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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회생해도 사회주의 공급체계로는‘신체왜소’해결 못 한다”
“북한 회생해도 사회주의 공급체계로는‘신체왜소’해결 못 한다”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3.10.28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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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인터뷰_ 『푸코와 북한사회 신체왜소의 정치학』(인간사랑 刊) 낸 ‘탈북민’ 김영희 박사

일반적으로 북한주민이 남쪽 사람들보다 신체가 왜소하다는 것은 자주 지적돼 온 문제다. 이렇게 키나 체격이 현격하게 차이나는 것을 두고 ‘식량부족’에서 쉽게 원인을 찾을 수 있지만, “북한사회 신체왜소는 식품부족만이 아닌 식품획득 지위의 박탈, 식품 부족의 환경에 적응시키기 위한 당국의 끈질긴 노력의 산물”이라는 분석도 제기되고 있다.


2002년 12월 가족과 함께 대한민국에 입국한 ‘탈북민’ 김영희 한국정책금융공사 북한경제팀장(49세·정치학 박사)이 그런 분석을 내놓고 있다. 김 박사는 최근 이런 정치한 분석을 담은『푸코와 북한사회 신체왜소의 정치학』(인간사랑 刊)을 상재해 눈길을 끌고 있다.


김 박사는 입국 후3년 동안 사단법인 ‘새롭고 하나된 조국 위한 모임’(새조위)에서 탈북민의 정착을 돕는 지원활동을 전개했다. 2006년 8월 북한대학원대학에서 석사학위를, 올 2월 동국대에서 북한연구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2010년 9월부터 한국정책금융공사에서 수석연구위원으로 활동하다 올해부터 북한경제팀 팀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그의 이력에서 알 수 있듯, 김 박사는 드물게 ‘두 체제’를 경험한 탈북출신 연구자로 학술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는 전문가다. 1965년 함경북도 길주에서 태어나 대학을 졸업한 뒤 10여 년 동안 재정회계부문에서 근무하다 2002년 탈북했다. 그동안 발표한 논문으로는 「북한 중앙은행의 기능변화와 전망」, 「일상의 정치화, 군사화, 신분화를 통해 본 북한주민 일상」등이 있으며, 지은 책으로는 『탈북부부 박사가 본 북한: 딜레마와 몸부림』등이 있다.


김 박사의 이 책은 북한 실물에 밝은 그의 꼼꼼한 지적 산물이란 의미 외에도, “신체왜소 흔적이 남아 있는 자식을 둔 엄마로서의 자책감과 탈북민 북한연구자로서의 시대적 사명”을 함께 읽어낼 수 있는 드문 勞作이라 평가할 수 있다. 그를 이메일로 만났다.

△ 한국에 정착한 뒤 2006년부터 경남대 북한대학원대학에서 공부를 시작해 올해초 동국대에서 박사학위까지 마쳤다. ‘연구’ 생활에 관심을 둔 이유가 궁금하다. 또 대학원에서 관심 있게 공부한 분야는 무엇인가.
“입국해서 처음에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리고 내가 잘 하는 것은 무엇이고 잘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조차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북한에서의 전공(회계)을 살려 전산회계를 해보려고 학원문을 두드리기도 했지만, 용어가 어려워서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선배들의 의견과 고용안정지원센터의 조언을 듣고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전전긍긍하던 차에 북한학이 있고, 북한을 연구하는 전문가들이 있으며, 북한을 전문으로 한 박사학위도 있다는 것을 알게됐다. 그때 아차하는 생각이 들었다. 북한에서 배웠고 살아왔으니 그래도 그것이 강점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연구’가 업이 되는 직업에 대해서는 아직 관심이 없고 우선 배워보자는 생각에 북한대학원대학을 지원했다. 이 길이 회계사였던 나를 연구의 길로 이끌었고, 지금까지 이 길로 가게 된 계기가 됐다. 석사학위 이후 산업은행 경제연구소에 취직해 북한연구를 처음 시작, 이론을 좀 더 배워야겠다는 생각에 동국대 대학원에 지원했고, 결국 박사학위까지 받게 됐다.


사실 전공이었던 경제도 중요했지만, 나에게는 북한사회와 북한주민들의 삶 그 자체를 연구하고 배우는 것이 더 재미있었다. 그리고 나 자신이 북한이탈주민이다 보니 이들에 대한 관심 또한 높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석사 때에는 ‘북한이탈주민의 삶’에 대한 공부를 많이 했다. 박사학위 과정 때에는 약국의 감초처럼 한 분야가 아닌 북한경제, 통일정책, 북한 문화 등에 관심을 가졌다. 남한의 전문가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탈북자들의 경우는 북한의 어느 한분야가 아닌 전반적인 부분에 대해 포괄적으로 다룰 수 있는 장점은 있는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전문분야가 불분명할 때가 있다. 저 박사는 전공이 뭐지? 라는 질문이 이어질 때도 있고…….”

