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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 샤먼·김알지 신화 아닌 古東夷族 새숭배사상에서 원류 찾아야
시베리아 샤먼·김알지 신화 아닌 古東夷族 새숭배사상에서 원류 찾아야
  • 김양동 계명대 석좌교수·서예가
  • 승인 2013.08.19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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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대문화 원형의 상징과 해석 11. 신라 금관의 기원과 상징의 세계

최근 금관에 대한 전문연구 서적이 여러 권 출간됐다. 『금관의 비밀』(김병모, 푸른역사, 1998), 『황금의 나라 신라』(이한상, 김영사, 2004), 『신라 금관의 기원을 밝힌다』(임재해, 지식산업사, 2008), 『우리 금관의 역사를 밝힌다』(박선희, 지식산업사, 2008) 등이다. 금관 연구는 그동안 선행연구들이 적지 않았지만, 이처럼 역저들의 단행본 출간은 종전에 없었던 일이다. 이러한 금관연구의 열기는 민족문화의 원류에 대한 강력한 탐구심의 발로에서 그 정체성을 찾으려는 학문적 성과일 것이다.

이번 호는 위의 저서들과는 다른 견해에서 신라 금관의 기원과 상징세계를 밝혀보려 한다. 지금까지의 諸說들은 금관의 기본요소는 나뭇가지[樹枝形], 사슴뿔[鹿角形], 曲玉 세 가지로 보고, 그 기원은 시베리아 샤먼의 巫冠일 것이라고 보았다. 임재해 교수만이 이러한 통설을 뒤집어 신라 금관은 5세기 무렵 김씨 왕조의 출현에서부터 나타나기 시작하므로, 김알지 신화와 신라 왕권 성립과정에서 그 기원이 시작된 것이라는 설을 제시하고 있다.

‘冠’의 기원은 먼저 ‘冠’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부터 풀어야 한다. ‘冠’은 신체의 가장 높은 위치인 머리에 쓰는 물건으로서 그 장식과 디자인은 사용자의 신분과 지위를 나타낸다. 신석기시대부터 관은 인간사유의 반영물로서 거기엔 숭배하는 대상의 미적 조형과 원시종교적 토템사상이 복합적으로 작용돼 있다. 그러므로 ‘冠’에는 원시시대부터 신체보호의 실용성보다 집단의 의식과 사유를 집약해 반영한 우두머리의 표지물로 기능했다고 볼 수 있다. 신체보호용은 ‘帽’라 하여 ‘冠’과는 구분해야 한다.

그러면 고대 집단의 의식과 사유가 무엇이냐 하는 문제가 먼저 대두된다. 그것은 집단의 원시종교적 의식이 그 내용일 터인데, 그 내용은 대체로 신으로 숭배했던 대상이 중심적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전회의 연재에서 일관되게 주장한 母型의 원리인 태양숭배사상이 관식의 중심이 되는 것은 자연스런 이치라고 봐야할 것이다. ‘冠’의 音과 訓은 ‘벼슬 관’, ‘새[鳥]볏 관’, ‘갓 관’, ‘어른 될 관’ 등이다. 벼슬과 볏의 어원은 태양의 ‘빛, 빛살’에 있다. ‘벼슬’의 語意는 벼슬자리[官]로 전이됐으며 ‘볏’은 닭 벼슬[鷄冠]의 볏이다.

벼슬자리는 하여간 光나는 자리이며, 닭의 볏 또한 화염문과 같은 불꽃 형상을 그대로 닮았다. 모두 태양의 빛살인 光芒을 상징한다. 그런 광망을 冠飾으로 디자인화한 고대인들의 조형적 감각과 빼어난 미적 솜씨를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보물이 바로 신라 금관이다. 아래의 그림은 대문구문화 陶尊의 화염문[그림1-(2)]과 집안에서 출토된 고구려 금동관의 冠飾[그림 1-(1)]이다.

고구려 금동관의 冠飾은 닭의 볏과 같은 동일 조형임을 확인할 수 있다. 모두 태양의 광망을 관식화한 것이다. 이런 조형이 뒤에 정자관[그림1-3]의 조형으로 옮겨진다. 이런 관식의 전개에서 관의 원초적 조형은 어떤 발상에서 시작되고 있는가하는 문제를 풀어줄 단초가 열린다. 닭은 그 울음으로써 최초로 새벽을 알리는 새다.

