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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얼굴을 가진 ‘사이의 땅’
다양한 얼굴을 가진 ‘사이의 땅’
  • 세바스티안 뮐러 부산외대 지중해지역원 HK교수
  • 승인 2013.10.08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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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이야기 2. 슬로베니아


▲ 아드리아해에 위치한 역사적인 도시 피란의 시내 전경  ⓒphotographer Guido Radig

철의 장막이 무너짐과 동시에 경계가 재편성되면서 몇몇 새로운 국가들이 지도 위에 등장하게 됐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슬로베니아이다. 슬로베니아의 역사학자 오토 루타르가 저술한 책의 제목 『The Land Between』은 이 작은 나라의 특징을 가장 잘 말해준다. 슬로베니아는 ‘사이의 땅’이다. 오스트리아, 헝가리, 크로아티아, 이탈리아 등 네 국가들 사이에 끼어있는 나라이면서 대략 43km의 아드리아 해안선을 지니고 있다. 북서쪽은 알프스 산맥이 둘러싸고, 북동부 지역은 파노니아 평야의 강과 하천에 닿아있다. 반면, 슬로베니아 남쪽은 아드리아해 북부의 지중해성 기후에 속하는 곳이다.

성모 승천의 순례지로 바뀐 지바 여신의 성역
1991년 6월 25일 유고슬라비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슬로베니아의 독립 전쟁은 불과 열흘 만에 종식됐다. 사실 그 후에 발생했던 끔찍한 유고슬라비아 전쟁으로부터도 슬로베니아는 별반 영향을 받지 않았다. 인접한 크로아티아가 전쟁의 완충지대 역할을 해주었기에 슬로베니아는 세계를 충격으로 몰아넣은 무자비한 전쟁으로부터 큰 타격을 입지 않을 수 있었다.


필자의 연구주제가 종종 현재 슬로베니아 국경으로 둘러싸인 지역의 선사시대 문화와 관련돼 있었기 때문에 슬로베니아로 여행을 갈 만한 이유들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2007년이 돼서야 비로소 슬로베니아를 방문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그 해 늦은 여름에 나와 동료들은 차를 타고 독일에서 알프스를 건너 여행을 갔다.


오스트리아의 남부 도시인 클라겐푸르트와 근접해 있는 국경을 넘어 슬로베니아의 수도인 류블랴나를 향하자, 뾰족하고 우뚝 솟은 알프스의 풍경이 점차적으로 여전히 장엄하기는 하나 부드러운 모습으로 바뀌었고 류블랴나 분지 쪽으로는 점점 더 평지가 넓어졌다

길을 따라 나있는 표지판에 언어가 바뀐 것을 제외하고는 국경선 사이에서 갑작스럽게 변화된 점은 없었고, 짙은 녹색의 숲은 농지 그리고 목초지와 번갈아가며 보였다. 슬로베니아 서북부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 중 하나는 자그마한 빙하호 마을인 블레드이다. 11세기에 세워진 요새중 제일 오래된 城인 블레드 성은 호수를 끼고 있는 수직 절벽위에 위치해 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가장 몰려들어 사진을 찍는 명소는 호수 한 가운데 있는 작은 블레드 섬이다.


한 때 슬라브인들이 지바 여신을 모셔둔 성역이었지만 슬라브족이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이곳은 성모승천의 순례 교회가 됐다. 눈 덮인 알프스를 배경으로 하는 장려하고 신비한 경치는 그림형제의 동화 속 무대 또는 낭만주의 화풍의 작품을 보는 듯하다.


여행경로 중 첫 번째로 만나게 되는 대도시인 크란은 대부분의 중동부 유럽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두 가지 얼굴을 지녔다. 우선 역사적으로 자연스레 발전해 온 도심이 있고, 한편으론 도시 풍경과 분위기에 전혀 어울리지 않게 이질적인 콘크리트 빌딩과 아파트 건물이 들어선 지역들이다. 이 건물들은 인간과 환경의 조화로운 관계보다는 경제 발전 위주의 정책을 더 중요히 여긴 과거의 정부주도 경제가 남긴 유물들이다.

