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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마리 갈매기 소리가 들리는 집, 영감이 꽂히기 시작했다
만 마리 갈매기 소리가 들리는 집, 영감이 꽂히기 시작했다
  • 강봉룡 목포대 도서문화연구원장ㆍ사학과
  • 승인 2013.07.23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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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이야기 35 조선문인화의 성소 임자도

조선후기 유배지로 유명했던 전남 신안군 임자도에 우봉 조희룡 선생은 1851년부터 1853년까지 유배를 왔다. 어느 날, 바닷가를 비상하는 수많은 갈매기에 매료돼 자신의 집 이름도 ‘게딱지집’ ‘달팽이집’에서 ‘만구음관’으로 바꿨다. 임자도의 아름다운 자연풍광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그것을 서둘러 화폭에 담았다. 새로운 화법을 시도하기도 했는데, 이렇게 탄생한 그림이 ‘괴석도’(아래 그림)이다. 사진은 임자도의 고갯배와 갈매기 모습이다.
‘1004의 섬’이라 불리는 신안군은 섬이 많은 만큼 조선후기 유배지로 각광(?) 받았다. 그중 ‘흑산도-우이도’권과 ‘임자도-지도’권이 신안군의 양대 유배문화권을 이룬다. 먼저 흑산도에 유배 왔던 대표적 인물로는 손암 정약전 선생과 면암 최익현 선생을 들 수 있겠는데, 그들의 활동 반경이 흑산도와 함께 당시 소흑산도라 불렸던 우이도에 한정됐던 관계로, 흑산도와 우이도에 그분들의 유배생활의 흔적이 잘 남아있다.

임자도-지도권에 유배 왔던 대표적인 인물로는 임자도의 우봉 조희룡 선생(유배기간 1851~1853)과 지도의 중암 김평묵 선생(유배기간 1881~1884)을 들 수 있다. 저명한 위정척사파 학자였던 중암의 지도 유배생활은 지도와 그에 인접한 임자도는 물론 전남 서남권 전역에 그의 지조 높은 유학의 풍을 확산시키는 계기가 됐다. 그리고 저명한 문인화가였던 우봉의 임자도 유배는 임자도를 조선문인화의 성소로 각인시키는 계기가 됐다.

우봉 조희룡이 임자도 유배형에 처해진 것은 1851년 9월, 해배된 것은 1853년 3월이니, 그의 유배기간은 햇수로는 3년이지만 실제로는 19개월에 불과했다. 그가 63세의 늦은 나이에 임자도 유배형에 처해진 것은 추사 김정희와 맺은 각별한 친분이 빌미가 됐다. 세도정치가 판치던 혼돈의 시대에 강직한 정치적 신념을 견지했던 추사에겐 정적이 많았고, 그런 만큼 추사는 수차례 유배형에 처해졌다. 우봉의 임자도 유배형은 ‘추사의 무리’로 분류돼 ‘도매급’으로 처해진 것이었다.

추사와 우봉은 추구하는 바가 달랐다. 추사는 선비의 이상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남종문인화를 중국으로부터 도입해 혼돈의 시대에 선명한 이념을 제시하는 지표로 삼았다. 남종문인화는 ‘서권기(書卷氣)’, ‘문자향(文字香)’의 표어를 앞세워, 선비의 지조를 표현한 글(詩)을 염두에 두고 이를 간략한 그림(畵)으로 그려, 기개어린 글씨(書)로써 이념을 함축한 시를 그림에 기입해 넣는 화법을 전형으로 하여, 흔히 ‘시서화(詩書畵) 삼절’이라는 말로 압축되곤 한다.

우봉은 이러한 ‘시서화 삼절’의 남종문인화 화법은 수용하되 추사의 이념적인 그림 그리기에는 따르지 않았다. ‘남의 뒤를 추종하지 않는다’는 뜻의 ‘불긍거후(不肯車後)’를 삶의 지표로 삼았고, 양반뿐만 아니라 중인층과 교류하면서 자유분방한 창조적 예술세계를 추구했다. 추사가 추구한 ‘서권기’, ‘문자향’의 이념 대신에 그림 솜씨(기량)를 강조하는 ‘수예론’과 예술을 즐긴다는 ‘유희론’을 내세웠다.    

