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표는 그저 역사를 기록하는 단순한 보조수단이 아니라 세계관과 지식, 창의성과 기술이 축적된 하나의 독자적인 분야다. 저자는 ‘시간 지도’에 맞춰 연표의 역사를 추적했다. 역사상 발생한 사건을 연대순으로 배열하여 적은 표’를 가리켜 흔히 ‘연표(연대표, chronology)’라고 명명한다. 역사, 사건, 시간의 지평이 겹쳐져 있는데다, ‘표’라는 형식미까지 가미돼 있음을 눈치 챌 수 있다. 역사책들이 이 연표를 거의 필수적으로 갖추고 있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어지럽게 나열된 사건과 사람을 행과 열, 선과 그림을 이용해 깔끔하게 정리해 기나긴 역사의 시간을 한 눈에 잡아준다는 데 매력이 있어서다. 그렇다면 이런 연표는 어떻게 탄생하고 변화해왔을까. 미국 오리건대 부교수인 대니얼 로젠버그와 프린스턴대 교수인 앤서니 그래프턴이 함께 쓴 『시간 지도의 탄생』(김형규 옮김, 현실문화연구, 360쪽, 44,000원)이 적절한 답을 던져준다. 아예 ‘고대에서 현대까지 연표의 진화와 역사’라는 부제를 달고 호기심을 부채질한다.
저자들은 고대에서 현대까지 연표가 누구에 의해, 언제, 어떻게, 어떤 역사관과 세계관, 상상력에 기초해 변해왔는지를 분석했다. 이들은 역사를 시각적으로 표상한 ‘시간 지도’에 초점을 맞춰 연표의 역사를 완성한다. 저자들은 무엇보다 선적인 시간의 흐름 즉 ‘타임라인’에 주목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타임라인이 우리 정신구조의 익숙한 일부가 돼버려, 그것이 어느 무렵 고안된 산물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렸다는 것이다. 두 역사학자는 바로 이 점을 환기하면서 이 흥미로운 책을 열어 나간다. “타임라인에 대한 역사적이고 이론적인 이해에 틈새가 존재하는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우리가 학문으로서의 연표 연구에 상대적으로 낮은 지위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타임라인’을 환기한 이들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언제나 연표를 활용하며, 연표가 없다면 어떠한 연구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연표는 그저 복잡한 역사 서술과 개념들을 단순화한 것으로 여겨질 뿐이다.” 연표를 그저 역사를 기록하는 단순한 보조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세계관과 지식, 창의성과 기술이 축적된 하나의 독자적인 분야로 여겨, 그 형식과 역사를 본격적으로 연구해 ‘처음으로’ 정리한 책이 바로 이 책이다. 그렇다면 과거에는 연표가 어떤 대우를 받았을까. “연표는 유럽에서 고전고대로부터 르네상스시대까지 가장 존중받는 학술 활동 가운데 하나였다”라고 저자들은 지적한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역사 연구 자체보다 더 위상이 높았다.
왜냐고? “역사는 이야기를 다루지만 연표는 사실을 다루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연표에는 학술적인 연구 범위를 넘어서는 또 다른 ‘특별한 함의’까지 곁들여져 있었다. “연표는 크리스트교도들에게 언제 부활절을 기려야 하는가와 같은 실용적인 문제들만이 아니라, 언제 종말이 도래하는가와 같은 더욱 중차대한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 주었던 것이다.” 한 가지 유념할 부분. 저자들이 지적했듯, ‘타임라인’ 특히 “단일한 축을 갖고, 규칙적이고 정확하게 날짜를 구분하는 근대적인 형식의 타임라인은 비교적 최근의 발명품”이라는 점이다. 저자들은 이 타임라인의 나이를 ‘250살 정도’라고 말한다.
