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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단 한 번도 세상을 피해서 물러나 있지 않았다”
“나는 단 한 번도 세상을 피해서 물러나 있지 않았다”
  • 김봉억 기자
  • 승인 2013.10.28 11: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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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 거장’ 김열규 교수 별세

고 김열규 서강대 명예교수
‘한국학의 거장’ 김열규 서강대 명예교수가 22일 오전 10시 지병인 혈액암으로 별세했다. 향년 81세.

김 교수는 한 달여 전 혈액암 진단을 받고 병원에서 함암치료를 받아 왔지만, 전날까지만 해도 낮에는 원고를 쓸 정도였는데, 이날 오전 갑자기 영만한 것으로 알려졌다.

1932년 경남 고성에서 태어난 고인은 서울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석사를 마쳤다. 국문학과 민속학을 공부하며 ‘한국학’으로 지평을 넓혔다. 고인은 25세에 대학 강단에 섰다. 1962년부터 1991년까지 서강대 교수로 재직했고, 인제대 교수와 계명대 한국학연구원 원장을 지냈다.

고인은 지난 2011년 2월, 우리신문에 쓴 칼럼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운 좋게도 겨우, 스무 다섯 살의 나이로 교수가 됐다. 그리고는 정년을 훌쩍 넘긴 73살로 전임에서 물러났다. 그건 자그마치 반세기에서, 단 한 해 모자라는 긴긴 세월이다. 지금도 강사로 출강하고 있는 걸치면, 대학 敎壇에는 60년을 더하게 선 셈이 된다. 돌이켜 보면 사뭇 강감하다.”

김 교수는 정년을 6년을 남긴 1991년에 미국의 자연주의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와 같은 삶을 살겠다며 고향으로 돌아갔다. 경남 고성군 하일면 송정리 자택에서 22년간 저술과 연구에 매진했다.

고향에서의 삶을 우리신문에 칼럼(2012년 3월)으로 전하기도 했다. “나는 한반도의 남쪽 끝, 바닷가 마을에 머물고 있는 지가 사뭇 오래고 또 오래다. 소위 정년을 여섯 해나 남긴 그 해에 서둘러 이사 와서는 기꺼이 둥지 틀고는 바지런히 살고 있다. 속된 생각으로는 그야말로 정년하고는 은퇴한 셈이다. 뒤로는 산들이 에워싸고 앞으로는 바다 내다보는 작은 마을이다 보니, 속된 생각으로는 문자 그대로 은퇴한 처지라고 할 것도 같다. 하지만 나는 단 한 번도 은퇴라는 문자 그대로, 세상 피해서 몸 숨기고는 물러 나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중략) 산책으로 싱그럽게 기가 살아나면, 읽기, 쓰기 어느 일에나 쏟아 붓는 열정이 무섭도록 달아오른다. 컴퓨터 자판기 두들기는 소리는 알레그로 콘 브리오가 된다. 이렇게 매일을 살기는 숨어서 물러서는 은퇴가 아니다. 절대로 아니다. 정년하기 전이 오히려 무되게 느껴지도록 지금 당장 나의 일상은 숨 가쁘고도 가파르다. 그것은 은퇴 아닌 전진이다. 매서운 돌격이다.”

고인은 고향에 머물며 해마다 한 권 이상의 책을 집필하고 강연 활동을 해 왔다. 그는 60년 연구인생 동안 한국인의 질박한 삶의 궤적을 조명했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와 『한국인의 자서전』을 통해 한국인의 죽음론과 인생론을 논했다.

올해 초에는 『이젠 없는 것들 1ㆍ2』를 낸데 이어 『읽기 쓰기 그리고 살기』, 『한국신화 그 매혹의 스토리텔링』, 6월에는『상징으로 말하는 한국인 한국문화』를 잇달아 펴내는 등 왕성한 집필 활동을 이어왔다. 고인은 평생 동안 70여권의 책을 썼다. 저서로 『한국민속과 문학 연구』『한국인 우리들은 누구인가』『한국신화와 무속연구』『한국문학 형태론』『한국인의 에로스』『한국인의 신화』『독서』『공부』『노년의 즐거움』등이 있다.

유족으로 부인 정상욱 여사(수필가)와 아들 진엽(서울대 미학과 교수)ㆍ진황(현대고 교사)씨, 딸 소영(한국종합예술학교 교수)씨가 있다. 지난 25일 서강대 성당에서 발인 미사를 가졌다.

김봉억 기자 bo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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