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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시기를 살아온 老學者, ‘민족의 성공’을 기원하다
격동의 시기를 살아온 老學者, ‘민족의 성공’을 기원하다
  • 김일평 코네티컷대 명예교수
  • 승인 2013.08.14 10: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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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평 교수 회고록(마지막회) 나의 중국연구와 중단없는 학문의 길

"타인과 다른 점을 인정하고, 그들의 인격을 존중하는 것이 바로 성공하는 사람들의 특징이다. 한국인은 여러 인종의 민족이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미국의 이민사회에서 성공한 민족이라고 역사는 기록할 것이다. 배타적인 사고방식을 버리고 인종간의 조화를 이룰 수 있는 한민족으로서 살아갈 수 있다면 우리 한민족은 미국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성공한 민족이라고 존경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연재글로 나의 회고록도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된다. 긴 시간이었지만 돌아보면 한순간 주마등처럼 지나가버린 삶의 순간들이었다. 그렇지만 그런 삶의 순간들 속에서도 반짝거리는 인생의 의미는 충만했다고 생각한다. 회고록을 연재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다시 이야기를 거슬러 올라가야 겠다.

1953년 9월에 미국에 유학 올 때 나의 첫 번째 목표는 서울대에 입학했다가 1950년 6월에 발생한 한국전쟁 때문에 다하지 못한 학업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비극적인 전쟁은 한반도의 청년들에게 그랬듯이 나의 운명마저 바꿔놓고 말았던 것이다. 나는 미군 제8군사령부에서 통역 겸 행정보좌관으로 근무한 경험이 있다. 그 후 나는 대한민국 육군연락장교 제7기생 모집에 응모해 소정의 훈련을 받은 후 대한민국 육군 중위로 임관했다. 나는 6·25 전쟁 당시 한국육군의 장교로서 미국의 장교들과 함께 북한의 군사정보와 중공군의 북한개입에 관한 문헌을 자주 접할 수 있었다. 특히 중공군에 관한 책이나 글은 비록 번역판이었지만 많은 내용을 살펴볼 수 있었다. 이것이 훗날 나의 학문적 관심과 학자의 길을 예비했다고도 볼 수 있다.

학자의 길을 예비한 운명

앞의 회고록에서 거듭 밝혔듯 미국으로 건너온 나는 켄터키주의 애스베리 대학에서 학부를 끝마친 후 뉴욕의 콜럼비아 대학원에 진학했다. 콜럼비아대 대학원에 다닐 때 중국문제에 관심이 많았고, 또 1949년 중국인민공화국이 수립된 이후의 중공에 관해 공부하고 싶은 생각이 컸다. 공부를 하려면 중국어부터 습득해야 했다. 마음을 굳힌 나는 중국어 즉 만더린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중국어를 공부한다는 것은 재정적인 뒷받침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다행스럽게도 나는 국방장학금(National Defense Educational Act Fellowship)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중국어와 러시아어를 함께 공부할 수 있었다. 국방장학금을 신청하기 위해서 중국어 선생을 비롯해서 대학원 교수 두 명의 추천서가 필요했다. 처음 중국어를 배우기 시작했을 때 로레타 판(Loretta Pan)이라는 중국인 여자선생이 추천서를 잘 써 줘서 국방장학금 (NDFL)을 받을 수 있었다. 좋은 여건이 이렇게 ‘행운’처럼 찾아왔기 때문에 나는 밤에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고, 전적으로 공부에 전념할 수 있었다. 대학원 시절 나는 중국어와 중국역사, 중국정치와 중국외교사 강의에 등록하고 현대중국에 관한 책을 많이 더 넓게 접하면서 제대로 된 중국 연구를 하고 싶은 학문적 갈망으로 가득했다.

그렇다고 마냥 순탄하게 공부만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콜럼비아 대학원에서 중국문제를 연구하고 있을 때 찾아온 애로사항도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중국어를 미국학생들과 함께 공부할 때 나는 漢字를 많이 알고는 있었지만 중국식 어휘를 나열(표현)하는 방법과 발음 면에서 곤혹을 치러야 했다. 한국에서 배웠던 한자와 발음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중국어를 가르치는 판(潘)여사는 매우 엄격한 선생이었다. 내가 한자를 알고는 있지만, 미국에서 사용하는 한자의 나열법이나 발음은 한국이나 일본에서 쓰는 어휘 나열 방법, 발음과는 다르다는 것을 그녀는 강조했다. 판 여사는 내가 미국학생들과 똑같이 중국어 기초지식부터 배워야 한다고 조언했지만, 나는 이미 한자를 千字이상 알고 있는데 왜 더 공부하라고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중국식으로 발음하고 중국식으로 중국어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기초지식부터 배우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어찌나 화가 났던지 중국어 공부를 집어치울까도 생각했다. 그러나 다른 도리가 없었다. 중국어를 제대로 해야 다음 공부의 수순을 밟을 수 있었기에 나는 할 수 없이 판 선생이 시키는대로 따라 가야 했다.

