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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필은 과학 … 중용과 과유불급의 지혜도 배워요”
“만년필은 과학 … 중용과 과유불급의 지혜도 배워요”
  • 권형진 기자
  • 승인 2013.10.15 17: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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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필의 매력에 빠진 사람_ 온라인 동호회 ‘펜후드’ 박종진 회장

 

다음의 온라인 동호회 ‘펜후드’ 회장인 박종진 씨는 서울 을지로에 개인 사무실인 만년필연구소를 열어 1년에 1천 자루 이상의 만년필을 공짜로 고쳐주고 있다. ⓒ권형진 기자

글을 ‘쓰’는 게 아니라 ‘치’는 시대가 된 지 오래다. 그런데도 만년필 인구는 늘고 있다고 한다. 국내 최대 포털 네이버의 만년필 동호회 ‘문방삼우’는 회원이 1만명을 넘는다. 그보다 역사가 오래 된 다음 카페 ‘펜후드(PENHOOD)’ 회원은 1만8천여명에 달한다.

펜후드 회장이자 만년필연구소장을 맡고 있는 박종진(43세, 회사원·사진) 씨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다소 엉뚱했다. “글씨를 몇 자 안 쓰기 때문에 만년필 인구가 는다”는 것. “사실 메모하는 데는 스마트폰이 더 편하다. 기왕 글씨를 쓰려면 몇 자 안 쓰더라도 폼 나게 만년필로 쓰겠다는 젊은 층이 늘었다.”

특히 20~30대 젊은 층에서 만년필에 대한 관심이 증가한 데에는 시계나 목걸이처럼 자신을 표현하는 ‘장신구’를 ‘마련’한다든 측면도 무시 못 한다는 게 박 씨의 생각이다. 어찌 보면 자연스런 현상이다.

“만년필은 처음부터 필기구이면서 장신구라는 다른 얼굴을 갖고 있었다. 머리에 쓰는 왕관과 똑같은 것이다. 왕관을 쓰는 순간 내가 왕이라고 얘기를 안 해도 왕인 것을 알 수 있는 것처럼 만년필이 그 역할을 한다. 만약 ‘몽블랑’을 쓴다고 하면 거기서 느끼는 이미지를 우리가 읽는 것이다.”

그렇다면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의 부활’이니 하는 이야기는 부풀려진 이야기란 말인가. 그렇지 않다. 박 씨가 보기에 아날로그는 ‘같은 물건이라도 사람에 따라 차이가 나는 물건이 되는 것’이다. 만년필이야말로 그런 의미에서 아날로그적이다. 흔히 자동차가 길이 난다, 카메라가 길이 난다고 하지만 만년필만큼 사람에 따라 길이 나는 게 확실히 다른 물건도 없다고 한다.

만년필은 잡는 방법이나 쓰는 각도, 누르는 힘에 따라 펜촉 닳는 게 달라진다. 사람의 지문에 비교할 수 있을 정도다. 심지어 다른 사람이 몇 글자 쓰고 나서 필기감이 달라졌다며 만년필연구소를 찾아와 고쳐달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똑같은 만년필도 그 사람에게 가면 달라진다. 특히 잡는 방식이 특이한 사람이 쓰던 만년필은 다른 사람이 못 쓴다. 그래서 우리끼리는 만년필은 마누라랑 똑같다고 한다. 절대 빌려주지 않는다. 그런 것이 만년필의 매력이다.” 그래서 박 씨가 주는 팁 하나. “만년필을 이미 쓰고 있는 사람에게는 좋은 종이나 그 사람이 쓰고 있는 잉크를 선물하는 게 더 낫다.”

나만의 개성을 표현하는 액세서리, 자신의 지위를 전달하는 장신구로서의 역할에 매료돼 만년필에 첫발을 디딘 사람도 결국에는 나에게 맞는 ‘궁극의 펜’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단계로 나아가게 된다. 비로소 필기구가 되는 것이다. “만년필이 아무리 많아도 한 번에 쓸 수 있는 펜은 하나밖에 없다. 값이 많이 나가든 적게 나가든 내 손에 맞는 만년필을 오래 썼을 때 가장 아름답다. 그것도 부모님께 물려받았다? 이건 정말 위대한 것이다. 그런 만년필을 가져오면 비용이 더 들어도 고쳐준다.”

ⓒ권형진 기자

박 씨는 국내에서 만년필에 관한 한 둘째가라면 서러운 전문가다. 서울 중구 을지로에 있는 만년필연구소를 찾았을 때에도 기자가 볼펜을 꺼내자 슥 한번 보더니 제조회사와 모델을 맞출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토요일마다 이곳에 나와 1년에 1천 자루 이상의 만년필을 ‘공짜’로 고쳐주고 있다. 지금까지 그의 손을 거쳐 새로 태어난 만년필이 1만 자루가 넘는다고 한다. 영어나 일본어로 된 책을 찾아 공부하는 것은 기본이고, 만년필에 관해 배울 수 있다면 미국이든 일본이든 마다않고 찾아다녔다.

그런 그가 도달한 결론은? “만년필은 단 하나도 과학적이지 않은 게 없다”는 것이다.

만년필의 가장 큰 장점은 ‘바로 쓸 수 있다’는 점이다. 볼펜을 생각해보면 안다. 볼펜은 사실 쓰기 전 워밍업이 필요하다. 모세관 현상을 이용해 즉시 쓸 수 있는 펜을 구현한 게 워터맨 이후 현대의 만년필이다. 펜촉의 간격이 너무 좁으면 글씨가 안 나오고, 너무 벌어져도 모세관 현상이 깨져 글씨를 쓸 수 없다.

잉크는 또 어떠한가. 잉크는 수성이다. 뚜껑(캡)이 덜 닫히면 물기가 점점 빠진다. 그러면 찐득거리다 고체가 된다. 뚜껑만 덜 닫혀도 글씨를 쓸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펜촉이 덜 꽂혀져 있거나 피드가 자기 위치가 아니어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클립만 떨어져도 밀폐의 정도가 떨어져 못 쓴다고 한다. 그만큼 공부할 게 많다는 점도 사람들이 만년필의 매력에 빠져드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만년필, 잉크, 종이. 이 세 가지 변수를 자유자재로 활용하려면 한 10년은 써봐야 한다.”

만년필을 수리하면서 그가 배운 것은 과학적 지식만이 아니다. 오히려 세상살이의 지혜를 배우는 게 더 크다. 바로 ‘중용’의 의미다. “공기가 덜 들어가면 잉크가 안 나오고, 많이 들어가면 샌다. 더 나가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은 상태, 즉 쓰기 직전까지 중용의 상태가 잡혀 있어야 바로 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또 “잉크가 물보다 부드럽기 때문에 너무 자주 세척하면 잉크를 넣을 때 고무패킹 역할을 하는 실이 닳아 오히려 빨리 훼손될 수 있다. 그게 다 과유불급”이라며 웃었다.

권형진 기자 jinny@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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