행불가능성을 재기입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또 다른 사실주의 텍스트를 진보적 의제로 추구할 가능성을 열어주는가? 둘째, 일련의 눈에 띄는 진기한 어휘들이 포스트모더니즘의 타당성을, 특히 모든 진실성에 불신을 보낸다는 점에서‘거짓의 역량’을 극대화하고 ‘지표성’(C.S.처스)을 상기시키는 아이콘의 흥미로운 조합을 재등록한다는 사실을 밝히려 한 것이다. 김 교수는 이를 위해 블록버스터 사극인「광해」와「전우치」가 어떤 방식으로 역사의 진실성과 계급격차의 연속성을 약화하는지 살폈다. 발표문의 일부를 발췌해 소개한다.

병상의 왕을 대신할 가짜를 찾는 일은 필수적일 수밖에 없는데 왕은 민주적으로 선출된 인물이 아니라 잠시의 공백도 가질 수 없는 절대군주이기 때문이다. 가장 사적인 영역에 속하는 일들, 이를 테면 성교, 배설, 섭식마저도 중대한 국정의 일부로 취급되기에 대리인의 모든 재연도 철저하게 카피되고 코드화된다.

절박해진 도승지와 고위 환관을 위시한 수행원들은 왕과 절묘하게 닮은 광대를 찾아내 그를 고용한다. 위장과 모방이라는 이 관습 속에 찰스 피어스가 ‘지표적’이라고 칭하는 또 다른 의미화가 기표(광대/대리인)와 기의(왕) 간에 나타나는데 필자에게는 이것이 벤야민의 ‘역사적 유물론’과 흡사하다고 보인다. 왕과 광대 사이의 계급 격차가 불분명해지고 이것이 점진적 개혁의 중심점으로 기능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두 기표(가짜와 진짜 왕) 사이의 지표적 관계가 모든 계급의 유토피아적 철폐로 향하는 불가피한 움직임에 시동을 걸고 예열을 하고 있는 것이다.

가짜 왕의 선택이 의미하는 것은?

「광해」의 광대는 월터 스콧의 역사 소설에 관한 루카치의 묘사처럼 인간 열정의 극단으로 치닫지는 않고 대의를 위해 열의에 찬 헌신을 드러내지도 않는다. 왕과 우정을 나눈다거나 영원히 진짜 왕 노릇을 하겠다는 양쪽 모두를 거부하는 가짜의 선택은, 불평등한 조세인 대동제 폐지와 사대주의를 답습하는 현 정치 상황과 왕정 타파를 위한 혁명적 헌신 양 측 모두에 불만을 드러내는 제스처가 아닐까.

필자는 여기서 스콧에 대한 루카치의 온건한 평과 같은 맥락으로 내 주장을 되풀이하려 한다: 이 영화는 사람들의 끝나지 않는 수난에 깊은 공감을 표하지만 신생 자본주의 권력에 거세게 항거할 능력은 없다. 비록 모든 벤야민적 모델의 세 가지 조각들(꼽추, 터키 인형과 역사적 유물론)이 영화에서 연상되고, 부자들에게 비례 과세를 실시하고 지나친 사대주의를 버려야 한다는 역사 발전이 갖는 상식적인 면을 관객들이 되새기게끔 해준다고 하더라도 이 영화는 세 가지 기표 사이의 연속적인 간극은 메우지 못한다.

다시 말하면 광대가 왕이 되겠다는 꿈을 자신을 위해서 꿈꾸겠다고 선언한다고 해서 기표(개화된 광대)와 기의(절대군주) 사이의 완전한 붕괴가 일어나지는 않는다. 그가 ‘왕이 된다는 꿈’을 국가를 위해서 꾼다면, 이럴 때 그는 혁명적 변화가 구체화될 라캉적 실재를 드러낼 수 있는 위치에 놓이게 되는 것이 아닌가? 자신을 넘어서는 꿈을 꾸지 못하는 광대는 그러나 대신에 루카치적 사실주의의 계량된 감각을 획득한다. 꼽추가 수연통을 입에 문 터키 인형을 제치고 진정한 혁명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주의와의 지표적 관계에 만족하고 마는 것과 마찬가지다.

기억이 아닌 망각을 선호하는 주제, 기억상실증에 대한 포스트모던적 매혹, 모든 역사의 외상적 조각들을 평면화시키는 순수 대상이라는 것의 피상성이 마침내 한국 영화를 규정지었다. 사극을 통해 이의 메타제네릭적 생산을 위한 가장 설득력 있는 특수 효과와 시각 이미지들의 새 장이 열린 것이다.

「전우치」가 양산하는 여러 전통적 공간들(경복궁, 남근 형태의 산들을 담은 전통 풍경화, 그 산 봉우리들 바로 밑을 둘러싼 흰 구름들, 그리고 양반 귀족의 가죽을 덮어 쓴 도깨비들이 있는 은은한 불빛이 밝혀진 사랑방), 이 모든 것은 현대 서울의 익숙한 풍경들인 얇은 유리 표명의 빌딩들과 정신병원들, 가톨릭 성당과 영화와 패션 촬영 세트장들로 이뤄진 하이퍼 도시의 숲으로 변신한다.

현실의 경계 허물어뜨리는 가상성

이 신 사극에 깃든 가상성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과 우리가 기억하는 현실, 그리고 지금 우리의 의식 속에 나타나는 현실 사이의 경계를 허물어뜨린다. 진실과 거짓 또는 오리지널과 카피를 넘어서는 제3의 길을 모색하는 들뢰즈적 ‘거짓의 함량’은 여기서 조선시대 초에 쓰인『전우치전』의 전복적 상징과 조우하게 되는 것이다.

또 이채로운 현상은 세계에서는 참과 거짓 사이의 대립이나 현실과 환상 사이의 대립은 결코 해결될 수 없는 것이다. 대신에 이 둘은 앙리 베르그송이 말하는 ‘창조적 진화’로 변화해 이 대립 자체가 즐거운 noraposae (놀아보세)의 공간이 된다. 여기서 버치의 반영적 제시주의를 업데이트한 이러한 신 사극의 비전은 ‘종말’시대의 정치에 맞서 역사적 유물론을 앞으로 전진시키는 것이다.


정리 윤상민 기자 cinemonde@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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