그렇게 중국어를 2년 동안(4개 학기) 배운 후 나는 어느 정도 입이 트였다. 중국 <人民日報>와 <紅旗>와 같은 중국간행물을 콜럼비아대 동아시아도서관(East Asian Library)에서 읽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코스워크가 다 끝나고 중국어와 러시아어의 어학시험도 패스했다. 이제 박사학위 논문 준비에 들어가기만 하면 됐다. 내가 박사학위 논문을 쓰기 시작할 때에는 중국공산주의 운동과 중국의 정치에 관한 연구는 이미 상당한 수준(레벨)에 도달해 있었다. 따라서 다른 대학원생이 쓰지 못한 분야에 대한 박사학위 논문을 써야만 박사학위 논문심사에서 유리하고, 또 책으로도 출판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았다. 미국에서는 박사학위 논문이 대학출판사에서 출판되느냐에 따라 그의 학문적인 명성이 결정된다. 그리하여 나는 중국공산당 운동의 江西 소비에트時代(1928~1934)에 관한 논문을 쓰는 것이 어떻겠냐는 주임교수 도크 바네트 박사의 조언에 따랐다.

박사논문 출판이 가져다 준 기회들

중국 강서 소비에트 시대는 1924년에 중국공산당과 국민당이 國共合作을 하고, 1927년에 파탄이 나기 시작해 중국 국민당이 중공군을 토벌할 때 국민당의 국부군이 강서성 소비에트 기지를 포위하고 공격해 공비소탕전을 전개하던 시기를 말한다. 당시 중국의 국부군 사령관이었던 첸청(陳誠) 장국이 중공군 포위작전으로 강서소비에트 기지를 압박, 제1차부터 제5차에 걸쳐 포위작전을 진행하는 동안 공산당으로부터 다량의 문서를 노획했는데, 국민당 정부에서는 이를 ‘陳誠文庫’라고 불렀다. 진성문서는 이후 대만의 칭단에 보관돼 왔다. 내가 눈독을 들인 자료는 바로 이 진성문고였다. 나는 칭단에 있는 국민당 비밀문서 보관소를 방문해 강서시대의 공산당문헌을 열람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대만대학의 대학원에서 중국역사를 연구하고 있던 박일근 교수(대만대학 유학생)가 많은 도움을 줬다. 진성문고는 후에 미국의 학자들을 위해 ‘마이크로 필름’으로 중국서적이 있는 도서관에 보급됐기 때문에 나의 박사학위 논문을 보완 수정해 학술서적으로 출판할 때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었다.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미국에서는 박사학위 논문이 책으로 출판되느냐 안 되느냐에 따라서 학자의 미래가 결정된다. 나는 나의 박사학위노문을 보완 수정해 가주대학 출판사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에서 출판했기 때문에 중국전문가이자 정치학자로 미국 학계에 인정받을 수 있었다. 또 인디애나대와 콜럼비아대에서 중국정치와 외교 과목을 가르칠 수 있었던 것도 역시 이 학위논문 출판의 힘일 것이다. 미국의 학문 풍토라고 할까, 박사학위 논문의 대학출판부 출판 여부에 따라서 테뉴어(종신교수직)도 결정되고, 또 학자로서의 위치도 측정할 수 있다는 게 보편적 시각이다.

박사학위논문이 책으로 출판되면서 학자로서의 나의 신분에 미묘한 변화가 찾아왔다. 인디애나대 정치학과에서는 나의 박사학위논문이 가주대학 출판부에서 출판된다는 소식을 듣고 조교수에서 부교수로 진급시켜줬으며, 동시에 테뉴어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아주 좋은 제안이었지만, 내 마음은 흔들리고 있었다. 코네티컷주립대(University of Connecticut)에서 중국정치와 외교정책을 가르치는 교수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 정보를 내게 전해준 사람은 코네티컷주립대 역사학과의 중국역사교수인 허만 매스트였다.

