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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칼럼_ 퇴임 뒤 독일에서 첫 학기를 보내고
원로칼럼_ 퇴임 뒤 독일에서 첫 학기를 보내고
  • 전태국 강원대 명예교수·사회학
  • 승인 2013.10.15 12: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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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대 명예교수·사회학

올해 2월말에 정년을 맞으면서 대통령이 주는 무슨 생소한 이름의 ‘근정포장’을 받았지만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다. 훈장 하면 과거 일본의 한국 침탈에 부화뇌동한 자 혹은 정변을 일으켜 헌법을 유린한 자의 가슴에 매달린 장식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또 봉건적 공산독재를 유지하느라 안간힘을 다 쓰는 북한 사람들의 군복에 주렁주렁 매달린 기괴한 것들이 생각났다.

최근에는 권력이 5년마다 바뀜에 따라 권력자와 그 주변 하수인들이 권력의 자리에서 물러나기 전에 지네들끼리 훈장 나누는 잔치가 정기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어느 사회학자는 훈장을 과감히 배척한 일도 있다. 군사독재에 아부한 사람과 함께 훈장을 받는 것이 수치스러워서였다.

어느덧 우리 사회에서 훈장은 국민을 기만하고 온갖 비리와 부패를 저지른 ‘기생충’들에게 주어지는 일종의 ‘낙인’으로 기능 전환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찍이 생시몽이 말한 ‘전도된 사회’를 훈장은 웅변으로 말하고 있다. 무능한 자가 유능한 자를 지배하고, 가난한 자가 부유한 자에게 자선을 베풀어야 하고, 큰 도둑이 작은 범죄자의 범행을 재판하고, 도덕적으로 파렴치한 자가 국민을 교육시킨다고 우쭐대고 있기 때문이다.

연구와 교육에 몰두하며 나라의 발전에 튼튼한 초석을 놓고자 애쓴 교수들에게는 훈장이 아니라 기껏해야 포장이다. 그것도 오래 근무하면 더 높은 등급의 포장을 받지만, 해외에 유학하느라 오랜 시간을 보내고 귀국해 교수생활을 늦게 시작한 사람은 호봉에서 손해 보고 연금에서 손해 보고 급기야는 퇴임식에서도 소홀한 대접을 받는다. 그까짓 훈·포장이 무슨 대수냐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정의와 원칙을 바로 세우고자 하는 사회학자의 양심은 정년의 자리에서도 억누르기 어렵다.

정년을 맞아 밀린 연구에 더욱 전념해야겠다는 일념 외에는 아무런 생각도 없던 차에 프랑크푸르트대 사회과학대학 학장 네켈(Neckel) 교수의 강의 초청은 나에게 큰 자극이었다. ‘유교와 한국의 성공’이란 제목으로 개설한 나의 강의에 사회학, 정치학, 국제 갈등 연구의 석사과정 학생들이 20명 가까이 수강했는데, 이들의 열의와 관심은 나를 매일매일 강의 준비에 여념이 없게 했다.

그러나 독일 학생들에게 리포트 과제를 주면서 참고할 서적을 제대로 제시할 수 없었다. 한국사회를 사회학적으로 분석하고 진단한 영어나 독일어로 쓰인 저작물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사회학자로서 커다란 책임감과 자괴감을 느꼈다. 한국사회의 변화와 발전이 세계의 학생들과 학자들에게 연구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지만 이들의 관심과 욕구를 채워줄 자료들이 거의 전무하다는 것은 실로 한국 사회학자의 분발을 촉구하고 있다. 후배 교수들의 활약을 기대하는 것으로 물러설 수 없기에 이 과제의 최전선에 정년의 여유를 쏟고자 다짐해 본다.

독일에 있는 동안 나는 노령사회를 두 번 실감했다. 하나는 옛 은사의 등장이다. 미국을 비롯한 세계의 유명 교수들이 프랑크푸르트대를 찾아 특강하는 광경을 자주 볼 수 있었는데, 한 번은 집사람의 옛 은사가 은퇴한 지 오래지만 여전히 건강한 모습으로 한 미국 교수의 강연회를 활발하게 이끌고 있는 데서 신선한 감동을 받았다. 노익장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라 실감했다. 또 하나는 프랑크푸르트대와 프랑크푸르트시가 협력해 노인들을 위한 다양한 주제의 연속강연회를 매 학기 개최하고 있었다. 몇 번 참석해 봤는데, 그 큰 강당을 가득 채운 흰 머리는 난생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베스트엔드(Westend)의 새 캠퍼스로 옮긴 사회과학대학의 멋진 새 건물에서 강의하는 것은 실로 큰 기쁨이었다. 새 캠퍼스는 2차 대전 후 독일을 점령한 미군사령부 건물로, 단일 건물로는 세계 최대의 대리석 건물이라 말해진다. 원래는 2차 대전 이전에 유태인 박멸의 특수물질을 개발한 화학회사 ‘이게파르벤(I.G.Farben)’의 본사 건물이었는데, 미군 사령관 아이젠하워가 독일을 점령해 이 건물을 사령부로 사용했던 것이다. 이제 미군이 물러나고 독일 정부가 프랑크푸르트대에 넘긴 이 캠퍼스에는 새로 지은 멋진 건물들이 들어서고 있다. 그 중에서도 사회과학대학 도서관은 참으로 훌륭한 시설을 갖추고 있는데, 도서관의 모든 컴퓨터가 LG 제품인 것 또한 나의 자부심을 배가시켰다.

과거 유학시절, 동독 공산독재의 한 국경경비원까지도 당시 남한 군사독재의 유학생을 걱정해주는 것을 봤던 나로서는 세계에 부는 한류 열풍에서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의 달리진 위상과 한국 사회학자로서 책임감을 새삼 느끼게 한 독일체류였다.

전태국 강원대 명예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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