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朱子와 다른 해석으로 斯文亂賊 몰려 … 實質 숭상한 사상 담아
朱子와 다른 해석으로 斯文亂賊 몰려 … 實質 숭상한 사상 담아
  • 교수신문
  • 승인 2013.07.29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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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전번역원-교수신문 공동기획 ‘고전의 숲’5. 『국역 西溪集』

 

▲ 국역 서계집|박세당 지음|강여진, 공근식, 김낙철, 최병준 옮김|김민족문화추진회|1994~2002
識者 중에 ‘斯文亂賊’이란 말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斯文’을 어지럽힌 흉악한 자라는 말인데, ‘사문’은 시대의 올바른 학문이라는 뜻으로 조선사회에서는 공자 사상을 구현하는 유가의 경전을 가리킨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볼 때 조선 중기 이래의 사회에서 사문난적으로 규정하는 기준에서의 ‘사문’은 공자의 사상이 아니라 유가의 경전을 성리학적 사고 체계로 정리한 宋나라의 학자 朱熹의 사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후의 사회에서는 공자 사상의 하나의 해석 방법에 불과한 성리학이 종교화돼 조금의 비판도 용납되지 않는 경직된 사회였다. 절대 가치인 종교에 대한 비판은 그에 따르는 혹독한 박해 내지 위험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종교에 대한 반역자 즉 이단으로 규정이 되는 순간 서양 중세사회의 마녀와 같은 처형의 대상이 되고 마는 것이다.

경전 공부에 대한 대담한 발상 제시
이러한 무시무시한 죄명이 바로 사문난적인데, 사문난적으로 지목돼 관작이 삭탈되고 유배의 명에 처해진 인물로 西溪 朴世堂(1629~1703)이 있다. 박세당은 과연 사문의 이단이었을까. 그의 행적과 생각이 과연 어떠했기에 사문난적으로 지목됐던 것일까. 비판의 빌미를 제공했던 그의 경전 해석서인 『思辨錄』이 고스란히 남아있고, 그의 행적과 생각을 살펴볼 수 있는 그의 문집인 『西溪集』도 현존하고 있어 그의 실제 면모를 우리는 현재적 관점에서 객관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문집 전체와 『사변록』 중 四書에 해당하는 부분은 민족문화추진회(현 한국고전번역원)에서 번역해 한문을 해독하지 못하는 독자들도 어려움 없이 읽을 수 있게 됐다. “異端에 빠진 자들은 대부분 비슷한 내용을 빌려서 자기들의 간사한 말과 회피하는 말을 꾸미고, 前代의 典籍을 고수하기만 하는 자들은 꽉 막히고 오활하고 편벽되어 평탄한 길을 전연 몰랐으니, …… 지금 六經에서 탐구하는 방법이 대체로 모두 얕고 가까운 곳을 건너뛴 채 심오하고 심원한 곳으로 치달리며, 거칠고 소략한 것을 소홀히 한 채 정밀하고 구비된 것을 엿보고 있으니, 그 깜깜하고 어지러우며 빠지고 넘어져서 아무런 소득이 없는 것이 당연하다 할 것이다. …… 그러나 육경에 실린 말은 그 큰 줄기는 비록 하나지만 가닥은 천만 갈래이니, 이것이 이른바 ‘이치는 하나이나 생각은 백 가지이며, 귀결처는 같으나 가는 길은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절륜한 지식과 심오한 조예가 있더라도 오히려 그 旨趣를 극진하게 다해 미세한 부분을 놓치지 않을 수 없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여러 사람의 특장을 널리 모으고 작은 견해라도 버리지 아니한 뒤에야 거칠고 소략한 것이 유실되지 않고 얕고 가까운 것도 누락되지 아니해 심오하고 심원하며 정밀하고 구비된 육경의 大體가 비로소 온전해질 수 있는 것이다.”(권9 『通說』에 序하다) 『사변록』은 다른 이름으로 『통설』이라고도 했는데, 바로 그 서문의 일부다. 이 책의 저술의도를 살필 수 있는데, 경전은 내용이 심오해 여러 가닥으로 나뉘어 있으므로 하나의 의견만을 고수할 것이 아니라 여러 학자들의 특장을 모아야 하며, 그 방법에 있어서도 高遠해 이해하기 어려운 것만 집착할 것이 아니라 쉽고 가까운 것부터 살펴야 경전의 본 취지를 제대로 밝힐 수 있다고 했다. 지극히 당연한 생각이며 당연한 접근 방법으로 보이는데, 당시의 사회에서는 용납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나 박세당이 사문난적으로 지목돼 탄압받았던 이유를 학문적 폐쇄성보다는 정치적 대립에서 그 연유를 찾기도 한다. 당시에는 서인 노론의 영수였던 宋時烈의 생각이 사회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때다. 송시열과의 생각의 대립은 탄압의 대상이 됐던 것이다.

