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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랑천서 개구리 배 가르던 소년, 한국 기생충학의 60년 歷史를 쓰다
중랑천서 개구리 배 가르던 소년, 한국 기생충학의 60년 歷史를 쓰다
  • 윤상민 기자
  • 승인 2013.10.07 11: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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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학 리포트』펴낸 1호 기생충학자 임한종 고려대 명예교수

굿네이버스와 함께 한 봉사활동에서 임한종 교수가 현미경으로 주혈흡충의 충란 확인 검사를 하고 있다. (사진제공=한비미디어)
국내 1호 기생충박사 임한종 고려대 명예교수(83세·사진)는 정년 이후의 삶이 더 바빴다. 평생을 기생충학자로 살아 온 그는, 한때 ‘기생충 왕국’으로 불렸던 한국에서 기생충을 퇴치한 후, 라오스, 중국, 북한을 거쳐 아프리카 탄자니아까지 오가며 검은 절망의 대륙에 희망의 씨를 뿌려왔다.

그런 그가 지난 2010년 골반 골절로 걷기가 어려워지자, 그동안 심혈을 기울여 왔던 기생충사업을 접는 대신 새로운 작업을 시작했다. 그간 오로지‘기생충학’외길 인생을 걸어온 그의 인생역정을 논문이 아닌 대중이 읽을 수 있는 책으로 펴낸 것이다. 3년의 산고를 거쳐 출간된『기생충학 리포트, 중랑천에서 빅토리아 호 코메 섬까지』(한비미디어 刊)는 임 교수에게는 인생회고록이 됐고, 학계에는 60년 한국 기생충학의 변천사를 고스란히 담은 소중한 사료가 됐다.

그와 20년을 함께한 동료 문국진 고려대 명예교수(의대)는 최근 출간된 임 교수의 저서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그가 이번에 펴낸 저술에는 60여년 간에 걸쳐 기생충학을 연구하고, 그를 토대로 구충사업을 실천한 일들이 가감 없이 기술돼 있다. 그것은 개인의 업적이기도 하지만 우리나라 기생충학의 변천사라고도 할 수 있는데, 자신의 길 앞에 놓인 장애들을 극복해 가는 과정은 마치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한 흥미도 준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임 교수는 경기중학 5학년(현 고2) 시절 중랑천에서 잡은 개구리를 해부해 발견한 기생충 9종류로 1949년 제1회 전국과학전람회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이후 서울대 의대 기생충학교에 입학해 당시 학문의 황무지와 다름없었던 기생충학 연구를 시작했다. 1963년 기생충학 전공 국내 1호 박사가 됐고, 서울의대에서 10년을, 1972년 신설된 고려대 의대로 자리를 옮겨 기생충학교실과 열대풍토병연구소를 창설했다. 초대 주임교수 및 연구소장을 맡았던 그는 20년을 더 연구에 매진했다. 그가 배출한 박사만 70여 명, 쓴 논문도 300편이 넘는다. 정년퇴임한 지 15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해서 논문을 쓰고 있다.

1964년 한국기생충박멸협회(한국건강관리협회의 전신)의 창설멤버로 활약, 1971년 ‘가토법’전국적 실시, 기생충학 연구에 방사성동위원소 도입, 기생충 분류, 말레이사상충증 연구, 간흡충증 치료제 개발 등 그가 걸어온 길은 그대로 한국 기생충학의 역사가 됐다. 특히‘대변 봉투’를 통한 기생충 검사는 임 교수를 통해 한국에서 처음 대규모(전국 학생 800만 명)로 쓰였고, 이후 세계 기생충 대변검사의 표준이 됐다.

평생 기생충학 외길을 걸은 임 교수는 독실한 크리스천이다. 1964년 1월 강원용 목사와의 만남이 그의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자신의 의지와 능력으로 기생충학자가 됐다는 생각이 180도 전환된 것이다. 그는 돌이켜 보면 1942년에 부친의 고향인 함경북도로 돌아가지 않았던 일, 심일열 말라리아로 고생한 후 파스퇴르, 메치니코프 같은 과학자가 되기로 결심한 일, 의사였던 부친의 그의 진로 결정에 예상 밖의 지지를 해 줬던 일 등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그는 자신을 위한 ‘예비하심’을 느꼈다고 고백한다.

“가난한 나라에서 태어나 한평생 기생충을 없애고, 그 기술을 불모지의 다른 나라에 다시 전파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 지금까지 내 의지로 해왔다고 생각한 그 모든 일들이 나의 의지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됐다. 누군가 나의 계획에 앞서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예비해 주셨고, 어려운 고비마다 이끌어주고 지혜를 주셨다는 깨달음이 찾아왔다.”

나이 80줄에 맡겨진 마지막 소명이라고 생각하고 열과 성을 쏟았던 므완자에서 건축된 NTD Clinic을 볼 수 없고 헌신할 수 없다는 것이 아쉽다는 임 교수. 40년을 광야에서 떠돌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바라보기만 했던 모세의 심정이 이랬을까.

하지만 그는 걷지 못하게 된 것조차 은혜로 받아들였다. 이 책은 그 3년의 結實이다. 앞으로도 질병으로 신음하는 사람들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을 찾고 있다는 임 교수. 그는 오늘도 또 다른 소명을 기다린다.


윤상민 기자 cinemonde@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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