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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저주
지식의 저주
  • 이평재 소설가
  • 승인 2013.10.08 15: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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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릴레이 에세이

 
의자는 불편했고, 게다가 ‘지식’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끊임없이 이어갔다. “결혼의 인습적 성격은 귀족계급과 유산시민계급에서는 매우 노골적으로 드러났고, 이점에 대해서는 ‘가스통 모그라’가 대단히 정확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개뿔! 나는 ‘가스통 모그라’가 누구인지, 도대체 지식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후배 작가 ‘진’의 충고를 새겨 들었어야했다는 후회가 솟구쳤다. 일주일 전, 문학평론가인 지식으로부터 한 인터넷 매체의 작가조명 코너에 선정됐으니 인터뷰를 하자는 연락이 왔었다. 특별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어쨌든 그 사실을 전해들은 진은 간곡하게 말했다. 그 사람 아는 것도 많지만 너무 잘난 척을 해서 불편해요. 더욱이 선배 성격에는 오 분도 같이 앉아 있기 힘들 거예요. 만나지 마세요. 나는 진에게 대꾸했었다. 잘난 척을 하는 것이라기보다 설명을 잘 못하는 거겠지.

왜 우리도 학교 다닐 때 보면 분명히 실력은 있는데 전달을 못 하는 교수가 있었잖아. 그러나 진의 말이 옳았다. 나는 지식을 만나자마자 크게 당혹스러웠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의 대부분이 어려운 전문용어였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진의 말처럼 잘난 척을 하느라 어려운 말을 쓰는 것 같았다. 나는 대학 강의를 하는 그가, 아니 그의 학생들이 걱정스러웠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슬슬 짜증이 치밀었다. 그만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는 다시금 착각에 빠진 질문을 해댔다. “선생님은 최소한의 관념적 위장조차 노골적으로 일축 당했던 이런 풍속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해도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작품에서 이야기하고자한 것은 그런 내용이 아니었다. 소설이 고통과 환희로 인해 죽음에 이를 정도의 힘든 작업임을 섹스에 빗대어 이야기한 것이었다. 단지 주인공 여자의 결혼관을 조금 거론했을 뿐이었다.


나는 꺼져! 하고 외치고 싶은 걸 참으며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런데 왠지 그의 얼굴 근육이 딱딱하게 굳어가면서 작은 입자로 부서져 흩날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에게서 벗어나고 싶던 나는 그 느낌이 무척 반가웠다. 혼자 떠들든지 말든지, 하는 심정으로 잠시 엉뚱한 상상을 했다. 그의 얼굴이 부서져 날린다. 그의 몸뚱이도 비틀거리다가 부서져 날린다. 그의 두 다리도 미세하게 떨리다가 점차 세게 흔들리며 부서져 날린다. 이제 그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다. 양손으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 양손이 허공을 휘젓는다. 훅, 하고 바람이 분다. 바글바글 뭉쳐 있던 입자들이 풀썩거리며 바람을 타고 하늘로 날아오른다. 양손이 마구 휘날리는 입자를 향해 움직인다. 점점 빠르게 입자를 끌어 모은다. 그러나 어느 순간, 분주하게 움직이던 양손마저 부서져 날린다. 그가 완전히 사라진 자리에 굵은 글씨가 뜻풀이와 함께 나타난다. 그의 이름이다. 뜻풀이는 전혀 다르다. 어디에도 그는 없다.


지식: 배우거나 연구하여 알고 있는 내용.


나는 정말 눈앞에 지식이라는 글씨가 떠 있는 듯 했다. 글씨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피식 거렸다. 문학평론가 지식이 배우거나 연구하여 알고 있는 내용이라고? 나는 웃음을 참기 위해 눈을 깜박거렸다. 그리고 누군가의 의자 끄는 소리를 들으며 퍼뜩 그를 살폈다. 그는 여전히 뭔가를 떠들어대고 있었다. “선생님 작품의 노골성 뒤에도 공공연한 경제적 원인이 있다고 봅니다.” 경제적 원인은 또 무슨 소리인지, 나는 맥락 없이 펼쳐지는 그의 말에 어떤 대꾸도 하기 싫었다. 눈길을 피한 채 가끔씩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는 내가 입을 다물고 있자 초조해 했다. 점점 더 말을 많이 했다. “샤토루, 퐁파두르, 듀버리라는 이름이야말로 그 시대가 풍속사 연구가에게 제시한 메뉴였지요.” 얼씨구, 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잠깐만요, 하고 그의 말을 끊은 뒤 화장실로 달려갔다.


나는 화장실에서 헛구역질을 하며 생각했다. 이대로 돌아갈까? 그러나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화장실을 나서며 어깨를 으쓱 추켜올리고 마음을 다잡았다. 다시 자리에 앉으며 그에게 슬쩍 미소까지 지어 보였다. 그러자 그가 처음으로 무슨 뜻인지 알아듣게 말했다.


“원래 그렇게 말이 없으세요?”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아니요.”
그가 다시 물었다.
“그럼 뭡니까?”
그의 시비조의 말투에 어깃장 놓는 대답이 나갔다.
“뭐가요?”
“왜 아무 말도 안하느냐고요?”
나는 솔직하게 대답할 수 없었다. 제발 잘난 척 좀 하지 말라고 대놓고 말할 수는 없었다. 더욱 입을 앙다물어 버렸다.

그가 이마를 찌푸리며 또다시 물었다.
“제가 싫어서 그러는 거예요?”
난감했다. 그의 목소리는 점점 더 이성을 잃어가고 있었다. 내가 끝내 대답을 안 하자 씩씩거리며 크게 외쳤다. “그것도 아니면, 무식해서 말귀를 못 알아듣는 거예요?”


그 순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 소통은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그와 싸울 수도 없었다. 그를 버려둔 채 카페를 나갔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차분하게 가라앉은 마음으로 그에게 문자를 보냈다. 당신은 지식의 저주에 걸려 있습니다.

□ 다음호 추천 릴레이 에세이는 소설가 김종광 씨가 집필합니다.


이평재 소설가
필자는 1998년 <동서문학>으로 등단했다. 2013년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로 이상문학상 우수상을 받았다. 작품집으로 『어느 날, 크로마뇽인으로부터』, 장편으로 『눈물의 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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