박세당은 공허한 이론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현실을 중시했기에, 의리와 명분을 강조했던 송시열의 생각과는 여러 면에서 대립점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당시 청나라에서 사신이 오면 신하들은 병자호란 때에 화를 당한 집안의 자손이라는 명분으로 왕의 수행을 거부하며 사직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송시열은 이를 淸議라고 인정했다. 그러나 박세당은 이에 대해 “세상에 至尊만 욕되이 청나라 사신을 접대하게 하고 자신은 면하기를 도모하는 청의가 어디 있단 말인가. 일종의 時論이 청의를 빌미로 고상하게 담론하고 거창하게 말하면서 군신의 의리가 중요하고 인륜이 무너지는 것도 모르는 것이 마침내 이러한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몹시 개탄스러운 일이다”라고 했다(권22 연보 36세).

송시열을 겨냥했던 당대의 비판적 지성
그리고 의견 차이에 따른 극단적인 사회적 논란은, 죽기 한 해 전에 저술한 李景奭에 대한 신도비명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이경석은 병자호란의 항복 문서격인 「三田渡碑文」을 작성한 인물인데, 송시열은 송나라가 금나라에 항복할 때 항복문서를 작성한 손적에 빗대는 등 그를 조롱하고 비난한 적이 있었다. 박세당은 이경석에 대한 신도비명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노성한 사람을 업신여기는 자가 있다면 천하의 일 가운데 이보다 더 상서롭지 못한 것이 없고 상서롭지 못한 일을 행하는 데에 과감한 자에게는 또한 반드시 상서롭지 못한 응보가 따르기 마련이다. 이는 하늘의 이치이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권12 영의정 白軒 李公 신도비명) 이 글이 알려진 뒤에 송시열의 문인 등을 중심으로 박세당에 대한 비난이 빗발쳤으며, 과거를 들춰 사문난적의 죄목을 만들었던 것이다.

권력에 영합하지 않고 사회 개혁을 주장한다거나, 화려함 이면에서 고생하는 일반 백성의 노고를 생각한다거나, 공허한 이론에 동의하지 않고 실질을 숭상한 모습은 문집의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溫泉에 隨駕할 때 옥당에 있으면서 논사한 차자」(권5)에서는 임금의 행차에 수레를 빨리 몰아 호위하며 따르는 병사가 지쳐 죽는 경우가 있으니 죽어가는 군졸을 생각해 수레를 모는 법도를 바꿀 것을 청했고, 「求言에 응하는 疏」(권5)에서는 백성들에게 가혹하게 세금을 거두는 문제를 제기하며 사대부들에게도 세금을 거둬야 한다고 했으며, 쓸데없는 비용을 줄이는 것을 궁중에서부터 솔선해야 함을 강조하는 등 사회 전반의 폐단을 지적하기도 했다. 그리고 「尹子仁에게 답하는 편지」(권7)에서는 老莊에게서도 취할만한 점이 있음을 역설하고 있어 폐쇄적인 당시 분위기와는 다른 그의 개방적인 사상을 엿볼 수 있게 한다.

그는 실제 『노자』와 『장자』의 주석서인 『新註道德經』과 『南華經註解刪補』를 저술하기도 했다. 그는 또 농사일의 전반을 다룬 『穡經』이라는 農書를 지었는데, 이 책의 서문(권7)도 문집에 실려 있어 농업에 대한 전반적인 생각을 엿볼 수 있다. 禮訟에 관해서는 「禮訟辨」(권7)을 통해 그의 견해를 살펴볼 수 있다. 75세로 일기를 마쳤으니 적다고는 할 수 없는 삶을 살았지만, 4세에 부친상, 21세에 모친상, 38세에 첫째 부인의 상, 50세에 둘째 부인의 상을 당했고, 58세와 61세에 연이어 두 아들마저 먼저 저 세상으로 보냈으며, 자신이 죽는 때인 75세에는 사문난적으로 지목돼 관직이 삭탈되는 등의 처벌을 받기도 했으니, 그리 순탄한 삶을 살지는 못했던 것 같다. 전체적인 그의 행적은 연보가 부록으로 실려 있어 참고할 만하다.


이정원 한국고전번역원·책임연구원
필자는 성균관대 한문학과 석사를 마쳤다. 현재 성균관대 고전번역 협동과정 석·박사 통합과정에 있으며, 한국고전번역원 문집번역실 책임연구원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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