그는 내게 전화를 걸어 코네티컷주립대로 옮길 생각이 있냐고 물었다. 코네티컷주립대로 옮기면 부교수로 진급시켜줄 뿐만 아니라 테뉴어(종신교수직)까지 줄 수 있다고 했다. 인디애나대에서 받는 연봉의 2배나 되는 급료도 솔깃했다. 상황은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코네티컷주립대측으로부터 인디애나에서 코네티컷주의 수도 하트포드까지 왕복여행을 할 수 있는 항공표를 급행우편으로 보낼 것이니 직접 방문해 면접을 하라는 연락이 왔던 것이다. 나는 매우 주저했으나 도서관학 석사를 받고 직장이 마땅치 않은 나의 처 정현용 박사의 취업가능성도 있다는 제안에 코네티컷주립대로 옮기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나는 가족(나의 처 현용, 장녀 애련이, 그리고 차녀 금련이)를 설득해 뉴욕에서 2시간 거리에 있고, 또 동부에 있는 코네티컷주립대로 옮겨갔다. 1970년 봄 학기 강의가 끝나고 6월에 인디애나대를 떠나서 장장 12시간의 자동차 드라이브 끝에 코네티컷주립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나는 1970년 가을 학기부터 코네티컷에서 가르치기 시작했다.

코네티컷에서의 새로운 출발

코네티컷주립대로 옮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엄마가 도서관학 석사학위를 공부하는 동안 장녀 애련이를 서울의 어머님에게 맡기고 있었는데, 이제 다시 미국으로 데려오는 문제가 큰일이었다. 때마침 셋째 처제인 정명자가 이화여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펜실바니아주립대의 로버트 오리버(Robert T. Oliver) 박사의 지도하에 석사학위를 공부하기 위해 미국에 오는 기회가 마련됐기 때문에 애련이를 데려오는 문제는 쉽게 풀렸다. 우리 가족은 이삿짐을 코네티컷으로 보내고, 승용차에 가족을 태우고, 3일 동안 운전을 한 후 드디어 코네티컷주로 이사했다. 1970년 가을부터 코네티컷주립대의 교수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우리 장녀인 애련이는 매우 문학적이 재능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머나먼 길을 떠나서 중간에 2박하고 3일 동안 무사히 코네티컷 주에 도착한 내용을 여행기로 쓰기도 했다.

나는 코네티컷주립대로 옮긴 후 콜럼비아대에서 매달 한 번씩 열리는 ‘중국세미나(China Seminar)’에 참석했다. 또 하버드대의 ‘동아시아’ 교수 세미나에도 참석할 수 있었다. 이 때가 나의 교수생활에서 제일 활동적이고 학술논문 발표도 왕성했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논문발표 등 학술 활동 기회는 동북부 지역에 있는 코네티컷주립대로 옮긴 후 더욱 활발해진 것이다. 그리고 뉴욕의 한인회 행사와 한국인 문화행사에도 참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한편 정현용은 코네티컷주립대에서 교육학으로 박사학위(Ph. D.)를 마치고 부근의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도서관 관장으로 30년간 근무한 후 은퇴했다. 우리의 인생항로에서 코네티컷 주의 생활은 그 어느 시기보다 매우 행복했다. 지금 돌이켜본다면, 학자로서 개인적 명성도 의미 있었지만, 조국의 많은 후학을 길러냈다는 자부심도 이 시기에 가장 컸다고 고백할 수 있을 것이다. 20여명에 가까운 한국 유학생을 우리 대학원에서 석사(M.A.)와 박사(Ph. D.) 학위를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으며, 학위를 받은 후 이들이 한국의 여러 대학과 연구소에서 근무하고 있는 것을 볼 때, 교육자의 긍지를 다시한번 느낄 수 있었다. 나의 회고록은 나의 80 평생의 기록이다. 나의 인생의 동반자인 정현용 박사에게 이 회고록을 증정한다.

마지막으로 나는 위대한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Arnold Toynbee)의 경구를 인용하고자 한다. 토인비는 명저 『역사의 연구』에서 “교만한 민족과 나라는 반드시 그 다음에는 패망한다”라고 역설한 바 있다. 교만과 배타성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반드시 고쳐야할 것들이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모든 것을 다 수용할 수 있는 사유와 생각의 개방성이라고 할 수 있다. 타인과 다른 점을 인정하고, 그들의 인격을 존중하는 것이 바로 성공하는 사람들의 특징이다. 한국인은 여러 인종의 민족이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미국의 이민사회에서 성공한 민족이라고 역사는 기록할 것이다. 배타적인 사고방식을 버리고 인종간의 조화를 이룰 수 있는 한민족으로서 살아갈 수 있다면 우리 한민족은 미국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성공한 민족이라고 존경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끝>

 

*<교수신문> 인터넷판으로 연재된 김일평 교수의 회고록에 성원을 보내주신 많은 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김일평 교수의 회고록은 곧 단행본으로 출간할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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