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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蟲인 누에와 뽕잎의 장식적 결합 … 후대로 올수록 蠶神의 原意 퇴색해져
天蟲인 누에와 뽕잎의 장식적 결합 … 후대로 올수록 蠶神의 原意 퇴색해져
  • 김양동 계명대 석좌교수·서예가
  • 승인 2013.11.05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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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대문화 원형의 상징과 해석 13. 고대 한국 曲玉의 기원과 상징

 
누에는 뽕잎을 먹고 산다. 뽕나무는 扶桑, 신화속의 神木이므로 太陽樹의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하늘이 만들어 낸 벌레, 곧 天蟲인 누에의 먹이가 된다. 누에는 천충이고 뽕나무는 신목이므로 곡옥이 누에를 상징한 것이라면 달개는 당연히 뽕나무 잎을 상징한 것이라야 한다.

曲玉은 선사시대의 고인돌[支石墓]이나 돌널무덤[石棺墓]에서부터 삼국시대의 왕릉을 비롯한 고분군에 이르기까지 매우 많은 양이 출토되고 있는 귀중한 고대유물이다. 곡옥은 고분의 금관이나 목걸이와 귀걸이 등에 여러 개가 매달려 있기 때문에 고대 귀족들의 치레걸이[裝身具]의 일종으로만 알기 쉽다. 그러나 지석묘에서 동검과 함께 출토되는 예로 보아서 선사시대에는 주술적인 護符의 성격을 가진 신물로 보기도 하며(金良善, 「까분玉 源流考」, 『梅山國學散稿』, 숭전대학교박물관, 1972, 9쪽), 고분시대에 와서는 아름다운 곡옥의 용도가 장신구의 기능뿐만 아니라, 신앙, 사회적 지위, 계급, 종족 등과 관련된 表識, 상징 및 寶器的 뜻도 지닌 신물로 보기도 한다. 이러한 곡옥은 고분에서 출토되는 대표적인 유물의 하나이므로 그 기원과 형태의 상징적 의미에 대해서 그동안 수많은 궁금증이 끊임없이 제기돼 왔었다.

이 글에서는 곡옥의 이런 문제에 대해 곡옥을 사회적 지위, 계급, 종족 등과 관련된 표지나 상징으로 해석한 김양선 선생의 견해를 보다 구체적으로 밝히고 확대 해석해 종전의 여러 견해와는 다른 하나의 관점에서, 특히 삼국의 고분시대 곡옥의 기원과 상징성에 대한 해독을 시도해보려 한다.
고대사회의 곡옥은 위에서 보았듯이 장식성 이전에 그 시대의 원시사상과 생활에 밀접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곡옥은 고대의 사회적 구조와 원시종교를 이해한 바탕 위에서 그 기원과 조형적 상징성을 비롯한 곡옥 속에 내장돼 있는 각종 의미를 탐구해 보는 것이 가장 올바른 연구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곡옥은 玉으로 된 유물이므로 옥의 사용부터 일차적으로 먼저 살펴보자. 중국은 기원전 6천 년 전부터 옥을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중국 요녕성 査海 유적에서 발견된 신석기시대 玉이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옥을 사용한 예증이다(이형구, 『한국 고대문화의 비밀』, 김영사, 2004, 335쪽). 갑골문의 璞과 弄자도 몇 천 년 전의 중국인이 옥을 캐었던 지식과 경험이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주고 있다. 한국에선 2002년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발굴한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문암리 유적에서 신석기시대 5000년경의 옥결 한 쌍이 출토된 것이 보고됐다(국립문화재연구소,「고성군 문암리 선사유적 발굴설명회 자료」).


『설문』에서 옥은 仁義智勇의 五德을 가진 귀중한 보배로 설명했다. 그리고 『禮記』 「聘義篇」에는 옥이 가지고 있는 덕을 仁, 知, 義, 禮, 樂, 忠, 信 의 七德에 天地德을 보태어 九德을 갖춘 군자의 덕에 비유하면서 道와 같은 것이라고 했다. 고대에는 금을 天精으로, 옥을 地靈으로 여겨 精金靈玉이라 불렀다. 그러므로 옥은 최고로 존귀한 것이요, 영혼을 보호하며 권위를 상징하는 숭고한 징표로 여겨 곡옥 외에도 圭, 璋, 璜, 琮 등 의례용구에 모두 옥을 사용했다.