그래서 태양과 동방을 상징하지만, 기묘하게도 그 볏이 태양의 광망을 닮고 있는 점을 인식했던 고대인은 닭을 솔개(뒤에 봉황으로 상징됨) 다음쯤으로 태양의 등가물 위치에 올려놓는다. 경주를 鷄林, 始林이라 부르는 것도 신성한 닭으로 대신한 태양의 원형적 이미지, 즉 ‘탄생의 땅’, ‘광명의 땅’, ‘시원의 땅’이라는 의미를 문학적으로 윤색한 말이다. 신라 金氏 왕족이 김씨로 氏稱한 이유도 그 母型의 원리는 그들이 태양숭배족임을 표방한 姓氏이다. 굳이 알타이를 거론하지 않아도 이해되리라 믿는다. 고대 군주는 태양과 같은 신적 존재로 절대 권력과 통치력을 지닌 인물이다. 그러므로 그 위상에 맞는 관식이 반드시 필요하다. 따라서 초기에는 태양문과 태양문의 상징인 화염문(불꽃무늬)을 간박한 형태로 표지하다가, 점차 관식에 草華形, 唐草形, 蓮花形, 瑞鳥形 등이 가미된 미적 장식성으로 변환되는 디자인적 진화가 이뤄진다.

樹枝形의 ‘山’字, ‘出’字는 화염문과 관련된 조형
아래의 [그림2]는 모두 태양문과 태양문의 등가물인 화염문 및 새(솔개)가 관식으로 나타난 사례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유물들이다. [그림2-(1)]은 안휘성 방부시 쌍돈촌에서 1986년 출토된 높이 6.3cm 크기의 조그마한 신석기시대(기원전2500~전2000)의 陶塑인물상이다(蚌埠市박물관 소장). 이 도소상의 이마엔 그 당시 이 지역에 거주했던 동이족들이 태양숭배 관념을 頭飾으로 나타낸 모습을 잘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사상적 배경과 양식화의 흐름이 수천 년 지난 현재 일본 황실의 관식[그림2-(2)]에서 계승되고 있음을 유의해 볼 필요가 있다. [그림2-(2),(5)]는 고구려 금동관의 頂部인데, (2)는 집안에서 출토된 羽飾形 금동관 꼭대기이고, (5)는 평양 청암리 토성에서 출토된 불꽃무늬 투조금동관 꼭대기이다.

모두 그 꼭대기는 둥근 원형의 불꽃봉우리 속에 簡化된 솔개의 디자인이 들어 있다. 특히 집안출토 금동관은 수레바퀴모양으로 상징된 태양문이 보이고 그 태양문 속에 환두대도의 삼지엽과 같은 새의 造型이 들어 있다. 청암리의 불꽃무늬 투조금동관도 불꽃무늬 속에 고고학계에서 말하는 이른바 삼지엽이라는 솔개문양이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러한 조형양식에 대한 발견과 상징성을 정확하게 해독하지 못했다. 이른바 寶珠形이란 불교식으로 뭉뚱그린 명칭을 사용해 왔는가하면, 솔개문을 엉뚱하게도 세 가닥잎사귀(삼지엽, 삼엽)라 함으로써 문양에 내장된 고대정보를 전혀 풀어내지 못한 채 수십 년이 흘렀다.

국왕이 불교를 믿지도 않은 나라에서 국왕이든 수리급의 지도자이든 그들의 冠 꼭대기에 왜 보주를 표지하겠으며, 또 그 안에 있는 세 가닥 잎사귀는 고대 관식과 무슨 상징적 의미를 가졌기에 冠 頂部의 중요 위치를 점하고 있단 말인가. [그림2-(5)]는 솔개문이 花葉처럼 변형돼 문양의 상징적 배경이 흐려졌지만, [그림2-(6)]의 복천동 출토 금동관 꼭대기를 보면 화염문 속에 위치한 디자인이 명확한 솔개문임을 쉽게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冠의 꼭대기 조형은 보주가 아닌 불꽃봉우리이며, 그 안의 문양은 삼지엽이 아닌 솔개문임을 최초로 해독해 사계에 제시한다. 불꽃무늬와 솔개로서 태양숭배사상을 복합 상징한 체계가 고대관식의 조형적 기본원리다. 이러한 사실은 고동이족의 역사 속을 관류해온 일관된 흐름이었다.
참고로 그동안 선행 연구된 금관 기원설과 세움장식[立飾] 명칭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시베리아 샤먼 기원설 김열규 : 출자형, 녹각형, 자연수지형 김병모 : 직각수지형, 녹각형, 자연수지형 이종선 : 산자형(1산, 3산, 4산), 녹각형 이한상 : 출자모양, 사슴뿔, 나뭇가지 (2) 계림의 신수 상징설, 김알지 신화 상징 : 임재해 자연수지형, 나뭇가지, 수목형 → 기본형(곧은 가지) 山자형, 出자형, 직각수지형 → 가지 변이형 鹿角형, 사슴뿔 모양 → 줄기 변이형 고대 관식이 태양과 새 숭배사상을 조형적으로 상징하고 있음을 강조하는 이유는, 신라 금관의 기원과 상징세계를 밝히기 위한 배경이 되기 때문이다. 금관은 한국 고대문화 중 특히 공예미술의 세계적 보물이며 한민족의 고대사상이 압축된 정보의 창고다.

