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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자도에서 만난 어머니의 초상
임자도에서 만난 어머니의 초상
  • 교수신문
  • 승인 2013.08.26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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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전남 해안은 섬의 보고다. 며칠 전 목포대 도서문화연구원과 도시사학회가 공동 주최한 학술회의에 참가했다가 연구원측의 배려로 임자도 답사를 떠날 수 있었다. 섬에서 하룻밤 머무는 짧은 일정이었지만, 강봉룡 교수 등 전문가들의 안내를 받고 설명을 들었기 때문인지 정말 너무나 뜻 깊은 답사여행이었다. 그렇게 크지 않은 섬이었음에도 임자도의 풍경과 주민들의 삶은 다양한 모습을 보여줬다. 여러 섬을 간척한 결과, 섬의 이곳저곳에는 상당히 넓은 농지가 펼쳐져 있었다.

주민들은 벼와 환금작물인 대파를 재배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천일염전을 개발해 운영하고 있었다. 새우와 민어 잡이 등 어업활동도 활발한 편이었다. 강봉룡 원장이 그곳의 한 젊은 이장과 거리낌 없이 말을 주고받으며 어울리는 모습이 무척 자연스럽게 여겨지기도 했다. 우리 일행은 그 젊은 이장의 트럭을 이용해 섬의 명소 가운데 하나인 ‘용난굴’을 탐사했다. 우리를 안내한 이장과 젊은이들은 대체로 활기에 넘치고 의욕적이었다. 삶에 지친 모습이 결코 아니었다. 이번 답사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섬의 자연풍광이 아니라, 1936년 어느 한 시점을 찍은 영상 자료였다. 연구원측의 설명에 따르면, 바로 그 해에 일본인 시부자와 게이조가 이끄는 한 답사팀이 이 섬을 방문했다.

이들은 며칠간 섬에 머물면서 당시 짧은 민어잡이철에만 열리던 어시장, ‘타리 波市’를 흑백필름으로 촬영했다. 이들은 왜 이 섬을 답사했을까. 타리 파시는 해방 직후 사라져서 지금은 섬 주민들의 기억 속에만 희미하게 남아 있다. 민어는 일본인이 좋아하는 어류의 하나다. 식민지시대에 임자도 인근해역에서는 특히 민어잡이가 활발했다. 고기잡이철에는 수많은 어선들이 임자도에 모여들어 포획한 민어를 풀고, 이를 거래하는 성대한 어시장이 열렸다. 어획물 대부분은 일본으로 실어 날랐을 것이다.

파시가 열릴 때에는 500여 채 이상의 임시 천막들이 세워져 밤이면 불야성을 이뤘다고 한다. 이 때문인지 임자도에는 당시 소규모 일본인 거류지가 형성돼 있었다. 시부자와 게이조가 이 섬을 찾은 이유도 여기에 있었을 것이다. 시부자와가 남긴 귀중한 자료들은 현재 가나가와대학 상민문화연구소에서 보관하고 있다. 최근에 목포대 도서문화연구원은 가나가와대학과 공동으로 이 섬을 탐사하면서, 그 영상자료 가운데 일부를 확인하는 작업을 시도했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그들이 주목한 것은 흰 천으로 머리를 두르고 간난아이를 품에 안은 30대의 여인이 몇몇 주민들과 함께 촬영한 영상자료였다. 젊은 여인은 아이를 안은 채로 보리타작을 하며 시부자와 답사팀의 촬영에 응했던 모양이다. 그 여인은 지금도 섬에서 살고 있는 박차규 옹(76)의 모친으로 밝혀졌다. 같은 마을에 사는 연로한 주민들이 이를 확인했고, 뒤이어 박차규 옹 본인도 그 사진을 보고 회한에 사로잡혀 눈시울을 붉혔다. 그 분의 회고에 따르면, 모친은 그 시대의 모든 어머니의 삶이 그랬듯이, 억척스럽고 부지런하면서도 헌신적이었다. 생계를 위한 노동에는 밤과 낮의 구별이 없었다. 그 모진 세월을 ‘인내’를 베개 삼아 지내온 분이었다. 도서문화연구원에서 펴낸 『임자도 가이드북』에 실린 그 사진은 여러 가지 중층적인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다.

생존한 아들보다도 더 젊은 모습으로 노동하는 여인의 모습 너머로 식민지시대 민중의 생활상이 어렴풋이 지나가고 있었고, 촬영에 응한 사람들의 지친 표정과 그러면서도 호기심 어린 눈빛에서 개인의 사소한 일상이 희미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그 사진의 중층적인 이미지들이 임자도의 현재 풍경과 뒤섞여 섬의 역사며 주민들의 삶이며 세월이 흐르면서 빚어낸 변화들에 관해 장대한 서사를 연출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한 장의 사진, 그 사진이 불러온 여러 이미지들이 일제시대부터 지금까지 임자도가 겪어온 그 세월의 풍랑을 한꺼번에 이야기하고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평소 나는 텍스트로서 영상언어의 위력을 별로 인정하지 않았다. 제아무리 영상언어가 이성으로부터 감각의 해방을 추구하는 이 시대의 풍조를 반영한다고 하더라도, 그 서사기능은 문자언어에 비해 뒤떨어진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예외적인 사례도 많다는 것을 나는 이번 기회에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영상자료의 한 단면이 지금부터 70여년 전 임자도의 풍경을 다시 불러와 그 시간대의 삶과 현재의 삶을 서로 비교할 수 있도록 해준 것이다. 임자도에서 만난 영상자료 덕분에 나 또한 지금은 이승에 계신 어머니의 초상을 떠올리며 한동안 회한에 젖었다.

이영석 서평위원/광주대·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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