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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의 자유로운 영혼이 남긴 ‘글과 道’
17세기의 자유로운 영혼이 남긴 ‘글과 道’
  • 교수신문
  • 승인 2013.07.15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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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전번역원-교수신문 공동기획 ‘고전의 숲’4. 『국역 谿谷集』

 

▲ 국역 계곡집|장유 지음|이상현 옮김민족문화추진회|1994~2002
1623년 3월 인조가 광해를 廢黜하고 왕위에 오른다. 속히 종묘사직을 안정시키기 위해 폐서인이었던 昭聖貞懿王大妃는 광해군을 폐위한다는 교서를 내리고, 인조는 교화를 펼치기 위해 대사면령을 적은 교서를 내린다. 이런 긴박한 상황 속에서 교서를 지어 올려 민심을 수습할 책임을 맡았던 인물이 바로 谿谷 張維(1587~1638)다. 그는 李廷龜·申欽·李植 등과 함께 漢文四大家로 일컬어지는 최고의 문장가다. 졸하기 직전까지도 글을 쓸 정도로 많은 저술을 남겼고, 스스로 글을 정리해 놓는 일에도 힘을 기울였다. 계곡 장유는 32세이던 1618년(광해군 10년)에 약간의 雜稿·詩文 등을 선별해 4권 분량의 문집을 편집하고, 「所稿 甲」이라고 제목을 붙였다.

 

앞으로 계속해서 저술을 정리해 갈 계획에서였다. 49세인 1635년(인조13년) 병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있으면서 다시 저술을 교정하고 문체별로 분류해 「溪谷草稿」를 엮었다. 그는 문집을 엮는 과정에서 어려서 지은 작품들을 불태워 버렸는데, 이를 통해 볼 때 그가 자신의 글에 대한 검열이 철저한 문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집안의 못쓰게 된 빗자루를 千金의 가치라도 있는 양 애지중지하는 것도 미혹된 일이지만 항아리 덮개용이라는 비난을 받을까 봐 편찬 작업을 그만두는 것 역시 식견을 가진 자가 할 일이 못 된다”라고 했다. 비록 자신의 작품이 대단하다고 내세울 만하지는 못해도 남들의 비난을 받을까 두려워 세상에 내놓지 않는 것 또한 지식인의 자세가 아니라고 본 것이다. 저자 사후 아들 張善이 「溪谷草稿」를 수습해 보충하고, 「谿谷漫筆」까지 붙여 完秩을 만들어서 인조 21년(1643)에 『谿谷集』을 간행했다.

마음에서 우러나온 글을 쓰다
계곡은 47세 되던 해에 대제학에 제수됐다. 당시 사직을 청하는 상소에서 말한 바대로 대제학은 문장의 권형[文衡]을 한 손에 쥐고 선비의 宗匠이 되는 위치에 있다. 또 文風을 진작하고 선비에게 바른 방향을 제시하고 외교 문서를 훌륭하게 작성해내는 자리다. 따라서 재주와 학식이 모두 넉넉하고 명망과 실제를 겸비한 자가 아니면 그 자리에 있을 수 없다. 계곡이 이런 최고의 문장가 반열에 오르게 된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문집에 실린 다음 몇 가지 사실을 통해 계곡이 최고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요체가 무엇인지를 살필 수 있다. 그가 쓴 草稿 自敍 가운데에는 다음의 내용이 있다.

“내가 상투를 틀면서부터 문필에 종사하여 어느덧 머리가 희끗희끗한 나이가 됐다. 세상에서 문인이라 불리는 자들은 대부분 스스로 뻐기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나는 실제로 질박하고 촌스럽다. 작품이 한 편씩 이루어질 때마다 사람들은 괜시리 칭찬했지만 옛사람들의 작품을 놓고 찬찬히 비교해 보면 늘 허전해 망연자실해지곤 했다.” 그가 古文을 법도로 삼아 자신이 쓴 글을 끊임없이 점검했던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또 「八谷集序」에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옛날 성대했던 시절에는 글을 전공하는 인사들 대부분이 經學에 근본을 두고 이치를 살피고 뜻을 전달하는 것을 위주로 삼았다. 그래서 그 글의 성격이 대체로 평이하고 솔직했으며 표현은 부족해도 뜻은 넉넉했다.

