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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적 ‘특수성’ 조명 … 작가의 내적 ‘균열’ 설명은 미흡
동아시아적 ‘특수성’ 조명 … 작가의 내적 ‘균열’ 설명은 미흡
  • 교수신문
  • 승인 2013.09.30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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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말하다 _ 『월경의 아방가르드』 나미가타 츠요시 지음 | 최호영·나카지마 겐지 옮김 | 서울대출판문화원 | 367쪽 | 28,000원

 

1895년 4월 러시아는 삼국간섭을 주도해 일본이 청국에 요동반도를 반환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러시아는 그 대가로 청국과 밀약을 맺으면서 청국 동북지방을 가로지르는 철도의 부설권을 얻었다. ‘동청철도’의 건설기사들 60명이 하바롭스크에서 松花江을 소행해 후일 ‘하얼빈’이라 불리게 되는 한촌에 도착한 것은 1898년 6월의 일이다. 러시아는 청국과 ‘여순대련조차조약’도 체결해 요동반도 남단과 하얼빈을 잇는 ‘南滿洲支線’의 부설허가도 얻었다.

하얼빈은 러시아가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한 이후 본격적으로 계획·건설하게 된 첫 도시였다. 철도공사가 진척되면서 하얼빈 역시 근대적인 도시로 탈바꿈해 나갔다. 러시아가 당시 서구에서 유행했던 아르누보(art nouveau) 건축양식을 하얼빈의 중앙역, 철도관리국, 러시아영사관 등 주된 건물들에 적용한 것은 서양 근대 국가로서의 저력을 청국 영토 한가운데에서 ‘과시’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하얼빈은 ‘만주’라 불리는 중국 동북지방에서 처음으로 서양식 건축들이 ‘점’이 아닌 ‘면’으로 존재하는 도시가 됐다.

‘지정학적 전위’라는 개념
일본 규슈대학 대학원 비교사회문화연구원 교수로 있는 저자 나미가타 츠요시(波潟剛)가 쓴 이 책의 2부에서 저자가 다루는 ‘지정학적 전위’라는 개념은 프롤레타리아 문학·예술운동의 문맥에서 거론되는 ‘정치적 전위’와도 다르고, 혁신적인 예술운동을 지칭하는 ‘예술적 전위’와도 다르다. 저자는 1920년대 일본에서도 역시 ‘전위’ 개념을 둘러싼 두 경향이 대립하는 양상을 보였음을 서술한 뒤, 1930년을 계기로 그것이 다시 분화돼 갔음을 밝힌다. 애초에는 정치적 전위 측에서 예술적 전위 측을 차별적인 의미를 담아 불렀던 ‘아방가르드’라는 용어를 1930년대 후반에는 예술적 전위 측에서 적극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저자의 독자적인 시각이 돋보이는 것은 역시 지정학적 ‘전위’에 대한 서술 부분이다.


일본의 문인들 사이에서 만주가 지정학적 ‘전위’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만주사변(1931.9) 이후의 일이라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전위’에는 프랑스어인 ‘avantgarde’가 원래 갖고 있는 군대용어로서의 ‘군사적 거점’ 혹은 ‘일본 세력권의 최전선’과 같은 의미가 내포돼 있다. 1932년경에는 ‘만주의 最前衛’라든지 ‘남만주/여기에 우리 조국의 전위’와 같은 구절들이 만주를 다룬 기행문이나 소설에서 발견되기 시작한다. ‘전선’이 아니라 굳이 ‘전위’라고 쓴 데에 문제성이 있다. 군대에서 ‘전위’가 ‘본대’에 정보를 전달하듯이 문인과 독자, 만주와 일본은 각각 발신자와 수신자라는 역할을 부여받으면서 ‘전위’의 땅에서 혹은 ‘전위’의 땅을 무대로 ‘전위’의 작가가 쓴 글들은 ‘본대’인 일본의 국민· 대중들에게 전달되는 도식이 성립됐다.

