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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칼럼_ 북한까지 아우르는 언론사 연구
원로칼럼_ 북한까지 아우르는 언론사 연구
  • 정진석 한국외대 명예교수·언론사
  • 승인 2013.08.28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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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석 한국외대 명예교수·언론사

2004년 2월에 정년퇴임했으니 내년이면 만 10년이다. 정년 후 강의는 접었지만 자유로운 시간을 활용해 집필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개인 연구실의 평생 모은 장서를 활용하고, 국립중앙도서관, 국사편찬위원회, 국립중앙도서관 5층 통일부의 북한자료센터에 직접 찾아가서 자료를 열람하거나 수집하고 확인한다. 재직 시절에는 자료 찾기와 복사를 조교나 대학원생에게 맡겼으나 퇴임 후 혼자 손으로 하게 되니 오히려 편리한 점도 많다. 원하는 자료를 정확하게 찾을 수 있고, 관련되는 다른 자료를 건져 올리는 즐거움도 맞볼 수 있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집필에 전념하게 된다.

나는 한국 언론사를 연구하면서 북한 언론에도 관심을 지녀 왔다. 북한의 언론도 우리 언론 역사의 한 부분이며, 월북 또는 납북된 언론인들의 행적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연구 대상이다. ?북한의 잡지?(??북한의 언론??, 을유문화사, 1989), ?사회주의와 언론?(??언론과 한국현대사??, 커뮤니케이션북스, 2001)은 논문이고, 저서로 ??6·25전쟁 납북??(기파랑, 2006), ??전쟁기의 언론과 문학??(소명, 2012)이 북한 관련 연구결과물이다. 

올해는 정전협정 체결 60주년이다. <로동신문>(노동당 기관지), <민주조선>(내각 기관지), <근로자>(노동당 이론잡지), <조선문학>(작가동맹 기관지)과 같은 모든 북한의 매체는 철저한 검열과 가공을 거친 다음에 발행되기 때문에 선전물인 동시에 ‘관보’의 성격을 지닌다. 남침전쟁 2일 후인 6월 27일 평양의 <로동신문>과 <민주조선>은 1면에 똑같은 기사를 실었다. 「전체 조선인민들에게 호소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수상 김일성 장군의 방송연설」이라는 제목이었다. 1면 전체를 김일성의 연설문으로 채우고 중앙에 김일성의 대형 사진을 배치한 편집이었다. 서울 점령 4일 만인 7월 2일부터 발행된 <조선인민보>와 <해방일보>도 첫 호에 같은 기사를 실었다. 조선작가동맹 기관지 <문학예술>(1950.7)에도 연설 전문이 7쪽에 걸쳐 실려 있다.

정전협정 발효로 3년 1개월에 걸친 참혹한 전쟁이 일단 멈추던 날, <로동신문>과 <민주조선>은 ‘호외’를 발행했다. 「김일성 원수와 팽덕회 장군이 부대에 발표한 정전명령」이라는 제목이었다. 김일성은 “조선인민군과 중국 인민지원군은 침략을 저항하며 평화를 보위하는 영용한 전쟁을 3년이나 경과하였고 조선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쟁취하는 정전담판을 2년이나 견지하였다”고 말하면서, 정전협정으로 “영광스러운 승리를 얻었다”고 주장했다. 북한이 이날을 ‘전승절’로 기념한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진 바와 같다. 두 신문은 28일에 발행한 호외에서도 김일성의 방송연설을 전체 지면을 할애해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이어서 피의 숙청이 시작됐다. 정전협정이 체결된 지 1주일 뒤인 8월 3일부터 6일까지 나흘 동안 평양의 북한 최고재판소 군사재판부는 남로당 출신 이승엽(서울시 인민위원장)을 비롯해 12명에 대한 재판을 진행했다.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가 ‘서기’로 재판에 간여했다.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정권 전복 음모와 반국가적 간첩 테로 및 선전선동행위’를 했다는 혐의를 씌워 박헌영 중심의 남로당 세력을 공개적으로 일망타진하는 재판이었다.

그 가운데 조일명, 임화, 박승원, 이원조, 설정식은 언론인이거나 문인이었다. 이들은 일제 치하에서 공산주의 운동을 주도했던 인물들이었고, 광복 후에는 남한의 공산주의 운동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던 경력을 지니고 있다. 월북 후에는 북한 권력의 고위층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숙청의 피바람은 무자비했다. 12명 가운데 10명은 사형, 1명은 15년, 다른 1명은 10년 징역형이었다. 동시에 ‘전재산 몰수’ 처분이 떨어졌다. 월북 문인 이태준, 김남천, 작곡가 김순남은 재판에 회부되지 않았을 뿐 철저한 비판의 대상이 돼 예술가로서는 사형선고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정진석 한국외대 명예교수·언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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