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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 중첩된 욕망의 풍경 … 돌아갈 수 있는 ‘삼각지’는 어디에?
우리시대 중첩된 욕망의 풍경 … 돌아갈 수 있는 ‘삼각지’는 어디에?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3.09.10 18: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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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한국을 만든 40곳 29_ 용산

근현대 한국을 만든 40곳 목록
장충단공원, 명동·충무로 일대, 남산, 서울시의회 건물, 경복궁(광화문)일대, 덕수궁(정동), 서대문형무소, 탑골공원, 천도교 중앙대교당, 군산항, 부산근대역사관, 광주일고, 상하이 임시정부, 만주, 서울역, 경무대·청와대, 경교장(현 강북삼성병원), 이화장, 서울대(동숭동·관악), 부산 항구, 목포항, 소록도, 인천항, 제주도, 판문점·휴전선, 부산 국제시장, 거창, 지리산, 용산, 매향리(경기도), 여의도광장(공원), 마산(현 창원) 바다, 4·19국립묘지·기념관, 명동성당, 광주 금남로·전남도청, 울산 공단, 포항제철, 경부고속도로, 청계천·평화시장, 구로공단

▲ 새롭게 단장한 용산역사 쪽에서 서쪽 방향에는 휑한 빈터가 놓여 있다. 그 너머로 서울의 빌딩숲 도심이 멀리 시선에 들어온다. 용산은 이렇게 실체가 희미한 그림자 같은 장소다. 그러나 파보면, 거기엔 아픈 시간들이 중첩돼 쏟아져나온다.

기념탑 아래 무수히 많은 희생자들의 이름이 새겨져있다고 노래한 이는 브레히트였다. 근현대 한국을 만든 40곳의 하나로 선정된 ‘용산’도 역시 그렇다.

기념탑 아래 무수히 많은 희생자들의 이름이 새겨져있다고 노래한 이는 브레히트였다. 근현대 한국을 만든 40곳의 하나로 선정된 ‘용산’도 역시 그렇다.

미군기지가 있던 곳에는 공원과 함께 국립중앙박물관이 들어섰고, 가까운 곳에는 전쟁기념관이 위치해 있다. 배호의 절창 「돌아가는 삼각지」의 삼각지는 사라지고 없다. 그곳을 중심으로 마천루처럼 우뚝 솟은 최신식 아파트들만이 즐비하다. 퀴퀴하고 음습한 냄새가 나던 용산역은 휘황찬란한 백화점과 동거하면서 새단장을 했다.

1. 용산은 어디에?
용산은 한자어로 龍山이라고 쓴다. 그렇다면 이 산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전통 고지도나 區誌 등을 참조하면 답을 얻을 수 있다. 용산은 지금의 중국-마포구-용산구의 경계에 있는 만리재(보통 만리동 고개)에서 효창공원-용마루 고개-새창 고개-용산 성당-용산 청암동으로 이어지는 긴 산줄기를 말한다. 『용산구지』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이다.

실제 용산은 외국 군대가 주둔했던 ‘용산기지’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울의 도심 재개발 과정에서 아파트, 공원, 도로 등이 새로 놓이고 닦이면서 지워져버린 것이다. 고지도 「경조오부도」(1856)를 보면, 목멱산에서 이어져 내려오는 산줄기를 확인할 수 있는데, ‘둔지산’이 그것이다. 지금 이 ‘용산기지’가 한창 거대 공원으로 탈바꿈하려는 중이다. 용산 미군기지 반환으로 2016년께 73만평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공간의 공원을 수도 서울은 갖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회복한 공원에 전통시대의 ‘용산’은 어떤 모습으로 그려질 것인가.

2. 사라진 집창촌
용산하면 또 하나 어두운 그림자가 있다. 집창촌이다. 60년 넘게 용산역 앞에 자리를 지켜오다 2011년 모두 철거됐다. 이곳은 한때 100여 개의 성매매업소가 성업 중이었다. 재개발 방침에 따라 하나둘 문을 닫기 시작하다가 2011년 9월 8일 마지막 남은 업소가 폐업하면서 그 흔적을 감췄다. 지금 그 자리에는 개발 틈새를 비집고 들어온 포장마차들이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다.

