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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같은 ‘민족’이었을까
그들은 같은 ‘민족’이었을까
  • 이 전 경상대 교수회장·지리교육과
  • 승인 2013.09.04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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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而思

한국 사회과학계에서 민족이라는 단어만큼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용어도 많지 않고 또한 민족의 개념만큼 다양하게 정의되는 용어도 많지 않을 것이다. 한국 사회과학자들이 민족의 개념을 명확하게 규정하지 않은 채 매우 혼란스럽게 사용하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말하는 韓民族혹은 韓人은 한반도에 살고 있는 민족을 의미하기도 하고 대한민국의 국민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다수 민족으로 구성된 주민들이 국민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민족과 국민이 아주 다른 의미를 갖는 용어일 수밖에 없다. 만약 우리나라에도 오늘날 소수민족들이 살고 있다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민족과 국민 개념을 혼동해 사용할 리가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거제도에 거제민족이 혹은 지리산 청학동에 청학민족이 살고 있다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민족과 국민 개념을 좀 더 명확하게 구분해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민족을 영어의 ethnicity에 상응하는 개념으로 규정하기도 하고 영어의 nation에 상응하는 개념으로 규정하기도 한다. 그런데 영어의 ethnicity(ethnicgroup)와 nation은 아주 다른 개념이기 때문에 민족 개념의 혼란은 바로 여기서 출발한다.

국내 정치학계, 사회학계, 근현대사학계 등에서 다수의 학자들이 민족을 nation에 상응하는 개념으로 규정하고 있다. 만약 민족을 nation에 상응하는 개념으로 규정한다면, 국민이라는 용어도 영어의 nation에 상응하는 개념이기 때문에 민족과 국민은 동의어가 된다.

영어의 nation economy, nationalism, nation-state를 민족경제ㆍ민족주의ㆍ민족국가로 번역하기도 하고 국민경제ㆍ국민주의ㆍ국민국가로 번역하기도 하는데, 이것은바로 우리가 민족과 국민을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국내 대다수의 문화인류학자, 문화지리학자, 고대사학자들은 민족을 영어의 ethnicity 혹은 ethnic group에 상응하는 개념으로만 이해하고, 국민을 영어의 nation에 상응하는 개념으로 본다. 필자도 민족을 영어의 ethnicity에 상응하는 개념으로만 규정하고, 영어의 nation에 상응하는 용어로는 국민만을 사용하자고 주장한다.

이 경우에 민족은 종족과 거의 같은 개념의 용어로 사용할 수 있다. 민족을 영어의 ethnicity에 상응하는 개념으로만 규정하는 경우에 우리 한반도의 역사를 어떻게 기술할 수 있을까?

반도와 만주에서는 지난 수천 년 동안 상당히 많은 민족들이 등장하거나 정복되고, 통합되거나 소멸돼 갔다. 오늘날 한반도에 살고 있는 우리 한민족은 반만 년 전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었고, 오랜 역사과정에서 다수 민족들의 문화적 동화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다.

고문헌에 등장하는 부여·고구려ㆍ백제·동예·옥저ㆍ마한ㆍ진한ㆍ변한 등은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서로 다른 관습이나 종교를 갖고 있었다. 문헌상에서 그들은 서로 다른 생활양식을 갖고 있었고, 고고학적 자료에서도 그들이 서로 다른 무덤양식(종교생활)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 다른 민족임에 틀림없고, 또한 그들도 서로 다른 민족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들은 알타이 어족에 속하는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결코 하나의 민족이 아니었다.

우리나라의 국사학계는 부여ㆍ고구려ㆍ백제ㆍ동예ㆍ옥저ㆍ마한ㆍ진한ㆍ변한을 모두 하나의 민족으로 본다. 국사학계의 이러한 관점은 민족 개념의 혼동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크게 잘못된 것이다. 국사학계의 “우리 한민족은 반만 년 동안 단일 민족이었다”라는 문장을 “Korean people has been an ethnic group for five thousand years”혹은“Korean people has been a nation for five thousand years”라고 번역할 수 있을까. 외국사회과학자들이 비웃을 일이다. 한반도와 그 부근에 살고 있던 다수의 민족들이 한민족으로 형성되는 과정이 바로 국사학계의 주요 연구과제가 될 수 없을까?


이 전 경상대 교수회장·지리교육과
미국 루이지애나주립대에서 박사를 했다. 국교련 공동의장을 맡고 있으며 주요 저서로『고조선과 고구려: 과연 우리 한민족의 역사인가』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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