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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뒤 한국인문학 토양 비옥해지려면 연구소 체질 개선 시급하다
10년 뒤 한국인문학 토양 비옥해지려면 연구소 체질 개선 시급하다
  • 윤상민 기자
  • 승인 2013.10.07 12: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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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한국 기획시리즈 3. 해외의 인문학 연구소에서 배운다

2006년 80여개 대학의 인문학 위기 선언에 대한 활로로 시작한 인문한국(HK)사업은 연간 약 432억원(2013년 9월 기준)이 집행되는 대규모 인문학 지원 프로그램이다. 10년 장기사업으로 총 소요예산은 4천억원이 넘는다. 하지만 사업시행 6년을 넘어서며 평가기준의 핵심인 ‘HK교수 채용률’로 인해 연구소 전임경쟁을 초래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국가가 주도하는 인문한국사업이 단순히 전임으로 가는 우회로 사업으로 전락할 경우, 인문학 위기 선언이 되풀이될 수도 있다. 교수신문은 현 인문한국사업의 문제점을 짚어보고 해외사례를 참고해 한국인문학의 나아갈 방향을 모색해보는 인문한국 기획시리즈를 준비했다. 세 번째 기획에서는 해외 인문학연구소의 사례를 통해 HK연구소의 나아갈 길을 모색해봤다.

한 중진 교수는 HK 연구소가 벤치마킹해야 할 모델로 프랑스의 국립과학연구센터(Centre national de la recherche scientifique, 이하 CNRS)를 추천했다. 1939년 개설돼 ‘경계를 넘어라’를 모토로 삼은 CNRS는 프랑스 뿐 아니라 유럽에서 가장 큰 기초과학연구소다. CNRS는 10개의 연구 분야(생물학, 화학, 생태와 환경, 인간과 사회, 공학과 시스템, 수학, 핵과 미립자, 물리학, 정보과학, 지질과 우주)에 따른 소연구소로 구성된다. 연구 분야별로 연구원, 공학자, 행정직원을 비롯한 2만6천 명의 정규인력과 이를 보조하는 6천 명의 비정규직원이 일하고 있으며 1천100여개에 이르는 연구팀이 활발한 국내 대학이나 외국의 연구자들과 함께 학제간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긴 호흡을 가진 각 기초학문분야의 연구는 CNRS를 통해 수백 개의 기업을 태동시킨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동방학의 CNRS·독일의 MGH 프로젝트

하지만 그는 CNRS가 동방학의 중심지라는 데 주목했다. 유럽에 있는 연구소가 시리아학, 인도학, 이란학으로 세계적인 권위를 인정받은 것이 CNRS가 가진 숨은 저력이라는 평가다. 그는“중국학, 동양학도 하버드 옌칭 연구소에서 공부한다. 돈황 연구의 권위를 가진 곳은 베를린 투르판연구소다. CNRS가 동방학의 중심지가 된 것은 일차 原典이 그 지역에 있다고 해도, 그것을 다루는 시선, 방법, 기술 자체가 정교했기 때문이다. 방법론에 있어서 CNRS는 엄밀한 문헌 고증과 비판을 했고 자료를 모았으며 믿을만한 정본 작업까지 마쳤다. 해석과 담론이 펼쳐질 수 있는 일차적 연구의 토양을 닦아 세계에 통하는 표준을 마련한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독일 역시 같은 노선을 걷고 있다. 1826년에 시작돼 1871년 국가가 지원하고 있는 MGH(Monumenta Germaniae Historica) 프로젝트를 살펴보면, 독일 역사를 공부하기 위해 로마 제국 말기부터 중세 16세기에 이르기까지의 원전 자료를 연대기별, 기록 보관소 별로 재편집해 출간하는 작업으로 디지털 D/B 작업도 병행되고 있다. 현재 간행된 자료는 200권 이상이며, 엄밀한 교정으로 신뢰도도 매우 높은 편이다. MGH 프로젝트의 특이한 점은 독일 역사뿐만 아니라 유럽 중세사와 관련된 모든 문헌을 집적하고 에디션하고 정본 작업, 주해 작업한다는 것이다. 이는 독일 역사를 더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독일사에 근거한 새로운 담론의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다.

