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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직함 없이 어찌 학문의 높은 경지를 넘볼 수 있겠는가?”
“우직함 없이 어찌 학문의 높은 경지를 넘볼 수 있겠는가?”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3.09.03 11: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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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옥 서울대 명예교수, 15년 만의 새 산문집에서 ‘학계’ 질타

 

주해와 번역의 학문적 가치를 인정할 때, 原典 텍스트 ‘자세히 읽기’가 가능하다고 지적하는 이상옥 교수. 그의 새 에세이집이 단순하지 않은 까닭은, 그런 학문적 고뇌가 곳곳에 묻어나기 때문이다. 그의 생각을 엿보기 위해 관련 부분을 발췌했다.

‘자세히 읽기’가 오늘날 궁지에 몰려 있지만 아무도 그 가치를 부정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아마도 이론의 값어치를 가장 집요하게 신봉하는 사람들까지도 ‘자세히 읽기’의 필요성만은 서슴없이 인정할 테니까요. 하지만 ‘자세히 읽기’를 아무리 강조하고 권장하려 해도 우리 주변에는 그런 노력에 유리한 환경이 전혀 조성돼 있지 않습니다.

우선 영미문학은 우리에게 외국문학이 아닙니까? 그러기 때문에 영미문학을 읽는 일은 외국어로 된 텍스트를 읽어야 하는 스트레스를 포함하는 힘겨운 일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스트레스는,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영미문학의 텍스트 읽기가 어려운 어학적 해석과 문화적 이해를 포함하는 가외의 노력을 요구한다는 사실과 관련돼 있습니다.

‘자세히 읽기’가 궁지에 몰린 까닭
그런데도 우리나라에서는 독자적 영문학 연구가 시작된 지 반세기가 지나도록 이런 노력의 어려움을 조금이나마 들어줄 학구적 성과가 별로 축적돼 있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주석과 번역 문제에 대해서만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우리나라의 수많은 대학 영문학과에서는 해마다 수천 명씩의 신입생을 받아들입니다만, 그들은 언제나 텍스트 읽기를 원점에서 시작해야 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새로운 세대의 신입생은 선배 세대보다는 좀 더 수월하게 공부할 수 있는 유리한 지점에서 출발할 수 있어야 할 텐데 그렇지 못하다는 뜻입니다.

저는 일찍이 주석본이나 번역본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그 방면의 노력을 조금은 들여왔다고 자부합니다만, 사실 제 자신이 해 놓은 것을 곰곰이 들여다보면 틀린 데가 많고 한심하기만 합니다. 그러므로 능력을 갖춘 더 많은 학자들이 좋은 논문만 쓰겠다고 덤빌 것이 아니라 이 방면으로도 관심을 쏟고 노력을 기울여야 할 필요성이 절실하지만, 그럴 기미가 별로 보이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런 작업에 도움이 될 환경도 조성돼 있지 않습니다. 그 이유를 두어 가지 들어보겠습니다.

첫째로 주석 달기와 번역 하기는 긴 시간에 걸친 엄청난 노력을 요합니다. 자세한 사전 뒤지기와 참고문헌 섭렵을 포함하는 많은 학구적 노력을 들이지 않고는 그런 작업을 해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노력이야말로 학자들에게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져야 할 것이지만, 잦은 오류 범하기라는 위험부담을 내포하고 있는 데 반해 금전적 보답은 보잘것없기 때문에 학자들 사이에서는 외면당하기 일쑤지요. 그러나 이보다도 더 심각한 문제는 주해 작업이나 번역의 학구적 가치를 학계에서 인정해 주지 않으려 하는 데 있습니다.

저는 고전적 가치를 지닌 한 편의 작품에 자상한 주석을 달고 그 작품에 대한 비평적 해제를 써서 붙일 수 있다면 그 작업이야말로 여느 학술 논문에 비해서 조금도 손색없는 학술적 가치를 지닐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작업의 결실을 가지고서 석사학위 논문이나 박사학위 논문을 대신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당당하게 취득한 학위를 가지고서 교원으로 임용되고 승진을 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주석·해제로도 박사학위 논문 대신할 수 있어야
번역의 경우에 대해서도 똑같은 말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탁월한 번역을 해서 박사학위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석사학위 정도는 받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번역은 그 파급 효과가 단순히 해당 학계에서만 끝나지 않고 일반 독서 대중에게까지 미칠 수 있기 때문에 또 다른 의미를 지닐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령 “앞으로 적어도 한 세기 동안은 다시 번역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잘된 번역”이라는 평을 들을 만한 번역물을 낼 수 있다면 그야말로 외국문학도가 거둘 수 있는 최고의 값진 성과일 것입니다.

이처럼 훌륭한 주해와 번역은 작품의 ‘자세히 읽기’가 있어야 가능하며, 영미문학 공부를 처음 시작하거나 깊은 공부를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자세히 읽기’를 하는 데 더없이 긴요한 도구를 제공해 주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주해와 번역 작업은 ‘자세히 읽기’의 결과이면서 동시에 그 출발점이 되기도 하므로 서로 상생 또는 상승관계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영미문학계에서는 좀 더 유능하고 의욕적인 연구 인력이 주해와 번역 작업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때가 됐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저는 ‘자세히 읽기’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것과 관련된 몇 가지 문제점들을 두서없이 거론해 보았습니다.

제가 그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한다고 해도, 저의 느낌으로는, ‘자세히 읽기’를 옹호하려는 노력이 승산 없는 싸움으로 되고 말 듯합니다. 오늘날 우리 학계나 사회를 지배하는 연구 풍토나 가치관이 도대체 ‘자세히 읽기’ 같은 미려한 짓을 용납할 것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세히 읽기’야말로 우리가 영미문학을 공부함에 있어서 가장 믿음직하고 값진 방법이라는 신념만 있다면 비록 가망 없는 싸움이라 하더라도 한번 집요하게 덤벼들 필요가 있습니다.

어찌 꼭 이긴다는 보장이 있어야만 모든 싸움을 걸 수 있겠습니까? 더러는 뻔히 질 줄을 알면서도 신념 때문에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할 때도 있습니다. 이런 싸움은 세속적으로 어리석은 짓이 되겠지만 이 정도의 우직함이 없다면 어찌 학문이라는 높은 경지를 넘볼 수 있겠습니까. 

 이상옥 서울대 명예교수는 현재 이효석문화재단 이사장으로 있다. 『조셉 콘라드 연구』, 『이효석의 삶과 문학』 등의 저서와, 『젊은 예술가의 초상』, 『암흑의 핵심』 등의 번역서가 있다. 근래에는 야생화를 탐사하고 카메라에 담는 일에도 마음을 쏟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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