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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베스트셀러 될 수 있었던 국제적 맥락 강조”
“동아시아 베스트셀러 될 수 있었던 국제적 맥락 강조”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3.11.05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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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감·해설 징비록』(아카넷 刊) 내놓은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조교수


류성룡의 『징비록』은 이것이 임진왜란에 대한 성찰적 기록이란 점에서 학계와 출판계에 많이 회자됐다. 번역본이 많이 나왔던 것도 이를 방증한다. 그런데 아카넷에서 ‘규장각 새로 읽는 우리 고전 005’로 『징비록』이 다시 나왔다. 무엇이 새로울까.

‘교감·해설’이란 수식이 덧붙었으며, 소장 학자인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조교수(38세)가 역해를 맡았다. 흥미로운 것은, 김 교수가 ‘한국사’ 전공자가 아니라 ‘일본학’ 전공자라는 점이다. 고문헌과 고문서 연구를 통해 전근대 일본의 대외전쟁 담론을 추적하고 있는 김 교수는 『이국정벌전기의 세계』(가마사쇼인 刊, 2010), 『히데요시의 대외 전쟁』(가마사쇼인 刊, 2011), 『일본과 이국의 전쟁과 문학』(가마사쇼인 刊, 2012) 등 굵직한 저서를 상재했다.  

김 교수가 역해한 『징비록』의 특징은 ‘校勘’에 있다. 초본과 간본 등 『징비록』의 여러 판본은 물론 임진왜란과 관련해 류성룡이 여러 문헌에 남긴 증언, 17세기 후기 일본에서 간행돼 일본과 중국에서 널리 읽힌 일본판 징비록인 『조선징비록』 등까지 검토, 교감하고 해제를 붙였다. 또한 『징비록』에 나타난 류성룡의 史觀, 『징비록』이 일본, 중국까지 전파돼 나가 이른바 ‘동아시아 베스트셀러’가 되는 과정도 짚어낸 것도 이채롭다. 그를 이메일로 만났다.

 

△ 임진왜란 연구와 관련, 학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소장 학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먼저 임진왜란 연구사에 있어 선생의 ‘기본 시각’이 무엇인지 듣고 싶다.

 “‘나는 이제까지 임진왜란에 대한 뭔가 ‘독특한 시각’ 즉 나만의 고유한 史觀을 만들어내고자 했다는 생각을 해오지 않았다. 나는 임진왜란이라는 전쟁이 동아시아 역사상 유례가 드문 다국간의 국제전이었다는 관점을 기본적으로 갖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전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쟁 당시나 그 직후에 각국에서 집필된 사료로서의 문헌은 물론, 이 인상적인 전쟁에 대한 각국의 관념 형성을 보여주는 문학적 문헌까지 널리 살펴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이제까지 나는 일본측 문헌은 비교적 널리 보아왔지만, 상대적으로 조선과 명·청의 문헌, 나아가 동아시아 바깥 지역의 문헌은 덜 보아왔다. 그렇기 때문에 늘 살얼음을 밟는 느낌으로 연구하고 있음을 말하고 싶다.

이번에 『징비록』의 역해 작업을 하면서 느낀 점은, 류성룡은 결코 이 전쟁을 한일 양국간의 전쟁으로만 파악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류성룡은 전쟁 발발 1년 쯤 지난 시점에 이미 이 전쟁이 결국 종결될 것을 예감하고, 앞으로의 걱정거리는 누르하치가 이끄는 북방 여진인이라고 전망한다. 더욱이 류성룡은 이러한 상황을 소극적이고 비관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조선이 능동적으로 이들 세력을 견제하고 균형을 유지해야 하며 또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점에서 『징비록』을 일본에 대한 증오의 기록이라거나 전쟁의 비극에 대한 보고서로만 읽는 것은, 류성룡과 당시의 조선 民官이 지니고 있던 국제 정세 감각과 능동성을 誤讀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 책의 부제가 ‘한국의 고전에서 동아시아의 고전으로’다. 『징비록』이 동아시아 삼국에서 일종의 ‘베스트셀러’였다고 지적했는데.

“임진왜란을 기록한 조선 문헌으로 『징비록』이외에 여러 서적이 17세기 후반에 일본 쓰시마번에 소장돼 있었다는 것이 당시 문헌에서 확인된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17세기 말 ~ 19세기 초에 일본의 역사서와 문학서에 지울 수 없는 영향을 준 문헌은 『징비록』이 유일하다.  金誠一의 『해사록』, 사명당 惟政의 『분충서난록』, 安邦俊의 『隱峰野史別錄』 등도 임진왜란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담고 있는 문헌이지만, 이들 문헌은 같은 시기에 소수의 일본 문헌에 인용되거나 19세기 이후에 비로소 널리 이용되기 시작했다. 이렇듯다수의 조선 문헌 가운데 『징비록』만이 거의 유일하게 일본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해제에서도 적은 바와 같이 류성룡이 일관되고도 극적으로 기록한 임진왜란觀이 많은 조선인은 물론 일본인들도 납득시켰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일본이나 명에서 기록된 임진왜란 문헌을 일별하면, 그 서술이 산만하거나 몇몇 인물이나 전투에 편중돼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 문헌들과 비교하면 『징비록』은 임진왜란이라는 국제전의 시작부터 끝까지 조리 있게 제시하고 있다.

더욱이 『징비록』은 단순한 사료집이나 편년체 사서가 아니라, 류성룡이라는 개인의 회고록으로서의 성격도 지니고 있어서 동아시아 각국의 독자들에게 친근감을 느끼게 한 것으로 보인다. 에도시대 일본인과 청대 중국인이 『징비록』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은 이러한 요인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 아쉽게도 『징비록』의 경우 그 출간시점이 불명확하다. 또, 『징비록』이 일본, 중국으로 전파되는 과정은 어떠했나.