 
지정학적 ‘전위’ 개념과 관련해 저자가 조명하는 세 명의 작가 중에 군지 지로우마사(群司次郞正, 1905~1973)는 하얼빈을 무대로 적지 않은 단편과 장편소설을 남긴 인물이다. 1930년 2월에 그가 발표한 장편소설 『미스 닛폰』은 이른바 ‘모던 걸’을 다룬 작품이며 “‘프롤레타리아 대중문학’의 전형으로 보아도 무방한” 것이었는데 이어서 발표한 두 작품과 함께 대중들의 큰 인기를 얻어서 단번에 유행작가가 됐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 작가들 중에는 이단’이라 할 수 있는 그는 1931년 6월부터 9월까지 만주의 하얼빈 일대로 소설의 취재 여행을 떠난다. 이때 하얼빈에서 만주사변 발발의 소식을 접했고 하얼빈을 ‘탈출’한 경험을 토대로 후일 『하얼빈 女(1932)』, 『발성만주(1933)』와 같은 소설집을 간행한다. 저자는 이들 작품을 분석하면서 “정치적 전위의 작가가 모던 도시의 이그조티시즘을 어떤 형태로 들여놓았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저자는 하얼빈을 무대로 군지 지로우마사가 쓴 작품에서, ‘야만스러운 중국의 전통’이 ‘서양의 근대적인 문명’으로 대치된다는 ‘정치적인 무의식’이 가시화되는 양상을 찾아낼 수 있다고 하면서 “식민지 정당화의 이야기를 반복하는 움직임이 일본 모더니즘 영역에서도 확산되고 있었다”라고 지적한다. 한편 그러한 시각만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복잡한 측면도 갖고 있다고 덧붙인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 문학자로서의 시선이다. 한일합방으로 인해 만주로 떠나야 했던 한국인들을 향한 동정과 연민의 시선을 텍스트 속에서 읽어낼 수 있으며, 작가가 계급적 의식을 드러낸 대목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상반되는 사조가 한 작가의 내면에 혼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양상을 “식민지 획득의 야망에 대한 저항의 계기를 만들”기 위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작가의 내면세계에서 ‘균열’이 생겨나 있는 이유에 대해서 저자는 끝내 명확한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당시 일본의 많은 프로문학자들이 구속되면서 옥중에서 ‘전향 선언’을 하고 나서야 비로소 석방됐음을 감안한다면 군지 지로우마사 역시 그러한 처지에서 피해가기 위한 ‘전략’이었던 가능성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프로문학자’로서의 긍지와 실천 사이에서 작가 내면에 갈등이 생기지 않았는지 여부에 대해 저자가 견해를 제시하지 않았다는 점은 아쉽다.

그리고 군지 지로우마사는 한국인에 대한 동정과 연민을 표명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얼빈이나 중국 동북지방에 원래 살았던 중국인에 대한 그것은 소설의 텍스트 어디에서도 찾아낼 수 없다. 도리어 그의 소설 속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중국인에 대한 불신과 멸시의 시선이다. 이런 사실을 고려한다면 ‘균열’의 정체가 “식민지 획득의 야망에 대한 저항의 계기를 만들”기 위한 것이라는 견해는 더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이그조티시즘’과 모더니즘
저자는 ‘지정학적 전위’와 관련해 세 명의 작가들을 모두 ‘이그조티시즘’의 미학과 정치학이라는 관점에서 분석하고 있다. 그러나 하얼빈이라는 도시와 ‘만주’라는 지방의 형성 과정과 복잡한 속성을 고려할 때 이들 작가의 작품을 이그조티시즘이라는 관점만으로 살펴보는 데는 어려움이 있어 보인다. 현재 저자는 한국· 중국· 일본을 모두 아우르면서 모더니즘에 관한 연구를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 이번 책에서 충분히 해결되지 못했던 과제들이 차후의 연구에서 더 자세히 분석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나카지마 겐지 서울대 박사과정·국문학
도쿄외국어대 한국어학과를 졸업한 뒤 서울대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있다. 논문으로는 「이인직의 문명의 이념과 신소설 혈의누」 등이 있으며, 임화의 일문 평론과 수필을 번역·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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