이처럼 추사와는 예술적 추구가 달랐고 평소 정치에 뜻을 두지도 않았던 우봉으로서는 ‘추사의 무리’로 분류돼 임자도 유배형에 처해진 것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런 만큼 그의 초기 유배생활은 억울함과 우울함으로 가득 찼다. 그의 거소는 임자도 남쪽 해변의 이흑암리에 있었는데, 그가 이곳에 황토로 지어진 초라한 움집을 ‘게딱지집(蟹舍)’, ‘달팽이집(蝸廬)’이라 부르곤 했던 것은, 이러한 그의 암울한 처지를 대변해 준다. 대나무 그림을 그려놓고 ‘노여운 기운으로 대나무를 그린다’는 ‘노기사죽(怒氣寫竹)’을 제목으로 붙인 것은 암울함을 넘는 그의 분노의 심정을 표현한 것이다.

우봉 조희룡 선생의 '괴석도'
그러나 마냥 절망에 빠져있을 수만은 없었다. 어느 날 문을 박차고 나와 바라본 이흑암리 남쪽 바다는 너무도 아름다웠다. 바닷가를 비상하는 수많은 갈매기에 매료돼, 문득 자신의 집 이름을 ‘게딱지집’, ‘달팽이집’에서 ‘만 마리 갈매기 소리가 들리는 집’이라는 의미의 ‘만구음관’으로 바꿨다. 그랬더니 임자도의 아름다운 자연풍광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그것을 서둘러 화폭에 담았다. 산 위에 드러나 있는 바위에 영감이 꽂혀 이를 그리면서 새로운 화법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래서 탄생한 그림이 ‘괴석도(怪石圖)’이다.

어부들의 고기 잡는 모습을 신기하게 관찰하기도 하고, 용이 바다에서 승천했다는 주민들의 이야기에 매료되기도 했다. 용이 꿈틀거리듯 승천하는 형상으로 매화를 그려 ‘용매도(龍梅圖)’라 명명한 것은 임자도의 사람들과 자연이 그의 예술적 영감을 자극해서 만들어낸 하나의 예이다. 그는 찾아온 섬 젊은이 홍재욱, 주준석 등을 제자로 받아들였고, 뜻밖에 섬에도 선비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삼두리의 선비 최태문을 찾아가 바다와 같은 큰 학문을 기대한다는 의미로 ‘학해당(學海堂)’이라는 당호를 지어 써주기도 했다.

그의 임자도 생활은 몇몇 저서를 집필해 그의 인생을 집대성하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다. 임자도에서 새롭게 터득한 화론을 정리한 『화구암난묵』, 유배기간 동안 지우들에게 쓴 편지를 모아 성책한 『수경재해외적독』, 그가 평생 그린 그림의 화제(畵題)를 모아 엮은 『한화헌제화잡존』, 그리고 유배에서 해배까지 그의 심경을 시로 정리한 『우해악암고』 등이 그것이다. 짧다면 짧은 19개월의 임자도 생활은 이렇듯 말년을 맞았던 우봉에게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새로운 삶을 설계하게 한 의미 있는 시간이었던 것이다.        

조선 후기 암울한 혼돈의 시기에 중국에서 남종문인화의 화법을 도입해 새로운 시대적 기풍을 진작시키려 했던 추사의 이념적 선비정신은 분명 하나의 문화사적 봉우리를 형성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함께 남종문인화의 화법을 수용하면서도 이념에 매몰되지 않고 자유분방한 예술혼을 추구했던 우봉의 실험적 예술정신은 그 시대를 대변하는 또 하나의 문화사적 봉우리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추사의 남종문인화는 진도 출신의 그의 제자 소치 허련에 의해 진도 운림산방에서 꽃피워졌고, 우봉의 화풍은 그가 직접 임자도와 만나는 경험을 통해서 ‘남종문인화’를 재해석한 ‘조선문인화’로 승화됐다고 할 수 있으니, 그런 면에서 임자도의 만구음관은 진도의 운림산방과 함께 한국 문인화의 양대 봉우리(남종문인화와 조선문인화)를 섬에서 솟구치게 한 진귀한 사례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임자도가 조선문인화의 성소로 재탄생한 내력이다.

강봉룡 목포대 도서문화연구원장ㆍ사학과

지난 2012년 4월18일부터 연재를 시작한 ‘섬 이야기’는 이번 회를 마지막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섬과 바다’를 연구하고 있는 목포대 도서문화연구원 11명의 HK(연구)교수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호응해 주신 독자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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