이렇게 타임라인이 비교적 최근에 등장했던 것은 기술적인 제약 때문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저자들은 기술이 중요한 힘을 했지만, 그러한 변화를 추동한 힘은 아니라고 말한다. 이들이 보기에 주된 문제는 ‘개념적인 것’이다. “하나의 표준으로서의, 그리고 역사가 어떻게 생겼는지에 대한 하나의 이상적인 기준으로서의 타임라인은 근대 이전까지 출현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線적인 시간의 흐름을 따른 역사표현 방식을 중심으로 시간여행을 계획한 저자들은 서구의 고대와 중세, 근대, 오늘날을 종횡무진 오가며 연보, 계보나무, 물의 흐름 도표, 지도, 통신 차트, 통계 그래프, 공공 기념물, 미술관의 웹사이트에 이르기까지 온갖 종류의 시각적 표상에 대해 꼼꼼하고 독창적인 해석의 잣대를 들이댄다.
그리스 최고의 석판 연표, 길이 16미터에 이르는 차트, 높이 5센티미터의 역사상 가장 작은 두루마리 연표 등 그동안 쉽게 볼 수 없었던 300여 장의 도판을 감상하는 것으로도 ‘시간지도’의 탄생과 변천을 이해할 수 있다.
이 시간 지도 위에서 선들은 직진하고 순환하고 때로는 역행하고 엇갈리면서 당대인들이 자신들의 현재와 과거, 미래에 대해 어떤 생각을 품고 있었는지를, 다시 말해 자신들이 어떠한 우주의 시간 속에서 어떤 지점에 위치해 있다고 믿었는지를 우리에게 은밀하게 말해준다.
저자들은 이렇게 근대적 타임라인이라는 개념의 옷을 입은 연표 이전의 연표들의 생성과 변천을 훑고 있다. 4세기의 에우세비우스에서 15세기의 롤레빙크, 18세기의 프리스틀리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시간 지도를 만든 이들은 독자들이 역사라는 미로를 헤쳐 나오는 모험에 결정적 도움을 주는 아리아드네의 실타래로서 연표를 제시한다.
더 정확하고 더 새롭고 더 효율적인 연표를 위한 이들의 역사적 책임감과 열망은 시간 지도의 크기와 모양, 표현 형태를 끊임없이 변화시켰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떤 이유에서 연표를 만들었을까.
그 이유는 다양하다. ‘혈통’을 내세워 정치적인 정통성을 확보하려고, 세계의 종말을 예언하기 위해 정확한 날짜를 계산하기 위해, 장밋빛 진보의 전망을 제시하려고, 환경 파괴 등의 사회문제를 비판하려고, 또는 교육과 학문, 선교와 상업적 목적을 위해서 수없이 많은 연표가 만들어졌다.
저자들에 따르면, 이러한 이유에서 추진된 연표 제작에는, 그 제작자들의 크고 작은 역사가 담겨 있다. 후견인들을 위해 엉터리 계보도를 만들었던 안니우스, 두 번이나 세계 종말을 예언한윌리엄 밀러의 추종자들이 뿌린 연표 차트들, 색인에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는 글을 썼던 편집자와 개정판에서 그 글을 삭제한 출판업자의 이야기, 스폴딩 부부의 『가톨릭의 사다리』와 그에 맞선 블랑셰의 『개신교의 사다리』의 대결, 연표를 이용한 보드게임을 만들었던 소설가 마크 트웨인, 뉴욕 슬럼의 부동한 소유 현황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차트 형식의 설치물을 기획했다가 정치성 논란으로 전시가 취소된 한스 하케의 이야기 등 학자와 기술자, 아마추어와 공상가, 예술가와 독자에게서 탄생한 길고 짧고 크고 작은 에피소드들이 연표 제작의 역사에 녹아 있다.
어쩌면 이렇게 녹아 스며든 작은 역사들이 연표의 대문자 역사보다 더 생동감 있는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 책은 연대표의 연대기일 뿐 아니라, 역사를 그린 사람들의 연대기라고 명명해도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