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5 08:40 (목)
“1백만권 ‘지혜의 숲’ 키우는 일은 새로운 지식문화 운동”
“1백만권 ‘지혜의 숲’ 키우는 일은 새로운 지식문화 운동”
  • 최익현 편집국장
  • 승인 2013.10.28 15:4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열린 도서관’ 추진하는 김언호 파주출판도시문화재단 이사장

책과 도서관은 인류문화자산의 결정체다. 생각을 북돋고, 성찰을 이끌어내는 공간이다.
지금처럼 스마트폰에 묻혀 사회가 생각을 멈추고, 더 이상 성찰을 하지 못한다면,
10~20년 뒤 우리 사회는 문화적 죽음을 맞게 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정신문화를 챙기는 문화복지를 생각해볼 수 있지 않겠나. 정부가 통 크게 ‘열린 도서관’에 깊은 관심을 보이면 좋겠다.

▲ 김언호 이사장은 1945년 생. 1968~1975년 동아일보 기자로 있다가 해직후, 1976년에 한길사를 세워 출판에 진력했다. 1997년 서울출판인포럼 대표, 1997~2000년 파주 예술마을 헤이리 이사장, 1998~2002년 한국출판인회의 회장, 2008~2011년 동아시아출판인회의 의장 등을 역임했으며, 2011년부터 파주북소리 조직위원장으로 있다.

 

1945년 밀양에서 태어난 그의 인생이 온통 뒤바뀌게 된 것은 ‘해직기자’가 되면서부터다. 그는 동아일보에서 해직된 이듬해인 1976년 출판사 ‘한길사’를 설립하고 38년 동안 책 만드는 일에 모든 것을 걸어 왔다. 그리고 그는 확실히 출판인으로 대성했다. 그러나 지금 그는 더욱 불안한 시절을 보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2003년 출범한 파주출판도시문화재단의 새 이사장으로 지난 2월 선출된 이후 6월에는 ‘세종아카데미21-100인 1천 강좌’를 비롯한 ‘일곱 가지 프로젝트’를 과감하게 제시하면서 빠른 행보를 보이고 있는 것도, 그 이면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책이 안 팔려서? 물론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게 그의 ‘불안의식’의 핵심은 아니다. 사회가 책을 안 읽는다. 이게 그의 불안이 스멀스멀 커져가는 이유다. 열린 도서관 프로젝트 ‘지혜의 숲’에 관해 들어보기 위해 여름 볕 같은 햇빛이 가득한 22일 파주출판도시 ‘지지향’으로 김언호 이사장을 찾아갔을 때, 그의 첫마디는 “스마트폰이 지혜를 죽이고 있다”였다. 아니 스마트폰이라니? 쉬 짐작은 된다. 그렇지만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면서 시간을 허비한다는 원론적인 지적이 아니었다. 생각하는 힘, 읽는 힘이야말로 정신을 강건하게 만드는 ‘근육’인데, 그런 독서 근육의 섬유질이 지금 심각하게 망실되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앞으로 20년 뒤가 걱정이다. 책을 읽지 않는다는 건 생각의 훈련, 지혜의 탐구에 브레이크가 걸렸다는 뜻이다. 한 사회의 정신문화의 진수는 책을 통해 심화는데, 책 읽지 않는 사회의 앞길은 훤한 게 아닌가.”

“앞으로 20년 뒤가 더 염려된다”
창밖을 통해 들어온 빛이 그의 얼굴 한 면을 밝게 물들였다. 그러나 다른 쪽은 어둡고 쓸쓸하게 비쳐졌다. 그는 읽히지 않고 버려지는 책에 대해서도 안타까워했다. “한 해 버려지는 책이 얼마나 되는지 아나? 팔리지 않는 재고도서들은 결국 無化된다. 불태우기도 하고, 물에 풀어버리기도 하고. 애써 만든 책들이 그렇게 終焉을 고하는 풍경은 가슴 아프다. 그렇지만 그것보다 지금 문제는 ‘책을 읽지 않는 풍토’가 굳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청소년 도서들, 학생들의 智力이 낮아지고 있어 고등학생용도 중학생 수준으로 만들고 있다. 대학 도서관들은 취업준비 교실이 된 지 오래다. 24시간 개방하는 도서관도 없고, 서점들은 말할 것도 없다. 사회 전체가 책읽기와 거리가 먼 사회로 가고 있다. 걱정이 안될 수 없다.”

