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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가 있는 한 펜은 존재하리라
문자가 있는 한 펜은 존재하리라
  • 최재목 영남대ㆍ철학과
  • 승인 2013.10.07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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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_ 동서양의 문화에서 보는 ‘펜’의 의미와 상징

아날로그의 대명사이자 성공한 사람들의 품격을 상징하는 만년필. 만년필은 또한 학자들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학문 공동체가 서로의 학덕을 기리고 우정을 다지는 증표로 주고받았던 만년필은 천고마비의 계절인 가을에 되돌아보기 좋은 소재이자 문화다. 교수신문은 4회에 걸쳐 「아날로그의 깊은 매력, 만년필」 특집을 연재한다. 첫회 ‘역사 속의 만년필’에 이어 두 번째 ‘철학자가 본 동서양 펜의 의미와 상징’을 싣는다. ‘디자인으로 본 만년필의 미학’, ‘ 우리가 명품 브랜드다’ 순으로 특집을 이어간다.

에라스무스 초상. 에라스무스가 50세 되던 해(1517년)에 퀜틴 마시가 그렸다. 마르기는 했지만 책에 둘러싸여 글쓰기에 열중해 있다.
세계를 조국으로 생각하고 어디에도 종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삶을 살며, 펜으로 종교의 광기에 맞서 싸운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1466~1536)를 생각한다.

퀜틴 마시가 그린 그가 50세 되던 해(1517년)의 초상화, 그리고 1525년 병으로 앓은 이후의 그의 모습을 그린 알브레히트 뒤러의 판화작품(1526년)에는 마른 얼굴로 책에 둘러싸여 글쓰기에 열중이다. 홀바인이 그린 초상화에는 그가 확연히 늙어 있다. 눈을 약간 아래로 내리깐 채 책 위에 가벼이 손을 얹은, 짙은 색의 코트 높은 깃의 모피 옷 검은 베레모 차림. 모자 아래로 하얀 귀밑머리가 삐져나오고 뺨도 움푹 꺼졌다. 지그시 다문 입술 가로 번진, 병약함 그리고 뭔가를 조소하는 듯한 표정. ‘한 마리 개가 그림자를 보고 짖자, 백 마리 개가 그 소리에 따라 짖는’ 개처럼 살 것 같지 않은 독하고 매서운 눈매다.

사방의 적과 싸우는 ‘펜’

슈테판 츠바이크는 에라스무스 평전에서 이렇게 말한다. “화가들은 에라스무스의 초상화로 자신들의 후원자, 예술적·도덕적으로 존재를 새롭게 형성한 이 위대한 개척자를 찬미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이러한 정신적 힘의 모든 상징으로 그를 자신들의 화판에 표현했다. 투사가 자신의 무장도구인 투구와 칼로, 귀족이 가문의 紋章과 격언으로, 주교가 반지와 예복으로 표현되듯 그렇게 에라스무스는 모든 그림에 새로 발견된 무기를 지닌 사령관으로, 말하자면 책을 가진 사람으로 나타난다. 예외 없이 그들(=화가들)은 마치 한 무리의 군대에 둘러싸인 듯 책에 둘러싸여 글을 쓰거나 어떤 작업을 하고 있는 그를 그리고 있다. 뒤러의 그림을 보면 왼손에는 잉크통을, 오른손에는 펜을 들고 있다. 그의 옆에는 편지들이 놓여있고, 앞에는 대형서적이 쌓여있다.”(정민영 옮김,『에라스무스 평전』, 69쪽) 그가 든 펜촉은 창끝이나 칼날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볼펜에 밀려난 펜, 그러나 우리 언어 속에 살아 꿈틀대는

1963년부터 국내 생산이 시작된 볼펜은 미군이 남한에 주둔하면서 소개됐단다. 이후 저렴하고 간편한 볼펜은 모든 필기구의 왕좌를 차지하고 만다. 이렇게 볼펜이 보편화되고 컴퓨터가 상용화되면서 펜은 우리의 일상에서 거의 사라져버렸다. 덩달아 만년필도 일상생활에서 거의 밀려나버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지금 그 사람의 이름은 잊었지만/그의 눈동자 입술은/내 가슴에 있어/(중략)/사랑은 가고/과거는 남는 것’(박인환,「세월이 가면」)이란 시처럼, 펜은 사라졌으나 그 의미와 상징은 우리들 마음속에 여전히 살아 있다. 아니 우리 문화와 의식의 심층에 묻혀 있다가 ‘물=맥락’을 만나 호출당하면 언제든지 달려올 듯하다. ‘펜은 마음의 혀’· ‘펜은 칼보다 강하다’느니, ‘펜대를 꺾는다’·‘펜대를 눕히지 않고 꼿꼿이 세운다’느니 ‘펜대를 함부로 놀리지 말라’ 등등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맥락의 수많은 어법 속에서 살아있지 않은가.

