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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공부의 무게 스며든 나의 애장 만년필 세 자루
삶과 공부의 무게 스며든 나의 애장 만년필 세 자루
  • 이종복 미국 리차드 스톡튼 컬리지·동양철학
  • 승인 2013.10.15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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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복 미국 리차드 스톡튼 컬리지·동양철학

몇 년간 수집을 하다 보니 여러 자루의 만년필이 있지만 그 중 아끼는 만년필은 세 자루다. 제일 아끼는 만년필은 몽블랑145다. 2000년 대학원 박사과정에 입학했을 때 지도교수이신 윤원철 선생님께서 능인선원의 지광스님을 소개시켜 주셨다. 그때 같이 갔던 선배와 똑같은 몽블랑 마크가 찍힌 상자를 선물로 받았다. 집에 가는 길에 박스를 열어 보니 그 선배의 상자에는 볼펜심이 없는 몽블랑 볼펜이, 내게는 만년필이 들어 있었다.

몇 년 뒤 나는 미국에 건너가서 티베트 불교를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버지니아주립대의 합격 통지서를 받아든 순간 엄청난 액수의 등록금 때문에 좌절하고 있었다. 그때 꾸준히 인사를 드리고 있던 지광스님께 도움을 청하자 스님께서는 당신의 쌈짓돈까지 털어 졸업할 때까지 10년 넘게 공부에 쉼이 없도록 도와주셨다. 지금까지도 스님과 연을 맺고 있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나는 그때 받은 몽블랑 만년필이 나와 스님을 맺어줬고, 지금까지도 연을 맺을 수 있도록 해 줬다고 믿고 싶다. 그래서 가장 아끼는 만년필이다.

두 번째로 아끼는 만년필은 펠리컨200 데몬스트레이터 빨간색이다. 스님께 받은 만년필이 아까워 모셔두고 있는 동안 막 쓸 요량으로 미국에 유학을 오자마자 샀다. 2002년 여름, 나는 티베트 집중학습 프로그램을 필두로 유학생활을 시작했다. 유학 생활의 시작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인사는 하고 지내도 친구가 생기지를 않았다. 해서 날씨 좋은 날 아침에는 버지니아주립대의 정원에 홀로 앉아 반투명한 만년필을 통해 빨갛게 종이에 비치는 햇살을 즐기곤 했다. 후에 한국인들에 대해 안 좋은 기억을 갖고 있던 두 학생이 나를 따돌려서 그랬다는 것을 그들이 내게 말하며 사과해서 알았고, 친구들도 사귈 수 있었다. 그 한 달 동안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곳에서 홀로 지내는 나를 외롭지 않게 해준 것은 빨간색 펠리컨200 데몬스트레이터였다.

2013년 봄에 박사학위를 마치며 리차드 스톡튼 컬리지 동양철학 분야 조교수로 발령을 받았다. 박사학위 지도교수님이신 제프리 홉킨스 선생님은 졸업하는 학생들에게 저녁을 사주며 파커45 볼펜을 선물로 주시는 것을 관례로 삼고 있었다. 선생님께서 조교수로 처음 발령 받았을 때 파커의 세일즈맨이 와서 볼펜을 20개 샀는데, 그때는 그 20개를 모두 소진할 줄 몰랐다고 하셨다. 홉킨스 선생님께서는 2004년에 일찍 은퇴를 하시고 그때부터 1년에 서너 권씩의 책을 내셨고, 나는 선생님의 저술을 도우며 (비공식) 학위 지도교수로 해서 2013년에 졸업을 했다. 선생님은 대만과 캐나다를 오가며 연구를 계속하셨고, 내가 졸업할 때는 마침 미국에 계시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선생님께 볼펜 받는 것을 체념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췌장암이 말기에 다다른 선생님의 제자분이 마지막 강연을 하게 됐다. 그래서 여섯 시간을 달려 그 분의 티베트 탱화에 대한 강의를 들으러 갔다. 그 자리에서 홉킨스 선생님이 나를 뒤로 부르더니 쉐퍼 만년필을 하나 주셨다. 전통적으로 볼펜을 주시던 분이 만년필을 주시다니, 의외였다. 내가 만년필을 좋아한다는 것을 아시고 준비하신 것 같았다. “이제 정말 졸업하는군요!”라고 선생님께 말씀드렸다. 졸업장을 받고, 버지니아주립대의 정원을 걸어 졸업을 해도 선생님께 만년필을 받으며 직접 졸업을 축하한다는 말을 듣는 그 순간만큼 졸업처럼 느껴지는 때가 없었다. 그때를 기억하게 해주는 쉐퍼 만년필도 내가 애지중지하는 만년필이다.

학력과 필체가 반비례하느냐는 놀림까지 받으면서도, 이 바쁜 현대사회를 살아가면서도 굳이 만년필을 손에 드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내 경우에는 손으로 쓰지 않으면 이해가 되지도 않고, 정리가 되지도 않는다. 브레인스토밍을 할 때에는 촉이 낭창낭창한 플래티넘 만년필을 휘갈기고, 정리를 할 때는 엄격한 몽블랑 만년필로 또박 또박 쓰고, 강렬한 인상을 남겨야 할 때는 녹색 또는 빨간색 잉크를 넣은 워터맨 까렌을 집어든다. 그래야지만 비로소 내가 무엇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지를 제대로 볼 수 있다. 이 원고를 청탁받았을 때에도 내가 가장 먼저 한 것은 연습장과 몽블랑 만년필이었다.

내게 만년필을 들고 글을 쓴다는 것은 현재의 내용을 기록하는 것만이 아니다. 수억 년의 나이를 먹은 지구 위에 살아 숨 쉬는 일개 생명체가 미미한 개인의 소사를 되새겨 현재로 풀어놓는 것이다. 그 미미한 나의 소사를 기억하게 해주는 만년필이 있어 공부하는 것이 더 즐겁다.

이종복 미국 리차드 스톡튼 컬리지·동양철학
서울대 종교학과에서 석사를, 미국 버지니아주립대 종교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올해부터 미국 뉴저지에 있는 리차드 스톡튼 컬리지(The Richard Stockton College) 철학과에서 조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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