거듭 말하거니와 金冠의 기원은 시베리아 샤먼의 무관이나 김알지 신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태양숭배사상을 기본원리로 삼아 태양의 화염문과 새(솔개)를 군왕의 심볼로 관식화한 원류에서 그 기원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또한 상징적 의미를 전혀 해명하지 못하면서 山字形, 出字形 식으로 이름 붙이는 것은 ‘빗살무늬’ 식의 즉물적 명칭과 다를 바 없으며 고대사상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일임을 천명한다. 동시에 나뭇가지[樹枝形] 세움장식, 사슴뿔모양[鹿角形] 세움장식이란 명칭도 그 형태에 따라 의미를 추론하고, 북방 유목민의 샤먼사상과 연계함으로써 금관의 기원을 삼으려는 발상인데, 그것 또한 고대 사유세계를 이해하지 못한 접근방식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세움장식 꼭대기의 상징성에 대한 다음과 같은 종전의 견해에도 동의할 수 없는 이유가 분명하다. ⑴ 寶珠(하트, 양파, 복숭아 상징 등) : 김원룡, 김열규, 김병모 ⑵ 러시아 비잔틴 교회 양식의 돔으로 해석 : 존 코벨 ⑶ 神樹의 움, 촉, 순으로 생명력 상징 : 임재해 세움장식을 수지형, 녹각형으로 볼 수 없는 것은, 그 조형적 양식이 태양숭배의 화염문을 簡化한 디자인적 구성에서 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움장식 꼭대기의 상징은 불꽃봉우리가 그 원형이 된다. 동이족의 고대관식은 그들 사유의 원형을 시각화해 상징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런 상징이 관식을 비롯해 服飾, 巫具, 馬具, 武具 등에 시문되는데, 나무나 사슴은 태양을 앞서는 최고의 숭배대상물이 결코 될 수 없다고 본다면, 초기 관식의 디자인은 태양 그 자체가 아니면 불꽃무늬 즉 화염문이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나뭇가지와 사슴뿔에 이론적 근거를 자꾸 찾다보니 神樹, 宇宙木 등 구름잡는 식의 표현을 쓰고, 신라 금관보다 천년 이상 下代인 시베리아 샤먼 관을 예로 들게 된다. 기존학설에 매몰되지 말고 해체해 새로운 접근방법을 탐색해 그 상징을 해석해야 할 필요성이 여기에 있다.

화염문은 草華形처럼 優美해지다가 다시 나뭇가지형이나 녹각형처럼 엇비슷하게 보이는 변모과정을 거쳐 마침내 출자형처럼 직각화된 조형으로 굳어진다. [그림3]에서 직각화되기 이전 단계의 고구려, 가야, 백제, 신라 관들을 보면 그런 현상이 확인된다. 태양의 심볼인 화염문은 다시 태양과 등가물인 새(솔개)와 조형적으로 결합함으로써 복합적으로 군왕의 이미지를 상징한다. 그러므로 금관의 착장 모습은 내관 둘레에 화염문이 간화된 3개의 직각단을 세움장식으로 입식하고, 다시 조익형을 결합해 마치 솔개가 날개를 벌린 듯한 비상의 포즈로 威勢하는 것이다.[그림4]