[그림1]에서 보듯이 금관과 드리개에 매달린 비취색의 곡옥은 단순한 아름다움을 나타내기 위한 장식물로서의 성격만이 아니라, 어떤 사회적 신분과 권위를 표지하기 위한 고유의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곡옥은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시원된 것일까? 라는 기원 문제가 무엇보다 먼저 대두된다. 그러한 기원 문제가 먼저 검토된 다음이라야 곡옥의 상징적 의미를 보다 자세히 검토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가. 곡옥의 기원
곡옥은 C자형, 반원형, 콤마형, 초생달형과 같은 만곡된 형태로 인해 곱은옥, 句玉, 까분옥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 형태상의 특이성 때문에 고고학계에선 항상 그 기원 문제가 가장 큰 관심거리였다. 지금까지 발표된 선행연구로는 모두 8가지의 기원설이 제시돼 있다. ① 맹수의 송곳니 기원설(최은주, 「한국곡옥의 연구」, <숭실사학>제4집, 1986, 46쪽 주105). ② 선사곡옥 기원설(韓炳三, 「曲玉의 起源」, <美術史學硏究>129·130, 韓國美術史學會, 1976, 222∼226쪽). ③ 태아기원설(임재해, 『신라 금관의 기원을 밝힌다』, 지식산업사, 2008, 496~504쪽). ④ 달 숭배사상 기원설(水野祐, 『句玉』, 東京學生社, 1995, 168쪽). ⑤ 태극기원설. ⑥ 생명상징 기원설(김병모, 『금관의 비밀』, 푸른역사, 1998, 34쪽). ⑦ 靈氣무늬 상징기원설(강우방, 『한국미술의 탄생』, 솔, 2007, 203쪽). ⑧ 옥룡기원설(이형구, 위의 책, 118∼122쪽) .


이들 8가지 곡옥의 기원설들은 대체로 생명이나 태아 등 여성에 관련된 기원설을 들고 있는 점이 특색이다. 곡옥이 여성들의 장신구에 주로 많이 장식돼 있기 때문에 그러한 공통적 해석이 많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용의 祖形으로 인식하는 홍산문화의 옥룡이나 옥잠에서 곡옥의 기원을 찾고자하는 부분은 김병모, 강우방, 이형구, 임재해 제씨가 공통적으로 언급하는 관점이어서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이 이론은 출토된 유물에 근거해 제기된 이론이자 고대한국 양잠의 원류를 탐색해볼 수 있는 문화전파의 루트에서 발견되고 있는 사실이란 점에서 강한 설득력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곡옥의 기원은 누에의 상징
필자는 곡옥이 한국에서 선사시대에는 한병삼 선생의 연구에서 보듯이 ‘주술적 護符의 성격을 지닌 神物’이라고 보는 견해에 동조하고, 고분시대에는 김양선 박사의 학설과 같이 ‘장신구의 기능뿐만 아니라, 신앙, 사회적 지위, 계급, 종족 등과 관련된 表識, 상징 및 寶器的 뜻도 지닌 신물’이라는 견해에 전적으로 左袒한다. 그렇다면 그 신물이 상징하고 있는 구체적 대상은 무엇이며 어떤 의미를 표지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 제일 궁금한 사실이다. 곡옥이 주로 고분시대 여성의 장신구에 많이 등장되고 있는 점과 형태상으로 누에 모습과 너무 비슷한 점을 유의해 볼 때, 곡옥은 고대 여성들의 길쌈문화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어떤 상징적 표현물이 아닐까 하는 추정을 한다.


고대인의 원시사상으로 볼 때 天인 누에를 용의 초기형태로 인식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왜냐하면 누에는 천충답게 太陽樹이자 神木인 扶桑을 먹이로 하며 고귀한 비단을 생산하기 때문이다. 이로써 ‘農’자의 字解는 뽕밭에서 누에를 치는 것을 형상화한 글자로 재해석하고자 한다. 이것은 농업 중에서 잠업의 중요성을 깨닫게 하는 정보로서, 최초의 農도 稻作이 먼저가 아니라 잠업이 먼저였을 가능성을 제시해주는 자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홍산문화 옥기 중에서 용의 원시형태인 猪龍, 熊龍[그림2] 등으로 중국 고고학계가 호칭하고 있는 옥룡의 원형은 그 당시 이미 발달된 동북방 잠업의 상징물인 누에, 곧 蠶龍으로 보는 것이 순리가 아닐까 한다.


