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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인의 大作들을 만나는 환희 … 그러나 ‘새로운 해석’은 없었다
거인의 大作들을 만나는 환희 … 그러나 ‘새로운 해석’은 없었다
  • 교수신문
  • 승인 2013.08.20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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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을 그린 화가 고갱 그리고 그 이후」전을 보고

 

▲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캔버스에 유화, 139.1×374.6cm, 1897~1898, 보스턴미술관

「낙원을 그린 화가 고갱 그리고 그 이후」展(서울시립미술관 2013년 6월 14일~9월 29일)을 보고 왔다. 전시장을 방문한 때가 평일 오전이라 기대만큼(!) 관객이 많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전시는 벌써 20만 명 이상이 다녀간 올 여름 최대의 인기 전시다. 미술사가 에머 바커(Emma Barker)가 블록버스터 전시회의 기준으로 삼은 관람객 25만 명은 훌쩍 넘길 기세다. 이 전시는 유명한 폴 고갱(Paul Gauguin, 1848~1903)의 회고전이다. 전시에 출품된 작품들의 면면은 ‘회고전’이라는 명칭에 충분히 부합할 만큼 화려하다.

이 전시에서 우리는 「설교후의 환상」(1888 스코틀랜드 국립미술관), 「황색의 그리스도」(1889, 올브라이트녹스 아트갤러리), 「황색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1890~1891, 오르세미술관), 그리고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1897~1898, 보스턴미술관) 등을 볼 수 있다. 모두가 잘 알려진 고갱의 대표작들이다. 기획자는 60여점의 고갱 작품들을 브르타뉴 시기(1873∼1891)와 폴리네시아 시기(1893∼1903), 그리고 초기 인상파 시기로 나눠 배치했다.

詩的인 작품들과 말라르메의 예찬
이번 전시에 대한 감상을 솔직히 말하자면 ‘고맙다’는 것이다. 고갱의 대표작들을 한자리에 모아 비교 감상할 기회가 어디 흔한가. 게다가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런 전시를 우리나라에서 본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런 고마움은 세로 139cm, 가로 375cm에 달하는 대작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앞에서 극대화된다. 복제품과 복사물에 친숙해진 내 몸과 마음은 거대한 원작 앞에서 어쩔 줄을 몰라 하면서도 그것을 즐긴다. 특히 사진이미지에서는 볼 수 없는 고갱 특유의 붓 터치를 확인하는 것은 꽤 즐거운 일이다.

가령 고갱 초기 시절의 풍경화들은 짧고 경쾌하게 칠하는 인상파 특유의 방식으로 그렸지만 이 작품들은 다른 인상파 작품들과는 다르게 햇빛이 어디서 오는지 좀처럼 파악할 수가 없다. 이로써 인상파의 붓질은 고갱의 작품에서 이전과는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이런 양상은 주제를 다루는 방식에서도 나타난다. 이를테면 고갱은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 ‘성모 마리아와 예수’, ‘천사와 싸우는 야곱’ 같이 널리 알려진 주제들을 그렸지만 그것들을 익히 알려진 코드에 따라 그리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들은 그것을 우리가 알고 있는 방식으로 쉽게 해석할 수가 없다. 우리에게 친숙한 단어를 詩안에 끌어들여 낯설게 하는, 즉 전혀 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시인들처럼 고갱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붓질, 주제들을 그림 속에 끌어들여 전혀 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그런 의미에서 고갱의 작품은 詩的(poetic)이다. 이로써 작품은 난해해지지만 시적 생명력을 갖게 될 것이다. 그래서 “대상을 명시하는 것이 아니라 암시하는 것이 시의 꿈”이라고 믿었던 시인 말라르메는 고갱을 예찬했던 것이다. 그리고 다시 눈앞의 그림을 보면 고갱은 캔버스 위에 물감을 두텁게 쌓아올리지 않았다. 그는 차분한 붓질로 평평하게 칠했다. 이렇게 본다면 고갱은 뜨거운 감정을 분출하는 작가가 아니라 모든 것을 완벽하게 조율하는 이지적인 작가로 보아야 할 것이다.

▲ 「황색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 캔버스에 유화, 38×46cm, 1890~1891, 오르세미술관

회화-음악을 온 몸으로 체험하기
색채를 다루는 방식은 또 어떤가! 그 빨강, 그 노랑, 그 파랑은 작품의 사진이미지 속에서는 그 진면목을 경험하지 못하던 것들이다. 미술사가인 게오르그 슈미트는 오래 전에 이 색채들과 색채들의 관계를 작곡/연주로 비유했거니와 여기에는 빨강, 노랑, 파랑을 조율해 만들어낸 아름다운 음악이 있다. 이른바 ‘시각의 청각화’, 곧 공감각적 표현은 시인들의 전유물이 아니었던 것이다. 예민한 관객이라면 이번 전시에서 그 회화-음악을 온 몸으로 체험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모든 즐거움은 발품을 팔아 그 많은 작품을 한자리에 모은 기획자가 내게 선사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기획자에게 감사한다.