그는 대만의 ‘성품서점’을 예로 들었다. “이 서점은 일종의 체인형 서점인데, 본점은 24시간 오픈한다. 언젠가 대만에 갔다가 여길 찾아갔는데, 정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밤늦은 시간에도 조용히 책을 골라 읽어보고, 필요한 책이면 사 가더라.” 디지털 바람은 오프라인 서점마저도 위협하고 있다. 김언호 이사장은 5천여 개에 이르던 한국의 소형 서점들이 지금은 1천500여 곳 정도 남아 있는 걸로 추산했다. 그가 출판도시문화재단이사장을 맡으면서 파주출판도시를 ‘문화도시’로 거듭나게 하기 위해 제안한 일곱 가지 프로젝트 구상 뒤에는 이런 문제의식이 깔려 있다.

김언호 이사장이 밝힌 7대 프로젝트의 주요 내용은 △세종아카데미21- 100인 1천 강좌 △열린 도서관 △책방거리 조성 및 콘텐츠 개발 △어린이책 잔치(봄) △영상과 빛의 국제예술제(여름) △파주 북소리·파주에디터스쿨&파주어워드(가을) △출판도시 책방거리의 국제인문학 축제(겨울) 등이다. 이 프로젝트들은 시너지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연결된 전략들이다. 특히 그가 가장 역점을 두고 있는 건 ‘열린 도서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를 두고 ‘파주출판도시의 24시간 열린도서관 프로젝트: 지혜의 숲’이라고 명명했다. 책을 지식의 축적도구로 보기보다 한 사회가 집적한 ‘지혜’의 통로로 이해한 발상이다. “일차적으로는 보관이 어려워 사라지거나 버려지는 지식인들의 소장도서를 한 데 모아 보존, 관리해 누구나 볼 수 있는 ‘열린 도서관’을 만들고 있다.” 그는 이것을 ‘종이책을 보존 보호하는 새로운 문화운동’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김 이사장은 출판 일을 시작한지 2년 뒤,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왜 사나? 어떻게 살아야 하나? 그래서 각계 인사들을 섭외해 ‘어떻게 살 것인가?’를 주제로 에세이집(1978)을 기획했다. 작고한 김수환 추기경 등 내로라하는 한국사회 명사들을 만났다. “왜 사는냐,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이 질문이 나의 출판인생의 핵심 질문이었는데, 다른 분들에게서 그 지혜를 빌리고 싶었던 것이다. 책을 만드는 이유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윤리와 가치의 정립에 있다. 그러니까 결국 책을 읽는다는 것 역시 ‘어떻게 살아야 하나’라는 질문을 풀어가는 과정인 셈이다. 그런데 책이 버려지고 사라지고 있다. 질문이 사라진다는 뜻 아닌가. 그렇다면 이렇게 사라지는 책을 한 자리에 모아 누구에게나 24시간 개방하는 도서관이 있다면, 그 사회는 좀 더 성찰적인 사회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열린 도서관은 파주출판도시의 아시아출판문화정보센터 및 게스트하우스 지지향을 거점으로 해서 6천 평 규모의 공간에 1백만 권의 책을 모으는 프로젝트다. 김 이사장은 출판사로 반품된 책, 지식인과 학자들, 특히 정년퇴임한 교수들이 소장한 귀중한 서적들로 ‘열린 도서관’을 꾸릴 계획이다. 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 박원호 고려대 명예교수 등 학계 원로학자들이 이미 뜻을 밝혔다. 안그라픽스의 안상수 씨도 디자인 관련 책 2천권을 기증하겠다고 동참했다. 교통부장관을 지냈던 이계익 씨는 독일, 러시아 원서를 기증하기로 했다. 중국, 일본에서도 기꺼이 참여하겠다고 의사를 밝혔다. ‘지혜의 숲’ 홍보가 이뤄지면서 학계를 비롯 곳곳에서 ‘소장 도서 기증’ 문의가 이어지고 있다.