무언가를 ‘쓴다’는 것…‘자유’를 향한 몸부림의 상징

한용운은 시「당신을 보았습니다」에서 이렇게 읊었다. ‘나는 집도 없고 다른 까닭을 겸하여 民籍이 없습니다./「민적 없는 者는 人權이 없다. 인권이 없는 너에게 무슨 정조냐」하고 凌辱하려는 將軍이 있었습니다./그를 抗拒한 뒤에 남에게 대한 激憤이 스스로의 슬픔으로 化하는 찰나에 당신을 보았습니다./아아, 온갖 윤리, 도덕, 법률은 칼과 황금을 제사지내는 煙氣인 줄을 알았습니다./영원의 사랑을 받을까 人間歷史의 첫 페이지에 잉크 칠을 할까 술을 마실까 망설일 때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온갖 윤리, 도덕, 법률이 결국 ‘칼’(=무력, 권력)과 ‘황금’(=돈, 재력)을 ‘제사지내는 煙氣’임을 직관하고, ①‘당신(=님)’의 ‘영원의 사랑 받기’라는 종교의 길, ②‘인간역사의 첫 페이지에 잉크칠 하기’라는 문학 혹은 학문의 길, ③‘술 마시기’=방황과 타락의 길을 두고 망설이다가 결국 ‘사랑하는 나의 님’(=여래)를 찾는 승려스님의 길을 걷게 됐음을 고백한다.

이 시에서 ‘잉크칠’은 ‘펜대를 놀리는’ 일이다. 잉크칠은 장군-칼-황금이 암시하는 이른바 ‘무력-권력-독재-억압-탄압’에 글로써 ‘격분-항거’하고 자유를 획득하려는 상징이기도 하다. 마치 김지하가「타는 목마름」에서 말한 말릴 수 없이 ‘쓰는’ 일이다. ‘신새벽 뒷골목에/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중략)/타는 가슴 속/목마름의 기억이/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민주주의여’처럼, 쓰는 것은 역사 속에서 단순한 작업이 아니었다. ‘푸르른 자유의 추억’을 더듬으며 ‘손 떨리는 가슴, 치 떨리는 노여움으로’ 쓴다는 것은 권력에 항거하는 것이었다. ‘사상과 언론의 자유’를 구가하기 위해서는 쓰지 말라할 때도 ‘몰래 몰래’ ‘치 떨리는 노여움으로/나무 판자에/백묵으로 서툰 솜씨로/쓴다’. 어디에서라도 써대는 펜은 막을 수 없는 인간의 본능이자 자유를 향한 타는 목마름이다.
 
생각하는 갈대 끝의 사색, 펜

펜이라는 필기구가 정착한 것은 기원전 2000년 경 이집트의 ‘갈대 펜’에서 시작한단다. 갈대+잉크+파피루스가 만나 현대의 ‘쓰는’ 필기구의 단순하고도 위대한 시스템이 정착해온 것이다. 물론 중세기를 묘사한 그림에서 보이는 깃털 펜도 있다. 갈대든 깃털이든 모두 ‘약한 것’, ‘부드러운 것’을 상징한다. ‘사나이 우는 마음을 그 누가 알랴.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의 순정’이란 유행가 가사에서도 잘 드러난다.

신경림은「갈대」라는 시에서 읊었다.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이처럼 인간은 갈대처럼 늘 흔들거리고 흐느끼면서 산다. 그러나 인간은 갈대처럼 흐느적거리지만 ‘생각하는’ 존재이다. 사유는 글을 통해 체계화해 가는 위대한 일을 해낸다. 선사들의 손에 휘둘리는 방망이처럼, 선비들의 손에 꽉 잡혀 움직이는 힘찬 붓처럼, 펜은 세상 위에 사상과 문화의 논두렁 밭두렁을 다듬고 일궈왔다.