▲ 기원전 6세기 슬로베니아 Vace의 청동 그릇에 사용된 문양. 첫째 줄은 기마병과 마차 운전병들의 행렬이다. 이들의 갑옷과 투구의 차이는 사회적 지위의 차이를 보여준다. 두 번째 줄은 당시 ‘심포지엄’이라 불렸던 술 마시는 의식과 역도 경기의 모습이다. 경기 참가자들은 값비싼 헬멧으로 된 트로피를 차지하고자 나체로 경기를 벌였다. 세 번째 줄은 영양을 보이는 동물들인데 맨 왼쪽에 그려진 사냥개가 잡아온 것으로 보인다.

슬로베니아 중심부에 위치한 류블랴나는 이 나라의 수도이다. 도시 중앙에 있는 언덕위에는 인상적인 성과 함께 류블랴니차 강이 류블랴나 도심부의 경관을 이룬다. 또한 중세이후 축적된 여러 시대의 건축양식이 혼재하는 것 역시 눈길을 끈다. 비엔나 분리파 양식의 집들과 바로크 풍과 베네치아 풍의 건물들이 도심 곳곳에 섞여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프레세렌 광장에 위치한 전형적인 바로크양식의 실내를 가지고 있는 프란체스코 수태고지교회, 류블랴나 대학의 본관건물, 류블랴나 성당을 포함해 이 건물들은 유럽의 어느 유명한 대도시들보다도 더욱 유럽의 역사를 잘 발현하고 있다.


이러한 유적들 외에도 길을 따라 나있는 나무들과 공원들과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경관들은 류블랴나의 극장이나 오페라공연장과 같은 문화시설들에 덧붙여 세련된 삶의 질을 제공한다. 햇살이 눈부신 여름날 혹은 해 질녘에 강가를 걷는 것은 이 도시의 오랜 역사와 활기찬 현대의 삶 모두를 느끼게 해준다. 류블랴나에는 슬로베니아의 정체성을 이루는 다양한 요소들이 공존한다. 그로 인해 알프스와 발칸반도, 그리고 지중해지역의 특징이 고루 섞여 있는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두 얼굴을 가진 도시, 크란
류블랴나를 지나 남쪽으로 가면 슬로베니아는 더욱 전형적인 지중해 풍경으로 변한다. 남부의 카르스트 지역은 동굴 지대로 유명하다. 그 중 슈코치안 동굴은 기념비적인 크기와 아름다움으로 인해 1986년에 유네스코의 세계 문화·자연유산으로 지정됐다. 선사시대와 역사시대의 자취는 예로부터 인간이 이 지역의 동굴들에 끊임없는 관심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동굴로 들어가는 거대한 입구들은 고딕 성당만큼이나 크다. 동굴 속의 점적석 기둥과 호수 그리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깊고 넓은 심연을 갖춘 이 동굴들은 시간이 정지한 듯한 느낌을 주는 웅장하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슬로베니아의 해안선은 비록 짧지만 아드리아해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지중해지역의 모든 특성을 보여준다. 가장 아름다운 장소는 의심할 여지없이 피란이다.


피란은 아드리아 해에 근접한 육지의 좁은 후미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다. 도시의 입지와 함께 바로크풍과 특색있는 베네치아풍의 건물들이 들어서 있는 역사적으로 발전된 도심은 피란을 지중해지역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장소로 만들고 있다.


피란의 중심지는 타르티니 광장은 피란 출신의 유명한 작곡가인 주세페 타르티니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도시를 둘러싼 인상적인 베네치아풍의 벽들은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에 피란이 부와 권력을 지닌 도시였음을 입증한다. 이러한 자연 환경과 역사적 도시들은 슬로베니아의 자연적 경계 내에서 이루어진 지중해와 지중해에 인접한 알프스 지역의 접합을 보여주고 있다. 역사적인 도시와 유적지들은 중부유럽의 풍부하고도 변화무쌍한 역사의 생생한 기록물들이다. 중부 유럽과 동부 유럽의 국가들을 연결하며 발전된 구조를 보여주는 지역과 장소들은 그리 많지 않다. 슬로베니아는 이러한 지역 중의 하나라는 점에서 분명히 한번쯤 가볼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다.

세바스티안 뮐러 부산외대 지중해지역원 HK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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