신석기시대 잠룡은 누에를 용의 원시고형으로 인식한 고대 동북방 양잠문화의 시원을 증언하는 유물중의 하나다. 따라서 한반도 곡옥의 원류는 여기에서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미뤄 짐작해볼 수 있기 때문에, 홍산문화권에서 출토된 옥잠 즉 잠룡이 한반도 곡옥의 祖形으로 추정할 개연성은 매우 크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잠룡이 곡옥의 조형이라면 곡옥의 기원은 누에를 상징한 것이라는 논리가 형성된다.

그러나 곡옥 중에는 [그림4]처럼 구멍이 뚫린 頭部에 몇 갈래의 陰刻線이 새겨진 것이 있다. 곡옥 두부의 음각선에 대해선 그 각선들이 왜 새겨져 있으며 무엇을 상징한 것인지 지금까지 한 번도 문제가 제기된 적이 없다. 태아, 달, 태극의 모양이라면 그 각선들이 조형상 과연 필요한 것일까. 무엇 때문에 필요도 없고 이해되지도 않는 각선을 새겨놓았을까. 우리가 다만 해석을 못할 뿐이지 이유가 없는 유물의 문양은 없다. 유물의 문양은 고대인들의 사유를 반영한 생각의 지문이다.


[그림4]에서 곡옥의 刻線 모양은 蠶頭의 사실적 모습과 비슷하다. 누에의 머리와 눈(눈은 곡옥을 꿰는 구멍)은 곡옥이 누에를 상징하고 있다는 설에 강력한 설득력을 실어준다. 또한 [그림5]에서 볼 수 있듯이 모자곡옥의 몸체에 돋아 있는 돌기는 무엇을 형상화한 것인가. 거기에 돋아 있는 돌기의 모양으로 봤을 때 모자곡옥까지도 태아, 달, 태극문양, 생명의 씨, 영기무늬 등이라고 말하기엔 곤란한 점이 너무 많다. 그러므로 모자곡옥의 몸체에 돋은 돌기도 누에의 몸에 돋아 있는 돌기로 해석하면 문제는 아주 쉽게 이해될 것이다.

 


누에는 알을 많이 낳기 때문에 다산과 풍요의 상징물이 될 뿐 아니라, 번데기가 누에나방의 과정을 거쳐 羽化하므로 부활과 재생의 이미지를 함께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누에는 견사를 생산하는 이유 이외에 다산, 풍요, 부활, 재생 등의 상징성이 내포돼 있다. 필자는 누에의 이러한 상징적 의미를 옥이란 고귀한 물질에 아름답게 디자인해 장신구에 귀중하게 매단 조형물이 곡옥이라고 주장하고자 한다.
옥은 신이나 영혼을 불러들이는 영통성, 사악을 물리치는 힘, 생성력과 재생력을 지닌 주술성 등을 갖춘 광물로 믿어 왔기 때문에 呪術具로 많이 사용했다. 고대의 풍속에서 옥의 장식은 이러한 주술력을 체내에 유지시킴으로써 장수를 기원하기도 했으며 사후세계의 靈力을 빌기 위해서 葬具로도 많이 사용해 왔다. 그러므로 자연의 생성과 소멸의 순환법칙을 표상하고 원시종교적 상징성도 띤 누에에 옥을 사용한 것은 고대의 관념상 매우 당연한 이치라고 생각한다.

나. 곡옥과 달개[瓔珞]의 상징성
ㄱ) 곡옥의 상징성 선사시대는 주지하다시피 모계씨족중심사회였다. 모계씨족중심사회에는 女巫가 남성보다 우위에 군림하면서 족장으로서 통치적 권능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남성보다 관을 먼저 쓸 자격을 갖기 시작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여무가 남성보다 관을 먼저 착용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곡옥의 상징성에 대한 어떤 암시를 주고 있다. 또한 곡옥이 冠飾으로 그토록 많이 장식되고 있는 이유를 설명할 단서를 제공해주고 있다 하겠다.