이쯤에서 파스칼이『팡세』에서 말한 것을 상기해보자. ‘인간은 한 개의 갈대에 지나지 않는다. 자연 가운데서 가장 약한 자이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하는 갈대이다. 그를 짓눌러버리는 데는 전 우주가 무장할 필요가 없다. 한 줄기의 증기, 한 방울의 물도 그를 죽이는 데는 충분하다. 그러나 우주가 그를 짓눌러버릴지라도 인간은 그를 죽이는 자보다 더 한층 고귀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가 죽는 것과 우주가 자기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우주는 그것들을 하나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동양의 붓과 서양의 펜의 만남

서양의 펜 하면 동양은 붓이다. 둘은 서로 다른 계통을 갖지만 서양의 펜 문화는 근대 이후 일정 부분 동양의 붓 문화 속에 흡수돼 섞이게 된다. 예컨대 근대 이후 언론에서 말하는‘正論直筆’, ‘붓을 꺾다’, ‘붓을 굽히다’에서 말하는 ‘필’은 꼭 ‘붓’만이 아니라 ‘펜’의 의미-이미지로도 거의 동일하게 쓰이는 것이다. 적어도 ‘언론과 사상의 자유’라는 문맥 속에서 펜과 붓은 일치한다. 펜은 붓의 문화에 깊숙이 들어와 합체돼 ‘武-武人’에 대항하는 ‘文-文人’, ‘정치-권력’에 대항하는 ‘언론-언론인’, ‘종교나 비도덕적 억압적 사회’에 대항하는 ‘사상-사상가’의 이미지를 구축했다.

붓을 의미하는 한자 ‘筆’은 이제 펜을 상징하기도 하는데 ‘붓-펜’이란 말이 동-서양 필기문화의 동거 혹은 혼인을 의미한다. ‘붓-펜’은 文의 상징이다. ‘文-筆’이란 말이 이것을 웅변한다. ‘문-필’은 곧기도 하고(直筆) 굽기도 한다(曲筆). 강하기도 하고 약하기도(文弱) 하다. 글로써 항거하기도 하고 글로써 아부하기도 한다. 그래서 글 때문에 복 받기도 하고 화를 입기도(筆禍) 한다. 문필생활을 그만두는 것을 붓=펜을 ‘집어 던진다’(撲筆) ‘끊는다’(絶筆) 한다. 언론-철학이 권력에 빌붙어서 하수인노릇을 할 때 ‘시녀-창녀’라는 욕을 먹기도 한다.

그뿐인가. ‘펜대를 놀리는’ 사람이란 말은 관공서에 앉아 인정-사정-물정도 모르고 閒酬酌만 하는 경우, 또는 먹물 든, 잘난 체 하는 한가한, 콧대 높은 지식인들을 가리키기도 한다. 어느 시인이 콕 찍어 주었다. ‘너 낳고,/젖통이 고드랫돌처럼 굳어서 젖 한방울 안 나오는 거여./(중략)/어찌어찌 다시 젖이 돌아 그 상처투성이를 빨고 네가 이만큼 장성했다만, 그래서 네가 선생질에다가 글쟁이까지 하는가 싶다 분필이나 펜대 놀리는 거, 그게 다 남의 피고름 빠는 짓 아니것냐?/어디, 구멍 숭숭 뚫렸던 젖통 한 번 볼겨?’(이정록,「강」). 펜대 놀리는 것이 결국 약한 자들, 못 배운 자들 위에 군림하거나, 공부시키는 부모들의 피고름 빨아대는 짓이라는 지적이다.

인간의 혼을 만들고 죽이는 문자 그리고 펜

문자가 있는 한 펜은 존재하리라. 문제는 문자와 펜이 인간의 혼을 만들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는 점이다. 다음 두 이야기가 떠오른다. 먼저, ‘인간들이 하늘에 이르고자 탑(바벨탑)을 쌓기 시작하자 신은 그 과도한 야망을 우려해 인간들이 서로 소통하지 못하게 언어를 혼돈 시키고 사람들을 각처로 분산시켰다’는『구약성서』의 이야기다. 문자-펜을 분열시키면 인간의 단합을 막을 수 있다는 것.

다음으로, ‘고대 중국의 皇帝 적에 蒼頡이 글(書)을 만들자 하늘(天)은 백성들이 이런 지엽적인 일에 몰두해 농사를 소홀히 하여 굶어죽을까 걱정해 좁쌀(粟)을 비로 내려 보냈고, 귀신(鬼)은 문자로 인해 질책 받거나 인간들이 진실로부터 멀어져 말단의 허위에 골몰해 굶주릴까봐 밤새 슬피 울었다’는『회남자』의 이야기다. 즉 문자-펜은 세상을 건설하기도 하지만, 인간의 혼백을 빼앗고 결국 세상을 말장난의 아수라장=‘귀신이 곡할 지경’에 빠뜨리고 만다는 암시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모양을 보면 두 이야기 모두 실감하고도 남는다.

최재목 영남대ㆍ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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