△ 직장생활을 하면서 대학원 공부를 한다는 게 여간한 일이 아니다. 또, 직접적인 경험이 바탕이 된 ‘북한연구’라고 해도 데이터와 자료 분석, 가설제시와 증명 등 연구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대학원 공부를 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게 무엇이었나.
“북한에서 대학원은 내가 희망한다고 갈 수 있는 데가 아니다. 일단 사회현장에 배치되고 나면 실무에만 치중하지 더 이상 자기계발은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남한에서 쓰는 보고서나 논문은 거의 써본 적이 없다. 논문은 대학을 졸업하면서 한번 써본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초보적으로 남한식 논문에 대한 개념이 없었고 그렇다고 누가 논문을 어떻게 쓰는지 가르치는 사람도 없었다. 모든 것이 자기 몫이었다. 석사 첫 학기에는 기본적으로 교수님 강의가 귀에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 다시 말해 용어의 차이, 외래어의 사용으로 귀가 안 열렸던 것이다. 직장생활과 대학원 공부를 병행했기 때문에 힘들었다기보다도 용어 때문에 가장 힘들었던 것 같다. 메커니즘, 패러다임 참 어려웠다. 박사과정 때는 입국한지 3년이 지났고 석사과정을 마쳤기 때문에 이해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또한 북한식 표현과 띄어쓰기, 문장서술방식 등에 익숙해 있었던 기존 체질도 기말보고서 작성과 졸업논문 작성에서 큰 어려움으로 작용했다. 석사논문의 경우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서울대와 교원대 박사과정생의 도움을 받았다. 일일이 다 교정해줬다. 그래도 아직도 문장이 매끄럽지 못하고 표현도 부드럽지 못한 데가 많다. 대학원 수업시간 연구발표와 기말리포트 작성을 통해 연구논문 작성법을 익혔고 첫 기말리포트는 교수님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연구주제 선정, 목차 작성, 자료수집, 분석 등에 대해 함께 논의하고 써가는 과정을 통해 배울 수 있었다.”

△ ‘박사부부’로 알려져 있다. 현재 탈북자들이 선생님처럼 공부(연구)에 뜻을 두고 있는 분들 대략 얼마나 되나? 대학에서 따로 혜택을 주는 게 있는가.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으나, 북한에서 대학을 졸업한 탈북자들의 경우 대부분 대학원을 선호한다. 이유는 공부할 수 있는 선택의 폭이 넓으니 마음껏 자신의 꿈을 펼치고 싶다는 것과, 북한학의 경우 열심히만 하면 잘 할 수 있는 부분이라 여기기 때문인 것 같다. 여기엔 좀 더 깊은 까닭이 있는 것 같다. 대학원 과정을 통해 교육문화와 한국사회의 주류문화를 알고 싶은 욕구도 있고, 또 학연, 지연, 혈연과 같은 3연이 없는 탈북자들이 남한에서 할 수 있는 대학원 공부를 통해서라도 학연을 만들고 싶어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논문을 쓰고 연구에 집중하려면 생업에서 어느 정도 안정돼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니 깊이 있은 글이 나오지 않고 도중에 포기하는 경우도 있는 것으로 안다. 대학원의 꿈은 있지만, 선뜻 결심하지 못하는 분들도 많다.”

△ 사실 북한연구는 접근의 특수성 때문에 쉽지 않다고 본다.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까지 북한연구가 대학의 ‘북한학과’를 중심으로, 한편으로는 국문학계 등 관련 학계에서 ‘북한문학(예술)연구’로 많이들 진행됐지만, 지금 많이 위축된 것으로 안다. 북한연구를 활성화할 수 있는 방안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 수 있는가.

“다른 연구분야는 자료가 너무 많다. 그러나 북한과 같은 경우, 특히 북한경제 분야는 데이터가 거의 없다. 대부분 북한의 선전물이라 할 수 있는 북한원전, 탈북자 인터뷰, 또는 중국에서 친척방문 한 북한사람 인터뷰 등을 통해 자료를 얻고 이를 바탕으로 연구를 하고 있는 현실이다. 자료부족으로 연구가 진척되기 어려운 점이 있다. 이러한 문제는 탈북자들과 공동연구를 통해 해결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탈북자들이 북한연구에서 증언자로 남아있으면 수동적인 자세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들에게 북한연구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줘야 한다.

국내 석·박사 학위를 받는 탈북자들이 60명을 넘고 있는데 대부분 북한연구에서 증언자 정도로 참여하고 있거나 배제되는 것이 현실이다. 또한 통일부나 국정원에서는 이들을 통한 미시적인 북한 전반 상황에 대한 자료가 충분히 있는 것으로 추정한다. 이러한 자료들을 모두 공유할 수 있다면 연구의 활성화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 이번 책의 주제는 ‘북한주민의 신체왜소’다. 독특한 주제인데, 머리말에서는 “전공과는 거리가 멀다”라고 말했다. 이 주제를 택한 이유가 짐작되긴 하지만, 직접 말해 달라.
“북한에 있었다면 신체왜소 문제를 전혀 생각해 보지 않았을 것이다. 주민 전반에 신체왜소 현상이 나타났기 때문에 상대적 박탈감 같은 것은 전혀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나 입국 후 남한사람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왜소하다는 것을 크게 느끼게 됐다. 탈북청소년들의 경우 이곳에서 와서 식생활 환경이 좋아져 한동안 키가 크긴 한다. 그러나 더는 자라지 못하는데, 이는 어릴 때의 영향 때문이다. 그래서 신체왜소의 심각성과 그 근원을 밝혀보고 싶었다.”