일차 원본 자료의 장악이 중요하다는 점은 아시아의 연구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일본 교토대 인문과학연구소에서 1980년대에 실크로드 연구를 많이 했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일본이 제국주의로 팽창하던 시절 유라시아를 제패하려는 만주국의 꿈을 갖고 군사력을 키웠지만, 학술적으로도 만주와 돈황에 대한 자료를 확보해 연구를 많이 했다. 지금 교토대 인문과학연구소는 불교학, 티벳 관련 세계적인 담론의 발신지가 됐다. 원천자료의 확보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는 사례다. 지금은 동남아로 그 연구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학문의 특성이 귀납적인 데 있다는 것은 보편적인 사실이다. 이 점에서 볼 때, HK 연구소가 보다 더 체계화되고 심화된다는 것은 우리의 특수한 경험에서 보편적 가치를 이끌어내고 이를 세계적 무대로 발신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연구소의 체질마다 다르긴 하겠지만, 예컨대 정본 확정이 필요한 연구소는 원천 자료를 확보하고, 주해 작업을 거쳐 세계학계와 그 성과를 공유함으로써 담론을 더욱 활발하게 펼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 43개 HK 연구소의 연구 성과가 모두 몰가치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약속된 10년이란 시간이 지나면 어젠다에 급급한 논문을 생산했던 연구소와 기초역량을 닦음으로써 ‘post HK’를 착실히 준비한 연구소의 명암이 극명하게 갈릴 것이다. 공공재로서 유의미한 성과물을 생산해내고 연구취지에 맞는 업적을 내온 연구소의 지원은 계속돼야 하겠지만, 그렇지 못한 연구소에 대한 국고 지원은 응당 중지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분야가 10년 후 한국의 인문학 토양을 고르게 해 새로운 담론을 가능하게 할 연구인가. 국학에서 해답을 모색하는 목소리도 있다. 첨단을 요구하는 자연과학 분야와 달리 인문학은 시대가 지날수록 오히려 원전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라는 이유다. 한 교수는 “인문학은 글로벌 시대를 맞아 평준화됐다. 굳이 留學갈 필요가 없다. 그 나라에서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은 국학에서 그 해답이 찾을 수 있다.”

세계적 연구소의 해답은 ‘원천자료 확보’

그는 세계적 연구소를 위해 ‘국학’의 중요성을 강조하면 결국‘일차원전의 확보’가 필수라고 덧붙였다. “최근 프랑스의 권위있는 출판사 벨레뜨르에서 율곡의『擊蒙要訣』주해서가 나왔다. 이제부터 유럽 학자들은 이 책을 통해 우리 선조의 학문을 연구하게 됐다. 중국 인민대와 베이징대에서 박차를 가하고 있는 ‘유장’사업을 통해 다산을 비롯한 많은 학자들의 원전도 연구되고 있다. 더 늦기 전에 우리의 원전을 확보하면서 정리해야 한다. 수입 이론으로 동아시아학, 탈냉전시대에 대한 담론에 머물러서는 미래가 없다.” 그는 일차적 자료가 한글로 번역되면 留學에 들어가는 사회적 비용과 연구자 개개인의 시간적 허비면에서도 많은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기초 학문분야 연구소 강화와 더불어 연구소 운영에도 변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목소리도 있다. 한 교수는 “사실 연구사 전체에서 보면 현재 대학시스템으로는 담론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프랑스, 독일, 영국도 전문적인 연구소를 살렸다. 시장의 수요·공급 원칙으로 보지 말고 대학, 출판사가 할 수 없는 것을 국가에서 지원해 잡지도 만들고 세계와 그 성과를 공유할 수 있는 장기적 플랜이 필요하다”라고 거시적 안목을 요구했다.

HK 연구소의 미래를 해외 연구소 보다 오히려 우리 역사 속 ‘집현전’에서 찾아야 한다는 이색적인 주장도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세종대왕의 최대 치적으로 ‘한글’창제만을 기억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조선 500년의 찬란한 문화유산이 꽃피운 것은 바로 최신 문물을 우리의 말글로 소화시키려고 노력했던 ‘집현전’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외국인들이 한류에 열광하는 단계를 넘어서면, 왜 한국에서 이런 콘텐츠들이 나오는지 궁금해 한다. 그러면서 율곡을, 퇴계를 통해 한국인의 사상적 배경을 알고 싶어 하는데, 우리의 인문학 원전을 확보해 연구하는 일이야말로 국격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작업이다.”

오는 9일 한글 반포 567돌을 맞아 새로운 ‘세종대왕 500년 프로젝트’를 고민해봐야 한다는 그의 주장이 무겁게 들린다.


윤상민 기자 cinemonde@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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