파주북소리에서 ‘아시아 책 수도’ 가능성 발견

그렇지만 말이 쉽지, 1백만 권 열린 도서관은 넘어야 할 장벽이 많다. 그의 말대로 이번 프로젝트는 ‘위대한 유산의 리사이클링’과 연결된 작업이다. 김 이사장은 1백만 권의 장서를 기증자별, 주제별로 분류하고 이를 체계적으로 독자들과 만날 수 있게 하려면 우선 ‘기본적인’ 서가 작업이 마무리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 예산 규모를 20억 정도로 계산했고, 이를 문화체육관광부 쪽을 통해 국회에 제안했다. 하지만 ‘2억 정도’ 예산을 배정한다는 소문이 귀에 들려오고 있다. “2억요? 물론 큰돈이지만, 열린 도서관을 제대로 추진하기에는 정말 턱없는 예산이다. 창조경제를 부르짖지만, 창조라는 게 古典을 통한 지혜의 온축 없이는 불가능한 것 아닌가. 정부가 통 크게 책 읽는 문화를 복원하는 일, ‘문화 복지’에 깊은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

김 이사장은 ‘문화 복지’라는 표현을 썼다. 한창 논쟁이 됐던 ‘보편적 복지’도 중요하지만, 정신문화의 복지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의미다. “책과 도서관은 인류문화자산의 결정체다. 생각을 북돋고, 성찰을 이끌어내는 공간이다. 지금처럼 스마트폰에 묻혀 사회가 생각을 멈추고, 더 이상 성찰을 하지 못한다면, 10~20년 뒤 우리사회는 문화적 죽음을 맞게 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정신문화를 챙기는 문화복지를 생각해볼 수 있지 않겠나.” 아마도 그가 이런 대담한 발언을 할 수 있는 데는 2011년부터 진행했던 ‘파주북소리’의 자신감이 배경이 된 것 같다. 아시아 책의 수도를 표방한 파주출판도시의 ‘파주북소리’는 책으로 소통하고, 문화로 연대한다는 기치를 내걸고 진행돼 왔다. 여기서 그는 열린 도서관을 통해 지혜의 숲을 만드는 일이 더 이상 늦출 수 없는 지상과제라는 걸 깨달았다.

열린 도서관은 ‘책방거리 조성’과도 밀접하다. 전통적인 책방거리는 인사동, 청계천, 부산 보수동 등지에서 만날 수 있었는데 지금은 거의 사라지고 말았다. 그는 얼마 전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부산 보수동 헌책방 골목 우리글방에서 사진전을 했다. “개발만능주의가 전통적인 책방거리를 없애버렸다. 한 사회의 깊숙한 내면 얼굴이라 할 수 있는 책방거리가 살아나야 한다. 파주출판도시를 거점으로 책방거리를 100곳 정도 만들 계획이다.” 그렇게 되면 파주는 그야말로 아시아 책의 수도로 명실상부하게 재정립될 수 있다. 열린 도서관과 책방거리, 그리고 그곳을 가득 채운 다양한 프로그램들, 인문학강좌, 전시 등, 그야말로 동네가 시끌벅적해질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어릴 때 소나무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松籟] 소리 속에서 글 읽는 낭낭한 소리를 듣곤 했다. 이 나라 온 강산에서 글 읽는 소리가 들려오면 얼마나 기쁠까. 그게 출판인으로서 꿈꾸는 작은 소망이다.” 비록 그의 꿈에서 시작됐지만, 지혜의 숲 열린 도서관은 지식사회가 함께 호흡을 맞춰 꾸려나갈 만한 사업임에 틀림없다. 책과 독자가 만난다는 것은, 그 가운데 행복한 저자와 편집자의 共存이 전제돼 있기 때문이다. 그가 펼치는 새로운 지적 대안 운동인 지혜의 숲, 열린 도서관의 내일이 기대되는 이유다.

■ 파주출판도시 열린도서관에 관심 있는 분은 출판도시문화재단 기획홍보팀 031_955_0062, 이메일 bookcity@pajubookcity.org로 문의 바랍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