흔들리는 금관의 비밀
한국 문화재 해외전시 때마다 빼놓을 수 없는 보물은 금관이다. 그만큼 금관은 우리의 문화재를 대표한다. 금관에 대한 찬사 중에 “微動에도 신비스럽게 흔들리는 찬란한 금관의 영롱한 황금빛”이란 미사려구가 있다. 미동에도 흔들린다고 신비감을 조장하지만 왜 흔들리는지 그 이유를 밝힌 글을 아직 읽어본 적이 없다. 금관은 왜 흔들리는가. 그 까닭을 한번 밝혀본다. 신라시대엔 금판을 펼 압판 롤러가 없었다. 때문에 망치로 때려서 방자처럼 폈다. 天工開物과 같은 솜씨로 얇은 금판을 폈지만, 망치로 맞은 부위와 맞지 않은 부위의 금판은 질량적 균형이 깨진다. 깨어진 질량적 불균형 때문에 금관은 아주 미세한 움직임에도 반응돼 영락이 하늘거리며 흔들리는 것이다. 신라 금관은 현재 총 6점이 출토됐다.

출토된 6점의 금관 개요는 다음과 같다. 금관 6점 중에서 최초로 발견된 금관은 1921년 출토된 금관총 금관이다. 금관총 금관은 내외관과 화려한 조익형(솔개의 날개 형태)이 결합된 완벽한 구조로 된 최고의 걸작이다. 이러한 금관의 용도에 대해서 이한상 교수는 葬送用이라고 발표해, 과연 금관이 장레용이냐 의례용이냐를 두고 한동안 설왕설래한 적이 있다. 이한상 교수는 다방면의 실증을 들어 장송용임을 입증하려 애썼으나, 필자의 견해는 금관은 최고 존자가 갖추는 의례용 관식임을 확신한다. 이에 대한 상술은 다른 기회가 있을 것이다.

大汶口文化 陶器 부호와 신라 금관의 조형적 유사성
끝으로 동이족단의 수령으로 새를 官名으로 삼았던 少昊 황제 때의 문화로 비정된 대문구문화 유지에서 출토된 도기 符號는 우리들의 비상한 관심을 끈다. 신라 금관과 형태적 유사성이 너무나 뚜렷하기 때문이다. 이 도기 부호의 자료도 사계에 제공되기는 처음이다. 대문구문화는 기원전 4300년에서 기원전 2500년 무렵에 산동성 거현 능양하 일대와 태안 대문구를 중심으로 일어난 신석기시대 후기에 속하는 동이족문화다. 대문구 도기 부호와 신라 금관의 연대 차이는 적어도 3000년 이상이 난다. 따라서 두 유물과의 관계성을 거론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인 줄을 알지만, 신라 금관이 5세기 무렵 김씨 왕조에서 출현하였고, 그들 스스로 “少昊 金天씨의 후예이므로 姓을 金씨라 한다”(김유신 碑 / 『삼국사기』 권41) 라는 기록을 유의한다면, 금관의 시원적 조형으로 인식할 만큼 형태가 유사한 소호시대의 대문구 도기 부호를 그냥 지나치기에는 어려운 일이라 하겠다.

[그림6]의 刻符들은 단순한 흥미 이전에 고대사회의 비밀스런 어떤 정보가 내장된 유물임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그 비밀의 해독은 소호족의 사유와 문화적 秘儀는 물론, 그들의 후예라고 밝힌 신라 김씨의 族源을 밝히는데도 무관치 않은 자료를 제공해줄 것으로 본다.

본회에선 금관의 기원이 시베리아 샤먼관이나 김알지 신화에 있다는 기존 학설에서 벗어나, 고동이족의 태양숭배와 새 숭배사상의 원류가 그 기원설이라는 새로운 사실을 밝혔다. 아울러 수지형, 녹각형도 나뭇가지나 사슴뿔로 보는 시각은 즉물적 발상이라고 판단하고, 그것은 태양의 심볼인 불꽃무늬가 점차 간결한 조형으로 디자인적 진화를 거친 다음의 형태임을 거듭 주장했다. 신라 금관의 기원과 상징세계는 이 짧은 지면에 그 내용을 다 담기는 어렵다. 금관모와 조익형에 대한 상징 해석과 금관과 佛像 寶冠과의 관계성 검토 등은 다른 기회로 미룰 수밖에 없다.

□ 김양동 교수의 ‘한국 고대문화 원형의 상징과 해석’ 연재는 필자의 ‘성철스님 열반 20주기 특별 개인초대전’(서울서예박물관, 해인사 성보박물관) 관계로 10월 7일자부터 다시 이어집니다.

김양동 계명대 석좌교수·서예가 ydk629@km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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