△ 책을 접하고 흥미롭게 생각한 게, 신체왜소를 분석하면서 프랑스 사상가 미셀 푸코의 이론을 활용한 부분이었다. 선생께서 푸코의 생명정치를 가져온 이유를 밝힌 대목에서도 지적했듯 “푸코가 묘사한 권력은 자유민주체제의 환경에서 작동하는 권력이다.” 그런데도 푸코의 이론을 빌렸다. 푸코가 아니어도 되지 않았나.
“푸코는 권력이 몸에 각인된다고 했다. 이것을 읽고 나니 뇌리를 치는 것이 있었다. 북한주민 신체왜소는 식품분야에 작용하는 권력이 몸에 각인 된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먹지 못하니까 왜소하지 않나?’ 하는 말과 같다. 물론 이 말은 인간의 생활에서 저소비의식이라는 정신영역의 작용을 배제하고 먹거리 부족이라는 물질영역만을 논의한 일면적인 점도 있으나 신체왜소는 권력의 작용 때문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푸코가 묘사한 권력은 자유민주주의체제의 환경에서 작동하는 권력이고, 권력이 의도한대로만 몸에 각인된다고 했다. 그러나 북한은 자유민주주의 체제도 아니고 북한 권력이 처음부터 신체왜소를 의도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이를 밝혀내는 것은 어려웠다. 박사논문에서는 이를 적용하지 못했으나 박사학위 이후 전문분야 등재학술지들에 기고하는 방식으로 심사자들의 평가를 받아 학술지에 게재된 내용을 저서에 넣었다.”

△ 선생께서는 북한주민의 신체왜소가 식품(식량)부족보다도 식품획득지위, 저소비의식 등에서 비롯됐다고 보고 있다. 비록 식품획득 지위가 차별화돼 있고, 저소비의식을 확산해 의식적인 절제를 강요했다하더라도, 결국 문제는 ‘식품 부족’에 있는 것 아닌가. 그래서 선생은 책의 결론 부분에서 ‘시장 기능 활성화’와 식품 구입 지위 보장을 주문한 것 같다. 하지만, 시장 기능 활성화가 과연 ‘식품 부족’이라는 근본 문제를 어디까지 해결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북한사회 신체왜소를 연구하면서 놀란 부분이 통일 전 동서독에서도 동독주민의 키가 작았는데 통일이후는 따라잡는 현상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통독 전 동독은 사회주의권에서 잘 사는 나라였음에도 서독주민에 비해 키가 작았다. 이는 아무리 동독주민의 식생활 수준이 다른 사회주의나라 주민들에 비해 높다고 해도 자율적인 식생활 환경을 보장해 주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나타났다. 자율적인 식생활 환경은 시장 기능 활성화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결국 식품양의 부족도 중요하지만, 신체적 특성에 맞는 식품을 구입할 수 있게 하는 시장의 기능이 중요하다고 본다. 그래서 시장 기능 활성화를 강조했다.”

△ 북한주민의 신체왜소가 북한이 선택한 역사의 경로에서 발생한 것이었다 해도 이를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다는 게 책의 메시지라고 볼 수 있다면, 한국사회와 국제사회가 마땅히 할 수 있는, 해야 할 일이 있을 것 같다.
“그렇다. 정부에서도 관심을 두고 있지만, 영유아 지원이나 임산부 지원을 비롯해 북한주민을 대상으로 한 지원은 지속적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이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다. 주민들에게 자율적인 식생활 환경을 마련해 줄 수 있도록 북한정권이 변해야 한다. 북한경제가 회생한다고 해도 사회주의 국가공급체계를 갖고는 신체왜소를 완전히 없애기 어렵다.”

△ 선생께서는 남북 두 체제를 모두 경험했다. 책 서문에 밝힌 고백 '어머니가 그립다'는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북한연구자’로서 앞으로 어떤 역할을 하고 싶은지 궁금하다.
“북한은 나의 태를 묻은 고향이다. 어머니도 계시고 동생들도, 정다운 이웃도 있다. 남한은 나에게 연구자로의 오늘의 삶을 주었고 미래가 약속돼 있는 곳이다. 서로 윈윈해 잘 살아갔으면 좋겠다. 이를 위해서는 북한정권을 개혁개방으로 유도하는 것인데 여기서 북한연구자로의 할 몫이 많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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