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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은 직면하며 즐겨야 한다”
“음악은 직면하며 즐겨야 한다”
  • 교수신문
  • 승인 2013.11.05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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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가 에드워드 T. 콘이 말하는 클래식의 이해


가을 국화향기 가득하다. 이런 시간일수록 클래식에 입맛이 땡기게 마련. 클래식을 이해하고 감상하는 방법들은 개인차만큼이나 다양할 것이다. 20세기 미국을 대표하는 음악학자이자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였던 에드워드 T. 콘(Edward T. Cone, 1917~2004)이 쓴 책 가운데 클래식 애호가들이라면 솔깃할 책이 있다. 1974년에 쓴 The Composer’s Voice인데, 이 책을 서울대에 출강하고 있는 음악학자 김정진 박사가 번역해 『클래식의 격렬한 이해』(앨피 刊)로 내놨다. 옮긴이는 “그 어떤 책보다도 클래식 음악과 그 감상자들의 거리를 좁히려는, 클래식 음악의 ‘격렬한’ 이해를 염원하고 자극하는 텍스트”라고 이 책을 소개했다. 깊어가는 가을, 국화향과 함께 클래식의 선율에 조금 더 다가가보기 위해 에드워드 T. 콘이 말하는 「음악은 직면하며, 즐겨야 한다」 부분을 소개한다.

음악작품의 내용을 언어로 결코 만족스럽게 설명하기 어렵다는 사실이 꼭 음악가에게 불리한 것은 아니다. 음악가가 왜 설명하려 노력해야 하는가?
음악가에게는 음악의 제스처가 제2의 본성이다. 음악의 제스처는 그의 의식적 생각만큼이나 잠재의식의 일부다. 그리고 그 제스처들은 어떤 음악에 대한 하나의 문맥을 잠재의식적으로 만들어 내는 ‘경험 창고’의 주요 부분이다. 즉, 음악가에게는 그의 기억이 만들어낸 문맥이 결코 전적인 것은 아니더라도 하나의 음악적 문맥이 된다. 그래서 음악가들은 특정 작품의 중요성을 언급할 때 꼭 다른 작품과 연관시켜 표현한다.


교양 있는 청취자도 마찬가지다. 어떤 작품을 논할 때에는 음악적 양식과 관례의 문맥 안에서 음악을 평가해야 한다. 그러한 연관성을 만들 수 없다면, 그 내용을 인지하지 못하거나 그것을 총체적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형식주의자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작품 이해의 유일한 근원이 다른 작품들과의 관련성에 나온다. 형식주의자에게는 음악의 명백히 인간적인 내용도 양식적 관례의 전통적이고 독단적 관련성에서 나오는 인위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반화는 공인되기 어렵다.
실제로 음악적 표현성은 관례에 크게 의존한다. 음악만 그런 것이 아니다. 언어예술과 재현예술 모두 기본적으로, 인간적인 내용을 표현하는 힘은 관례적 양상에 대한 인식에서 나온다. 양식적 관례는 필연적으로 이율배반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관례는 표현적이고 형식적인 이성을 위해 생겨나고, 표현적이고 형식적인 목적에 기여한다. 근대 서양음악에서 장단조가 각기 불러일으킨 감정적 효과는 이를 보여 주는 적절한 예다. 일반적으로 장음계를 바탕으로 만들어지는 장조는 즐겁고 밝은 느낌을, 단음계로 만들어지는 단조는 어둡고 쓸쓸한 느낌을 준다. 그 특성은 조성 체계 구조에서 자연스럽게 발전돼, 중요한 표현적 필요성을 충족시키는 관례가 됐다.
쇼팽의 피아노 소나타 2번 Bb단조 Op.35 「장송 행진곡(Marche fun?bre)」(1839)의 표현적 연관성이 결국 ‘장송 행진곡’이라는 관례적 상징이 되는 것은, 4분의 4박자의 느린 템포, 육중한 리듬, 엄숙한 음색의 결합을 우리가 인지한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이러한 상징이 이를 예증할 쇼팽의 곡 같은 작품 없이도 성립할 수 있느냐는 문제를 고려하지 않고도, 우리는 이 관례가 이율배반적이지 않다고 대답할 수 있다. 장속곡이나 행진곡에 쓰이는 음악적 관례는 음악이 기능적인 요구에 반응해 생겨났기 때문이다.


음악적 관례는 클래식 음악 전체로 확대시킬 수 있다. 기능성 작품 뿐 아니라 예술 작품 전체에 똑같은 관례가 적용된다. 우리의 예술적인 목적과 요구에 반응해 만들어진 예술 작품은, 우리의 상상력 안에서 예술적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음악적 관례를 만들어 낸다. 다만, 이 관례라는 것이 인간의 경험 일반이라는 더 넓은 범위의 문맥에 자리한다는 것이 기능성 작품과 다르다. 기능성 작품이자 무엇보다 예술 작품인 쇼팽의 소나타는 이 음악적 관례를 통해 친숙한 인간적 상황을 전달한다.

형식주의자들은 순수 음악적 맥락조차도 형식적 요소들만큼이나 표현적 요소들의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종종 망각한다. 우리는 어떤 작품의 내용을 설명할 때 다른 작품과의 양식적 유사성에 자주 의존한다. 하지만 기교나 형식, 양식 면에서 아무런 공통점이 없어 보이는 작품들 사이에서도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작품들이 공유하는 것이 바로 내가 ‘표현적 잠재성’이라 부른 광범위한 영역이다.


이 유사성을 감지 내지 판별하는 감각은 필연적으로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내 경우에는 헝가리 현대음악의 창시자인 벨라 바르톡의 「현악4중주 6번 D장조 Sz 114」와 베토벤 후기 현악4중주(Op.127, 130, 131, 132, 133, 135)들의 내용이 거의 겹치는 것으로 들린다.

특히 바르톡의 네 겹의 Mesto(‘슬프게’), 즉 1.Mesto-Vivace, 2.Mesto-Marcia, 3.Mesto-Burletta, 4.Mesto-Molto Tranquillo는 관용구나 구조적인 면이 아닌 표현적인 효과 면에서 베토벤의 「현악 4중주 14번 Op.131」의 시작 푸가와 매우 유사하게 들린다. 나는 형식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인간적 문맥과 동떨어진 ‘순수한’ 음악적 문맥은 없다고 주장한다. 미국 작가 J.오하라는 옳았다. “음악은 …… 즐겨야 한다. 음악은 직면하는 편이 낫다. 만약 음악을 즐겨야 한다면 그것은 인간적 연관성을 가져야 한다.”(존 오하라, Butterfield 8, New York: Harcourt Bracem 1935) 문맥이 없으면 내용도 없다. 문맥이 있는 곳에 내용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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