“경주 황남대총 북분은 婦人帶라는 명문이 새겨진 허리띠가 출토됨으로써 女墳으로 고증되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금관은 남자가 묻힌 남분이 아니라 여자가 묻힌 북분에서 나왔다는 점이다. 물론 남분에서도 관은 나왔지만, 그것은 금관이 아니라 은제 관과 금동제 관이었다. 남자의 무덤에서는 금관이 나오지 않고, 부인의 무덤에서만 금관이 나왔다는 것은 참으로 심상치 않은 일이다.” (한국역사연구회 고대사분과,「신라 금관의 비밀」, 『한국고대사 산책』, 역사비평사, 1995, 335∼336쪽)


“북분 왕비의 금관에는 무려 80개가량의 비취곡옥이 달려 있으며 南墳 왕의 관은 이외로 금동관인데, 금동관으로서는 유일하게 곡옥을 장식했지만 그 수가 16개에 불과하다. 왕비의 금관이 더 화려한 것은 그 당시 女司祭長을 겸했을 왕비의 위상이 매우 높았음을 의미한다. 이로써 왕과 왕비의 관에는 반드시 곡옥을 장식했음을 알 수 있다. 금관총이나 천마총 출토 금관에도 60개에 가까운 곡옥이 달려 있다.”(강우방, 『한국미술의 탄생』, 솔, 2007, 195~196쪽) 위의 글에서 볼 수 있듯이 왕도 아닌 왕비의 고분에서 어떻게 이렇게 많은 수량의 곡옥이 화려하게 장식된 금관이 출토됐을까 라는 의문이 그동안 수없이 제기됐지만 아직 그 의문을 해소하기 위한 충분한 연구는 이뤄진 바가 없다.


앞에서 모계씨족중심인 고대사회의 특성상 祭政一致의 권능을 지닌 여사제장은 남성보다 관을 먼저 착용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그러나 부계씨족중심사회로 넘어오면서 관은 남성이 쓰는 복식으로 바뀌었다. 신라의 경우를 보면 초기 국가체제를 지나 5∼6세기 무렵부터 왕관은 신분과 권위를 나타내는 남왕의 위세품이 된 걸로 연구되고 있다. 그러나 초기 여성의 관에 표지했을 것으로 생각되는 곡옥이 후대 남왕의 왕관에도 왜 그대로 장식됐을까? 그 까닭은 원래 문화라는 것은 속성상 한번 나타나면 쉽게 사라지지 않으며 단절보다 계승에 그 특성이 두어지는 이유라고 하겠다. 또 문화발생의 초기에는 의미가 분명한 일도 기록을 남기지 않으면, 후대로 내려올수록 원의가 망각된 채 관습적인 반복만 이루어져 마침내 形骸만 남게 된다는 사실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황남대총 북분과 남분(98호고분)의 왕관과 곡옥은 바로 그와 같은 해석을 가능하게 해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왕비의 관이라도 곡옥을 주렁주렁 매달아 놓은 이유는 다른 데 있다고 본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조선시대 왕비가 양잠과 길쌈의 시조이자 蠶神과 織神으로 추앙된 서릉 씨를 모신 선잠제를 주관했듯 신라시대 왕비의 역할도 그와 비슷한 기능을 행사했을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유리왕 때의 가배 기록을 보면 두 왕녀가 양편의 지휘자로 등장해 길쌈놀이 행사를 주관한다. 그런 기록은 왕비가 중심에서 길쌈에 관여했을 것이라는 해석을 가능케 한다. 이로보아 신라 왕비는 어떻던 길쌈과 밀접한 직능의 신분이었을 개연성은 충분하다고 유추할 수 있다.


이러한 배경을 추찰한다면, 곡옥은 잠신의 상징인 누에를 형상화해 관식으로 삼음으로써 왕비의 신분을 표지한 고대사상의 상징적 표현방식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곡옥이 왕비의 금관보다 숫자는 적을지라도 왜 남왕의 금관에도 여전히 많이 달려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이겠는데, 그 문제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곡옥의 기원으로 볼 때 최초에는 잠신의 상징으로 등장했으나, 차츰 그 원의가 퇴색되면서 곡옥의 형태적 아름다움과 고귀성 그리고 옥이 지닌 덕성과 종교적 주술성만이 남아 그 의미가 강조되면서 남왕의 관식에도 관습적으로 장착돼 내려온 유습이라고 추정하고자 한다.


