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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이것만은 버리고 갑시다 ⑨ 권위적인 행정구조
대학, 이것만은 버리고 갑시다 ⑨ 권위적인 행정구조
  • 박나영 기자
  • 승인 2002.09.1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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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9-19 14:56:52
어느 교수는 도서관에 책 한권을 신청하려고 해도 몇 달씩 걸리는 탓에 이제는 아예 책 신청을 포기하고 산다고 하고, 또 다른 교수는 3백여만원을 들여 외부업체에서 2개월간 용역을 썼지만, 정작 학교에서 용역비를 지급한 것은 용역이 끝난 후 약 1주일이나 경과한 후였다고 한다. 과연 대학의 행정 구조는 연구와 수업이 아닌 무엇에 초점을 두고 돌아가고 있는 것인가.

대학에서 가장 찾기 쉬운 건물이 본관이다. 대부분의 경우 대학의 최고 중심부에 가장 위풍당당하게 자리잡은 건물이기 때문이다. 인식상으로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건물을 가장 중요한 곳에 위치시킨다는 건축원리로 미루어볼 때, 이는 현재 대학 내에서 행정본부가 차지하는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대학의 행정은 교육과 연구를 뒷받침하는 데 주력해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ㅂ대 심 아무개 교수의 경우 합동수업을 통해 인권교육, 성교육 등을 병행하고 싶지만, 새로운 학제를 개설하는 행정절차가 복잡하고 까다로운 탓에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ㅇ대 이 아무개 교수 또한 실무에 있는 전문가들을 초청해 학생들에게 생생한 현장의 목소리를 들려주고 싶긴 하지만, 예산도 확보돼 있지 않고, 그렇다고 자비를 들일 수도 없어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처럼 학사행정이 대학의 수요자인 교수와 학생의 요구에 발맞추지 못하는 것은 ‘편한 업무’만을 원하는 행정담당자들의 자세 탓도 있다. ‘새로운 요구에 부응한다’는 것은 이것저것 복잡한 절차를 처리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만큼, 행정담당자들이 현재에 안주하기를 원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하기도 하다.
현행 대학행정조직이 지나치게 관료주의적이라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ㄱ대학의 염 아무개 교수는 “연구비를 산정하는 경우에도 눈에 보이는 인건비, 기자재비 등을 제시하지 않으면 돈을 지급하지 않기 때문에 문과계열의 교수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연구비를 신청조차 할 수 없는 입장”이라고 호소한다. 국립연구소의 경우 연구자들에게 연구비를 먼저 지급한 후 정부에서 돈을 받아 해결하는 데 비해, 대학은 일단 외부에서 돈이 들어와야 연구비를 지급하게 돼 있어 상당 비용을 우선 자비로 충당해야 하는 것도 교수들을 난감하게 한다.
국민대 김병준 교수(행정학)는 이런 현행 행정조직의 구조적인 문제가 “대학행정에 미치는 소비자의 통제력은 약한 데 비해 교육부나 재단의 통제력은 월등히 강하다”는 점에서 비롯됐다고 보고 있다. 교육부의 규제사항을 지키지 않으면 감사에 걸리고, 인사권과 재무권을 틀어쥔 법인의 지시에 따르지 않으면 불이익을 받게 되는 상황이 보직교수나 행정직원들로 하여금 수업과 연구보다는 이들로부터의 지시사항에 초점을 맞추도록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ㄷ여대의 경우 이사장이 학기별 개설교과목, 교원연구비 등 일체의 행정업무에 대해 사전지침, 사전결재, 사후보고 등을 통해 일일이 지시·감독한 사실이 교육부 감사에 의해 드러나기도 했다.
이런 절차의 복잡함과 행정구조의 경직성에 위기의식을 느껴 외부에서 경영진단을 받는 등 조직을 쇄신하려는 움직임을 보인 대학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성균관대의 경우 삼성에서 인수하는 과정에서 대대적인 경영진단을 받은 바 있으며, 한양대 역시 94년에는 삼성에서, 2001년에는 삼일회계법인에서 경영진단을 받았다. 이들 대학들이 경영진단 후 가장 크게 변화된 사항으로 꼽는 것은 ‘팀제’를 도입했다는 것인데, 일각에서는 기업식 체제인 팀제가 대학에서도 실질적인 효용성을 낳을 수 있을지 여부가 아직 검증되지 않은 상태에서 행정조직의 개편을 팀제도입에만 의존하는 것은 무리라는 지적도 일고 있다. 황청일 청주대 교수(행정학)는 “대학이 경영논리에만 치우쳐 기업의 체제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 우려했다.
2002년 한국평가학회의 조사 결과 학생들의 만족도가 가장 높다(73%)고 나타난 숙명여대의 경우, 행정혁신을 통해 모든 구조가 ‘고객’인 학생과 교수 위주로 바뀌었으며, 역시 만족도가 높다(53%)고 나타난 중앙대 역시 대학의 담장을 허무는 등 대학의 문턱을 낮추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숙명여대의 한 직원이 “과거에는 편하게 일하려고만 했지만, 행정구조가 쇄신되면서 교수, 학생, 직원이 서로 ‘섬기는’ 문화가 형성됐다”고 얘기한 것에서 보듯, 이제 대학들이 진정으로 자신을 ‘끌어올릴’ 수 있는 저력은 어디서 나오는지에 대해 곱씹어볼 때가 아닐까. 박나영 기자 imnaria@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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