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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영원한 청년작가 최인호를 잃다
한국문학, 영원한 청년작가 최인호를 잃다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3.09.27 10: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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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최인호 타계

소설가 최인호(1945-2013).
“환자가 아니라 작가로 생을 마감하겠다.” 그는 임종 직전까지 펜을 잡고 있었다.

 25일 오후 7시 2분, 영원한 청년작가 최인호의 문학시계가 멈췄다. 침샘암으로 5년 투병 끝에 별세했다. 향년 68세. 1945년 10월 17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고교 2학년 재학생 신분으로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벽구멍으로」로 가작 입선해 세상을 놀라게 한 것이 1963년의 일이니, 그가 숨을 멈춘 올해는 등단 5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그는 그의 문학인생 원점으로 다시 돌아간 셈이다.

그가 작가로 이름을 내기 시작한 1963년에서부터 생을 마감하는 2013년까지 그를 따라다닌 것은 ‘본격문학과 대중문학의 기수’, 또는 ‘1970년대 청년문화의 중심에 선 작가’라는 수사였지만, 이것은 최인호 문학의 본령을 전혀 건드리지 못하는 呼名이었다고 할 수 있다. 최인호를 말할 때 많은 이들이 영화 「별들의 고향」(1974), 「깊고 푸른 밤」(1985) 등을 언급하면서 영화 이전의 원작 소설에 눈길을 돌리곤 했다. 특히 그를 두고 “현대사회에서 발생하는 병리적 강박과 타인과의 단절에 주목하면서 한국사회의 급격한 변동 과정을 문학작품으로 기록한 작가”라고 평단에서 평가하고 있지만, 이 역시 일면적일 수밖에 없다. 최인호와 그의 문학은 여기서 훨씬 더 나아가 있었기 때문이다.

최인호 문학이 환기하는 새로움은 무엇이었을까. 1960년대 등단한 일군의 작가들을 가리켜 4·19이후 한글세대의 문학적 감수성으로 무장한 이들이라고 흔히 호명한다.

김승옥(최인호의 생물학적 나이보다 세 살이 더 위다)의 유려한 문체는 그렇게 높게 평가됐지만, 최인호의 날카롭고 아름다운 문체는 여전히 과소 평가받고 있다. 한글세대의 문학적 감수성의 세례를 받은 후배 작가들이 “마치 구름 위를 걷는 듯한 기분이었다” 따위의 문장을 남발할 때, 최인호는 “도랑에서 가재를 잡기 위해 돌맹이를 뒤집는 듯한” 구체적이고 생생한 문체로 우리 곁에 서 있었다.

떠돌이 노동자의 파탄난 삶을 그려낸 황석영(최인호보다 두 살 위다)의 문학을 두고 사실주의가 도달한 높은 성과라고 평가했지만, 어두운 도시의 저녁거리를 우두커니 배회하는 도시인의 고독과 산업화의 그늘 속에서 좌절하고야 마는 청춘의 실존을 잡아낸 그의 문학은 ‘세련된 도시문학’ 정도의 평가에 그쳐야 했다.

최인호보다 세 살 아래인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은 작품이 도달한 수준 이상의 뭔가 심오한 것이 있는 것처럼 호명됐지만, 최인호의 「타인의 방」은 실존의 외로움, 소시민의 아픔 그 이상의 의미로는 읽혀지지 않았다.

최인호의 문학은 빠르게 회전하는 산업사회, 도시화, 그리고 이에 반비례한 존재의 왜소화를 그 특유의 짧고 간결하고 아름다운 문체 안에서 그 누구보다 적확하게 잡아낸 데 그 특징이 있다. 최인호를 다시 읽어야 한다면 바로 이것이 첫째 이유일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기 시대의 청년문화를 들이 마시고, 이를 다시 숨으로 뱉어냈다. 최인호와 최인호 문학을 다시 눈여겨봐야 한다면, 명동이나 광화문 어딘가를 청바지 차림으로 돌아다니던, 그 시절 어디서나 쉽게 눈에 띄던 청년들의 ‘젊은 의식’을 소설로 형상화하는 데 그만큼 공을 들인 작가가 없다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 영화 「바보들의 행진」(1975), 「병태와 영자」(1979), 「고래사냥」(1984) 등은 최인호가 각본을 쓴 작품들이다. 문자와 영상의 결합을 그만큼 두드러지게 병행한 작가들이 또 있을까. 두 살 위인 조세희가 난장이 연작을 통해 도시화의 궁핍한 실상과 부조리를 비판적으로 읽어냈다면, 최인호는 바로 그 도시의 한편에서 방황하는 청춘의 몸부림과 파편화되는 의식을 마치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관찰하고 기록했다. 이로써 1970~1980년대의 한국문학, 나아가 한국문화는 조금 더 유연하고 풍요로워졌다고 말해도 좋으리라.

1980년대 ‘작가 최인호’는 가톨릭에 귀의했다. 그리고 역사와 종교를 소재로 장편소설을 열어 나갔다. 그런 그를 두고 왜 그곳으로 갔냐고 힐난하는 것은 생산적이지 않다. 그는 다른 작가들이 가지 않은 곳을 갔고, 그리고 바로 그곳에서 징후를 읽고 이정표를 세웠다. 그가 공들인 작품 『유림』을 다양하게 읽어낸 깊은 평론이나 연구서가 거의 없는 것도 최인호의 이런 지적 순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탓이다. 역사와 종교의 만남, 또는 그 언저리에 터를 한 인간 생의 유한성은 어쩌면 상고머리 고등학생 시절 발표한 첫 작품 「벽구멍으로」나 이후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절의 장편 『구멍』과 같은 작품에서 내비쳤던 문제의식일 것이다. 그는 눈을 감았지만, 이번에도 어쩌면 저 하늘 어딘가의 ‘구멍’ 사이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을 지도 모른다. 여전히 펜을 쥔 채로.

생존 작가는 그의 ‘진행형’ 때문에 석·박사 논문 대상에 적합하지 않다는 게 학계의 일반적인 시각이다. 국회도서관 석·박사 학위목록을 뒤져보면, 최인호에 관한 연구는 지금까지 석사논문 19편, 박사논문 1편을 검색할 수 있다. 반면, 이문열의 경우 석사논문 19편, 박사논문 7편을 검색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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