그러나 6세기 이후 신라왕관은 사라졌지만 곡옥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곡옥은 그 이후에도 여성의 장신구에 꾸준히 애용됐다. 출토물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이러한 사실은 곡옥이 근본적으로 남성보다 여성중심의 귀중한 장식물이었음을 실증하는 사례라 하겠다.
ㄴ) 달개의 상징성 신라시대의 금관과 귀걸이와 목걸이 등 장신구에 많이 매달려 있는 것은 곡옥만이 아니다. 거기에는 어김없이 바늘과 실처럼 늘 함께 垂飾된 樹葉形의 달개[瓔珞]가 매달려 있다. 달개의 형태에 대해선 그동안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러왔다. 樹葉, 心葉, 하트형, 杏葉 등 제 용어들을 학계에선 혼용하고 있다.


고대문화는 상호 유기적인 관계 아래에서 조형적 구성을 이루는 것이 보편적인 원리임을 생각할 때, 달개의 樹葉은 곡옥과 분리된 별개의 조형물이 결코 아닐 것으로 판단한다. 곡옥은 잠신을 상징한 누에가 그 원형임을 이미 앞에서 밝혔는데, 그와 같은 입장에서 본다면 영락은 누에의 먹이가 되는 뽕나무 잎사귀가 그 원형임이 명료해진다. 달개의 모양도 뽕나무 잎사귀와 흡사하다. 따라서 누에와 뽕나무 잎사귀의 구조적 상관성은 상징의 상보성으로 보더라도 그 합리성과 객관성이 담보되고 있다고 하겠다.


누에는 뽕잎을 먹고 산다. 뽕나무는 扶桑, 신화속의 神木이므로 太陽樹의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하늘이 만들어 낸 벌레, 곧 天蟲인 (누에 전)의 먹이가 된다. 누에는 천충이고 뽕나무는 신목이므로 곡옥이 누에를 상징한 것이라면 달개는 당연히 뽕나무 잎을 상징한 것이라야 한다. 이 이론은 문화사적인 견지에서 보더라도 매우 타당한 논리라고 생각한다. 달개의 원형은 초기에는 뽕나무 잎사귀 모양이었으나, 그 후 형태적으로 점차 다듬어지면서 이른바 심엽 또는 하트형의 모양으로 변형돼 나갔을 것으로 본다. 그러므로 드리개 중에서 桑葉形은 심엽이나 하트형보다 비교적 이른 시기의 달개 형태라 할 수 있다. 거듭 말하거니와 곡옥이 잠신의 상징물인 누에의 형태를 아름답게 디자인한 형태라고 한다면, 달개는 누에와 궁합이 맞는 상엽을 조형화한 것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다. 글의 마무리
인류사회의 발전 단계와 고대사회의 성격상에서 미뤄볼 때, 신석기시대는 모계중심씨족사회였음이 주지의 사실이다. 모계중심사회는 여사제장이 부족사회의 질서를 유지시켰을 것이다. 중국의 황제시대는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 넘어온 시기였을 것이지만, 여사제장의 역할은 사라지지 않고 잔존된 형태였을 것으로 추찰된다. 전설적인 일이지만 황제의 원비 서릉 씨는 여사제장이자 길쌈과 누에치기를 처음으로 가르쳐 잠신으로 추앙된 인물이다.

그래서 본고에서는 서릉 씨와 비슷한 역할을 수행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고대의 왕비나 지도자급 여성들이 길쌈을 총괄하는 직신과 잠신의 신분임을 標識하기 위해 누에 형태의 조형물을 상징화하고 그것을 관을 비롯한 중요 장신구에 매단 것이 곡옥의 기원이라고 해석한 것이다.
그리고 곡옥과 함께 나뭇잎사귀 모양으로 장식되고 있는 달개의 명칭도 지금까지 불러왔던 心葉 또는 하트형, 杏葉 등과 같은 형태의 유사성에서 임의로 이름을 붙인 즉물적 방식이 아니라 누에와 직접 관련이 깊은 뽕나무 잎 즉 桑葉을 드리개로 장식화한 垂飾이란 점을 주장했다. 누에와 뽕잎의 장식적 결합은 지극히 당연한 조형적 구성이며 동시에 곡옥의 등장역사와 견직물의 출현역사가 비슷한 점도 매우 주목할 만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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