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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문학상의 계절
노벨문학상의 계절
  • 손종업 서평위원/선문대·국어국문학과
  • 승인 2013.10.15 11:07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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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노벨문학상의 계절이 돌아왔다. 언론을 통해 어떤 작가들이 유력하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이번에는 아시아 쪽 작가가 아니라 다른 지역의 작가가 선택될 거라는 이야기도 있다. 작년 수상자가 중국의 작가 모옌이었기 때문이란다. 마치 올림픽처럼 이런 현실적 조건들이 고려된다는 사실이 우습기도 하지만 또 생각해보면 그럴 수도 있는 일이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문학상이란 단지 작품에 대한 평가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객관적인 평가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노벨문학상은 인류가 해마다 꺼내보는 문학적 화두여야 하지 않을까. 수상작은 대중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며 수상자는 영예만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를 향해 발언할 신성한 의무도 지니게 된다.

몇 년쯤 우리도 삼수생쯤 되는 가난한 집 아이 같은 절박한 심정으로 보낸 적이 있기도 하다. 수상이 유력시되는 시인의 집주변에 기자들이 며칠째 운집해 스웨덴에서 날아올 소식을 기다리다가 씁쓸히 발길을 돌리곤 했던 것이다. 가히 문화적 자존심도 없는 낯 뜨거운 촌극이 아닐 수 없다. 가끔은 이웃나라와 스스로를 비교하면서 자괴감에 빠져들기도 하고 조급증에 빠져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집착에서 벗어나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모든 문학상은 비교적 좋은 문학작품 중에서 심사자의 주관과 의지, 심지어는 음모에 의해 만들어지는 우연 또는 행운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노벨문학상도 이런 문학상 중의 하나일 뿐이다. 그게 최고의 상인지도 의문의 여지가 있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들은 분명 훌륭한 작가들이지만 그것을 받지 못한 작가들이나 受賞 작가를 지니지 못한 나라의 문학이 변변치 못하다는 편견은 우스운 것이다. 일찍이 일본의 평론가 혼다 가츠이치는 오에 겐자부로의 노벨문학상 수상에 격렬히 반대하는 자리에서 생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지 않은 진짜들을 거명한 바 있다. “카프카, 제임스 조이스, 토마스 하디, 콘라드, 마르셀 푸르스트, 로렌스, 톨스토이, 졸라, 스트렌드베리, 오딘 등.” 노벨문학상은 이미 제국주의적 속성이라든가 상업성에 오염됐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운 게 아니다. 만약에 누군가가 내게 자신이 속한 나라가 저지르는 침략전쟁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긴 세월 동안 언어를 다듬고 미적인 것을 추구했으며 그 결과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가와바타 야스나리와 자신의 생명과 영혼을 바쳐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노래했으며 제국의 형무소에서 죽임을 당한 청년 시인 윤동주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추호의 주저도 없이 선택할 것이다. 스웨덴의 한림학사들이 읽어내기엔 너무 작은 그 별과 십자가를 말이다.

노벨문학상의 역사에서 가장 눈부신 존재는 역설적이게도 노벨상 수상을 결연히 거부했던 사르트르가 아니던가. 누군가는 이솝우화에 나오는 여우와 신포도 이야기를 들어 이러한 태도를 비판하려 할지도 모른다.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상실감을 비난으로 대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순 속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노벨문학상 수상 여부와 무관하게 우리의 문학이 충분히 가치를 지니는 길이다. 이 가치가 민족적인 것이냐 세계적인 것이냐는 오늘날 별다른 의미가 없는 물음이다.

다만 그것이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힘을 줄 수 있어야 할 뿐이다. 사실 노벨문학상 수상보다 아쉬운 것은 그 꽃을 피워내는 한 사회의 문화적 자산이라는 뿌리와 정신적 아우라다. 노벨문학상이 제국주의적이거나 상업적이라는 면에서 변덕스럽고 때론 사악하기조차 한 선택의 결과라면 그 밑바닥으로 흐르는 위대한 전통과 분위기야말로 우리가 진정으로 시샘하고 갈망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오로지 물질만능주의와 속도경쟁에 빠져 있으면서, 단 한 권의 책도 제대로 읽으려 하지 않고, 속물근성에 젖어버린 국민들과 ‘자본’의 노예들에게, 그들 중의 누군가에게 노벨문학상이 주어진다한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으랴. 단언컨대 문화적인 상황으로 볼 때 오늘날 우리나라의 작가는 노벨문학상을 탈 수 없다. 이 나라가 지극히 비문학적인 국가이기 때문이다. 조금 심하게 표현하자면 이 나라의 문학은 유원지에서 가끔씩 발견되는 레스토랑으로 쓰이는 폐선을 닮았다. 지금까지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노벨문학상이 아니라 이렇게 버려진 문학과 문화에 관한 것이었다. 여기까지 썼을 때 캐나다의 여성작가 앨리스 먼로(Alice Munro, 82)가 수상자로 결정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나는 고치지 않을 것이다. 누가 수상자인가는 이 글의 관심사가 아니니까.

손종업 서평위원/선문대·국어국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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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인희 2013-10-17 11:24:49
손교수님 정말 좋은 글, 구구절절 공감합니다. 문학계 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 과학계에서조차 노벨상에 대한 천박한 집착과 조급증을 보이는 모습에 씁쓸했었는데 교수님이 아주 잘 짚어주셨네요... 문화/문학은 서로 다른 것이지 서로 틀리는 게 아니고 그에 대한 시상은 어느 개인을 촛점으로 하는 그 나라 그 지역 문화/문학에 대한 조명이겠지요. "노벨문학상은 인류가 해마다 꺼내보는 문학적 화두"라는 교수님의 해석에 공감합니다... 손교수님과 같은 분을 동료로 두고 있음에 감사합니다 -- 조인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