이들은 ‘한시적으로’ 포장마차를 운영하고 있다. 부근에서 포장마차로 생계를 유지하던 사람들이 재개발 추진에 걸림돌이 되자 절충안으로 나온 게 바로 시한부 ‘포차촌’이었던 것. 무허가 포장마차지만 법대로 원칙을 앞세워 이들을 내몬다면 ‘2009년 용산참사’와 같은 대형 사고가 터질 수 있어, 이를 우려한 재개발조합측이 업주들에게 2014년까지 시한부 영업을 약속 받고 공간을 제공했다. 2009년 용산참사의 트라우마가 남긴 공생의 지혜라고 할 수 있을까.

3. 그리고 용산참사의 기억
시인 이시영은 지난 해 열두번째 시집 『경찰은 그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창비 刊)를 발표했다. 등단한지 40여년이 넘는 시인은 직설적이다. 이를 아무 수식도 필요치 않은 리얼리즘의 맨 얼굴이라고 불러도 좋으리라. 세상이 정면으로 응시하길 피하던 2009년 신년새벽의 그 처절한 ‘용산 참사’를 시인은 그대로 마주본다.

“이날의 투입작전은 경찰 한 명을 포함, 여섯 구의 숯처럼 까맣게 탄 시신을 망루 안에 남긴 채 끝났으나 애초에 경찰은 철거민을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며 철거민 또한 그들은 전혀 자신의 경찰로 여기지 않았다.”(「경찰은 그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에서) 날것 그대로, 바짝 마른 시의 정신처럼 그의 시어는 옷을 걸치지 않고 있다. 이 날 것 그대로의 시적 서술에서 파르스름한 그 비극의 순간을 기억하기란 어렵지 않다. 이것은 어쩌면, 참사와 비극을 그대로 정신의 내상으로 가져가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 구용산과 신용산 (출처: 경조오부도, 1856년). 시대의 변화는 이렇게 용산을 달리 구획한다.
4. 길은 어디로
“삼각지 로타리에 궂은비는 오는데/잃어버린 그 사랑을 아쉬워하며/비에 젖어 한숨짓는 외로운 사나이가/서글피 찾아왔다 울고 가는 삼각지/ ……” 스물아홉 나이에 신장병으로 삶을 접은 대중가수 배호의 「돌아가는 삼각지」는 한때 국민가요였다. 이 노래의 핵심은 ‘돌아가는’이라는 수식어다. 사랑을 잃은 그는 옛사랑의 흔적을 찾아왔지만, 도리 없이 서글피 울고 갈 수밖에 없다. 그는 그냥 돌아간다. 이제 다시한번 사랑을 잃어버리면, 아예 찾아갈 곳도 없다.

그 ‘삼각지’는 좌우 곳곳에 들어선 최첨단 아파트 숲 사이 어디쯤에 옛 자취만 남긴 채 사라졌다. 삼각지 가까운 곳에 한 시절 세태를 풍자하던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바로 그곳이 있었다. 100년이란 긴 세월, 한 세기를 외국의 군대가 주둔하면서 가져온 낯선 문명의 옷들은 사라진 옛 삼각지 근처와 녹사평, 이태원 쪽에 아직 그대로 남아 우리 몸에 그대로 붙어 있다.

그것들은 그것대로 한 시대의 얼룩이 될 테지만, ‘서글피 찾아왔다 울고 가는’ 그래서 무력하게 ‘돌아가는’ 그런 정신의 內波가 문제다. 모든 역사의 사건들은 더 깊은 응시를 요청한다. 현상만이 아니라, 원인과 과정, 결과 모두에 주목해달라는 요청. 요절한 배호는 그곳에서 돌아섰지만, 지금 이곳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돌아설 곳이 이제 없다. 근현대 한국을 만든 역사적 장소로서의 용산을 기억해야 하는 이들에게는, 그저 서글피 찾아갔다 도리 없이 돌아가는 ‘그곳’이 더이상 아니다. 어떤 기억을 가져갈 것인가의 문제는 새로운 길을 찾는 질문이다.

글·사진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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