“초본과 16권본, 2권본 『징비록』의 정확한 성립시점에 대해 확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다.

대략 1604년경에 현재 국보로 지정돼 있는 초본 『징비록』이 성립하고, 1647년경에 16권본이, 그리고 1683년 이전에 2권본이 성립해 있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1683년의 쓰시마번 소장 도서 목록에는 2권본이 포함돼 있으므로, 이것이 2권본의 성립 하한선이 된다.

한편 2권본 『징비록』은 후쿠오카번(福岡藩)의 저명한 유학자인 가이바라 엣켄(貝原益軒)을 통해 17세기 말에 쓰시마에서 규슈, 그리고 교토로 전달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2권본을 4권본으로 分冊하고 조선지도 등의 부록을 붙인 『조선징비록』이 1705년에 교토에서 간행된 뒤, 일본에서는 거의 전적으로 2권본(4권본 『징비록』)만이 읽힌 것 같다. 나아가, 이 2권본(4권본 『징비록』)은 나가사키에 와있던 네덜란드인을 통해 유럽으로, 그리고 청대 말기에 일본에 와 있던 학자 楊守敬을 통해 중국으로 유입됐다.”

△ 『징비록』에 나타난 ‘임진왜란관’을 두고 ‘자기반성 사관’ ‘이순신 사관’ ‘조선중심 사관’으로 설명했다. 이런 사관을반영한 『징비록』이 어떻게 동아시아로 퍼져나갈 수 있었나.

 “류성룡이 『징비록』에서 보여준 자기반성 사관으로 인해, 에도시대 일본인과 청대 중국인들은 이 책을 신뢰하고 전쟁 당시의 조선 朝野를 재평가한 것 같다. 『징비록』의 자기반성 사관을 접한 근세 일본 학자들 가운데 일부는 이를 바탕으로 ‘조선이 당할만 하니까 당했다’는 우익적인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그러나 『징비록』이 일본 사회에 정착하는데 큰 기여를 한 가이바라 엣켄의 경우, 1705년에 교토에서 간행된 『조선징비록』의 서문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무익하고 사악한 전쟁을 일으켰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는 그가 류성룡의 논리에 설득됐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징비록』이 일본에 들어가 확산되기 전인 17세기에 일본인들이 접할 수 있었던 임진왜란 문헌은 일본인들 자신의 것과 명대 중국인들이 기록한 것이었는데, 이들 문헌은 모두 조선이 무능해서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임진왜란의 진정한 주인공은 명과 일본이라고 주장하며, 공통적으로 조선측의 무능과 부패를 강조한다. 침략국인 일본측의 문헌은 자국의 침략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원조국인 명측의 문헌은 자국의 원조 행위를 강조하기 위해 조선 조야의 항전 활동을 저평가한 것이다.

그러나 2권본 『징비록』이 일본에 들어가 출판되는 17세기 말~18세기 초 이후, 근세 일본의 임진왜란 인식은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그리하여, 이순신의 활약과 조선 의병의 분투 등을 강조하는 등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거의 비슷한 형태의 임진왜란관이 일본에서 성립하고 이것이 근대 역사학으로까지 이어졌다.”

△ ‘교감, 해설 ‘이 쉽지 않았을텐데.

“이번 작업의 가장 어려운 점은, 이전에 이미 20여 차례의 『징비록』 번역 및 해설본이 출간돼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토록 여러 차례 간행되고 세계적으로도 널리 알려진 문헌을 내가 새로 손대는 의의는 무엇인가’ 라는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기존에 간행된 책들은 초본과 간행본(16권본, 2권본, 4권본), 조선판과 일본판, 중국인의 독서기 등 여러 형태의 『징비록』을 교감해 그 차이를 확인하고 定本을 만들어내는 작업에는 관심이 적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기존 저자들은 『징비록』의 자기반성 사관에 공감해 이를 강조하는데 주안점을 뒀기 때문에, 일본과 중국에서 『징비록』이 널리 읽혀 양국의 독서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는 국제적인 맥락을 명백히 파악해 드러내는 데 소홀했다. 기존 『징비록』을 번역·해설한 분들, 특히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정통하신 분들의 작업을 능가하기란, 고전 일본학을 연구해 온 나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내가 외국학을 연구하기 때문에 기존의 번역·해설과는 다르게 『징비록』을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있지 않을까. 그래서 이번 해설에서는 동아시아, 특히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의 상황을 서술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 역사의 저편에 존재하는 『징비록』이 지금 우리에게 시사점이 있다면.

“류성룡과 『징비록』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조선·한국에 대한 지식만으로는 부족하며, 문자 그대로 동아시아라는 맥락에서 접근해야 한다. 그래야 류성룡이 임진왜란 당시에 어떤 고민을 했으며 『징비록』을 통해 어떤 이야기를 하려 했는지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다. 류성룡은 임진왜란이라는 목전의 위기를 처리하는데 몰두할 뿐 아니라, 일본·여진·명 등 국제적인 액터(actor)들의 움직임에 기민하게 대응했다. 그는 눈앞에 발생한 위기에 대응하는데 급급했던 것이 아니라, 조선이 놓여 있는 국제적 맥락에서 미래에 발생할 상황까지 전망하고 행동했다. 류성룡이 『징비록』을 통해 보여주는 그러한 국제적 감각과 통찰은 21세기 한국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필수적으로 요청되는 자질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류성룡과 같은 국제적 감각으로 『징비록』과 같이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성과를 만들어내는 것은 현대 한국 학계의 임무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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