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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칼럼_ 세계를 공략한 ‘無의 아이러니’
원로칼럼_ 세계를 공략한 ‘無의 아이러니’
  • 김복영 서울예술대 석좌교수·예술학
  • 승인 2013.10.21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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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복영 서울예술대 석좌교수·예술학

지난 8월 초에는 봉준호 감독의 영화 「설국열차」가 개봉 7일 만에 관객 4백만 명을 동원했다 해 우리를 놀라게 한 적이 있다. 이는 글로벌시대를 맞아 예술과 문화가 과거의 순정 이미지를 떠나 21세기 재화가치 창출의 신종 수단이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근자에 들어 영화를 비롯해서 미술, 문학, 음악 같은 세칭 예술장르를 일컬어‘문화산업’의 품목으로 언급하는 예가 비일비재하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어서 예술과 문화를 순수한 ‘볼거리’, ‘읽을거리’, ‘들을거리’로서보다는 ‘재화가치’로 보는, 이른바 ‘부르디외’ 시각이 세를 얻고 있다.

이는 이것들을 관조의 대상으로서보다는, 이를테면 ‘기호를 소비하고자 하는 욕구’(보드리야르)의 대상으로 간주한다는 데 특징이 있다. 이러한 욕구는 고급예술보다는 대중예술, 그 가운데서도 엔터테인먼트일수록 증대된다. 지난해 가수 싸이가 세계무대에서 벌어들인 부는 천문학적인 것으로 발표됐다. ‘싸이 열풍’으로 상징되는 K-팝은 가히 감성산업이 富를 생산하는 주요 품목의 하나가 되고 있음을 입증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조건이 있다. 이를 롤런드 로버트슨은 ‘세계적으로 생각하고 자국적 가치에 따라 창작하라’고 충고한다. 요컨대 세계화 가치에다 자국문화 가치가 추가돼야 한다는 거다. 감성산업이 세계의 문화올림피아드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세계화 가치로 충분한 게 아니라 자국문화 가치가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말이다.

지난해의 일이지만, 소설가 신경숙이 『엄마를 부탁해(Look After Mom, Please!)』를 미국에서 출간해 삽시간에 5백만 부를 돌파해 미국 독서계를 놀라게 했다. 이 소설은 ‘엄마를 잃어버린 지 일주일째다’로 시작해서 ‘엄마를 잃어버린 지 9개월째다’로 끝나는, ‘잃어버림’을 주제로 우리 시대의 ‘상실’을 다뤘다. 서울역에서 실종된 엄마를 찾아 동분서주하는 가족들의 부산한 움직임을 플롯 없이 이야기의 파편들을 엮어놓은 탈모던 스타일의 작품이다. 전체가 탈맥락형인데다 화법의 1인칭 주어를 3인칭으로 전치시킨 것이 의외로 돋보인다.

엄마를 찾아 백방 뛰었지만 종국에는 실패한 주인공이 마지막으로 성 베드로성당 광장에서 사라진 엄마를 성모에게 의탁하고 기원하는 걸로 끝나는 이 소설이 서구 문학 전통에서 볼 때 反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서구인들의 관심을 붙잡은 건 무엇 때문일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건 모성의 지고함에도 불구하고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밀란 쿤데르)으로 전락한 모성을 우리 문화의 형질의 하나인 ‘부재의 아이러니’를 빌려 모성적 존재의 진리를 독자가 수락할 수 있는 지고의 수준에서 복원시켰다는 것이다.

봉준호의 「설국열차」가 많은 관객을 동원했던 것도 이 연장선상에서 이해된다. 이 영화가 프랑스 애니메이터 자크 로브의 작품을 상호텍스트로 글로벌 엑스트라를 동원해서 다루고자 한 건 소비자본주의가 만연하면서 물질사회의 부조리와 권력화가 극한에 이른 지구촌의 대척점에 단군신화를 각색한 미스터리의 설국을 허용함으로써 관객들의 원초적 상상계를 충족시키려는 데 있었다. 이 또한 ‘부재의 아이러니’를 빌려 관객에게 낯선 이상향을 투사하는 데 성공한 예가 된다.

중요한 건 예의 작품들이 세계화 가치를 창출하기 위해 우리의 자국문화 가치를 용인하는 태도와 방법이다. 앞서의 작품들이 대중의 소비충동을 야기하기 위해 세계인들이 상찬할 수 있는 고품격 못지않게 無盡과 無匱로 상징되는 우리 특유의 문화가치를 ‘무’의 아이러니로 변용해 적극 활용할 수 있었다는 건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김복영 서울예술대 석좌교수·예술학
숭실대에서 예술언어이론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시립대 환경조각과 교수(1988~1990)를 거쳐 1991년부터 2007년까지 홍익대 예술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서울올림픽세계현대미술제 운영위원(1988), 쌍파울로비엔날레 커미셔너(1994), 서울시 미술위원회 부위원장(1996-1997), 서울조각대전 심사위원장(1996) 등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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