하지만 ‘전시 자체의 구성’으로 시선을 돌리면 사정이 달라진다. 무엇보다 이 전시는 고갱에 대한 지금까지의 일반적인 이해를 조금도 넘어서지 못했다는 한계가 있다. 후기인상주의, 상징주의, 종합주의를 열거하는 기획자의 변은 상식 수준을 조금도 넘어서지 못하고 있으며 브르타뉴 시기와 폴리네시아 시기로 나눈 -안전한(!)-공간 구성은 고갱의 작품이 갖는 다양하고 다채로운 함의를 충분히 살리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힘들게 한 자리에 모인 걸작들은 교과서에 있는 작품들을 한자리에서 보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됐다. 특히 전시기획자의 글에서 고갱을 ‘최후의 인상파화가’로 언급한 부분은―고갱을 인상파 화가로 규정하는 것이 적절한지 여부는 별개로 하더라도―매우 부적절해 보인다.

비장함의 뉘앙스를 지니고 있는 ‘최후’라는 단어의 사용은 관객의 흥미를 자극하는데 효과적일지는 몰라도 ‘인상파’의 문제의식과 작업이 갖는 현재적 의미를 부정 내지는 간과하는 부적절한 접근이다. 이러한 문제는 어떻든 ‘흥행’을 최우선으로 할 수 밖에 없는 전문기획사가 전시를 주도하면서 생긴 현상이다. 이러한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서울시립미술관은 또 다른 외부기획자를 둬 고갱의 작업을 현대미술가들과 연관짓는 전시를 덧붙였다.

“고갱의 주요 작품들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 인지도 있는 현대작가들의 작품이 한자리에 모여 미술사적 시공을 확장하고 관람객의 경험을 증폭시키게 된다”는 것이다. 이로써 전시제목은 「낙원을 그린 화가 고갱」이 아니라 「낙원을 그린 화가 고갱 그리고 그 이후」가 됐다. 이는 미술관 내부에서 고갱의 작품들과 마르코 브람빌라(Marco Brambilla), 라샤드 뉴섬(Rashaad Newsome), 양푸동(Yang Fudong)과 같은 현대 작가들의 작품들이 함께 전시되는 방식으로 구체화됐다.

전시 일관성 깨트린 21세기 작가들 배치
이렇게 고갱의 전시에 고갱의 재해석을 부가하려는 시도 그 자체는 매우 바람직한 것이지만 현실에 비춰 볼 때 성공적이라고 평하기는 어려운 결과를 낳았다. 「그 이후」의 기획자는 21세기 몇몇 작가들의 작품을 ‘고갱의 재해석’이라는 차원에서 제시했으나 그 재해석이 효과적으로 가시화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관객의 입장에서 현재 함께 전시된 고갱과 브람빌라, 또는 고갱과 양푸동 사이의 관계를 파악하고 100년이 넘는 시간의 간극을 메우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21세기 작가들의 작품은 고갱 작업의 (재)이해를 돕기보다는 전시의 일관성을 깨트리는 방식으로 고갱 작품들과 상호작용하는 모양새다.

2005년 겨울 덕수궁 미술관에서 열린 「아시아의 큐비즘」展전에서처럼 특정작가나 문예사조를 깊이 있게 파고드는 신중한 접근이 아쉽다. 또 하나 언급하고 싶은 것은 전시 제목이다. 제목에 등장한 ‘낙원’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논자들이 비판한대로 고갱이 제시한 풍부한 세계를 한정짓는 문제가 있다. 이 단어는 ‘탈식민’, ‘탈가부장’의 관점에서 고갱의 원시주의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논자도 불편하게 하지만 고갱의 작업을 모던 유토피아의 다채로운 함의를 간직한 것으로 보는 논자도 불편하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전시의 영문 제목으로 제시된 ‘Voyage into the Myth’의 함의를 좀 더 살리지 못한 것은 아쉬운 일이다.

 ‘Myth’는 롤랑 바르트 등에 의해 긍정/부정의 다양한 함의를 갖게 된 단어이며 ‘voyage’는 ‘낙원’에 비해 고갱의 작업에 ‘활기를 불어넣는’ 역동적 개념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한글 제목과 영문 제목의 뉘앙스 간극을 좁히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그 자체 납득하기 어려운 현상이다. 몇 가지 비판을 제기했으나 고갱展처럼 다른 나라 대가들의 작품을 국내에 폭넓게 소개하는 일은 그 자체로 유의미하다. 물론 그것을 현재의 시공간의 견지에서 적극적으로 재평가/재배치하려는 노력이 수반된다는 조건 하에서. 1조 5천억원, 세계 최초, 최후, 20만 같은 양적 잣대가 아니라 ‘세계에 대한 새로운 해석’, 해석의 즐거움을 야기하는 ‘참신한 이의제기’로 평가받는 블록버스터 전시를 기다린다.

홍지석 단국대 연구교수·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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