그런데 수십 년 전부터는 학자들이 정상적인 것은 싫어하고 새로운 것을 좋아해 기이하고 별난 습관에 많이들 젖어들었다. 그러다 보니 화려하게 꾸미는 풍조는 날로 기승을 부리고 참되고 질박한 풍조는 하루가 다르게 쇠퇴해 갔다. 그 말을 언뜻 들어 보면 唐·宋 시대를 앞질러 올라가는 것같이 보이지만, 찬찬히 살펴보면 치자나무 가지에 밀랍을 칠해 광택을 낸 것에 불과할 따름이니, 글의 폐단이 극에 달했다고 하겠다.” 이와 함께 友人 박미는 『계곡집』 서문에서 계곡과의 일화를 인용했는데, 그 가운데 나온 계곡의 말이 다음과 같다. “글은 곧 말이니, 말이 마음에서 우러나와 글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글을 지어도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면 그것은 제대로 된 글이 아니다.”

이를 통해 계곡이 글을 쓰면서 마음에서 우러나온 뜻을 진실하게 전달하는 것을 중시했다는 것과 겉으로 화려하게 꾸미는 풍조를 매우 경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계곡은 정신이 맑고 기운이 평온했으며 지혜는 원만하고 행동은 방정해 그야말로 겸허하기 짝이 없는 유덕군자였다고 전한다. 그는 경서와 성리서에 뿌리를 두고, 만년에는 제자백가의 글을 음미했으며, 그밖에도 도가·불가·醫卜·풍수지리 등 다방면에 걸쳐 관심을 두었다. 『계곡집』 원집 뒤에는 208가지의 단편을 모은 만필 2권이 실려 있는데, 「계곡만필」은 그가 집 안에서 병을 치료하며 지내는 동안 틈나는 대로 적은 글이다. 스스로는 이 글에 대해 모두 쓸데없는 말들이고 道聽塗說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다양한 분야에 대해 다루고 있고, 들은 사실에 대한 眞僞나 내력을 적거나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있어 저자가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을 잘 알 수 있는 부분이다.

有德君子의 개방적인 학문 성향
「계곡만필」에는 주자의 경전 해석에 문제를 제기하는 글, 古韻에 관한 글, 국가의 흥망에 관한 글, 자연 현상에 대해 고찰한 글, 좋은 문장에 관한 견해를 적은 글, 중국 철학가에 대한 비평, 和議와 관련한 이야기, 제도나 칭호에 관한 의론, 官司 명칭이나 관직의 연혁에 관한 글, 서적 내용의 오류에 관한 글 등이 실려 있다. 그 가운데는 우리나라의 경직된 학풍에 대해 비판한 글도 있다.

 “중국의 학술은 다양하다. 正學[儒學]이 있는가 하면 禪學과 丹學이 있고, 程朱學을 배우는 이가 있는가 하면 陸象山을 배우는 이도 있어 학문의 길이 한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경우는 유식한 자건 무식한 자건 책을 끼고 다니며 글을 읽는 자들을 보면 모두가 程朱만을 칭송할 뿐이어서 다른 학문에 종사하는 자가 있다는 말을 들어 보지 못했다. (중략) 이를 비유하자면, 땅을 개간하고 나서 씨를 뿌려야만 이삭이 패고 열매를 맺어 五穀과 제비(돌피와 쭉정이)를 구별해 낼 수 있게 되는 것과 같다.

아무것도 없는 맨 땅을 놓고서야 무엇을 오곡이라 하고, 무엇을 제비라 할 것인가?” 씨를 뿌린 후에야 오곡과 피를 구별할 수 있다는 비유를 들어 여러 학문 분야에 대해 개방적인 태도를 지녀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계곡집』은 정주학 중심의 사상의 틀을 요구하던 분위기 속에서 자기중심을 지키며 자유롭게 사유했던 지식인의 글과 학문을 살필 수 있는 책이다. 국역 『계곡집』은 한국고전번역원 수석 연구원으로 정년퇴임한 李相鉉 선생이 『한국문집총간』 92집 수록 『계곡집』을 저본으로 번역했다. 번역서 5책에 색인(해제) 1책으로 모두 6책이다. 깔끔한 번역과 상세한 주석으로 원전에 다가서는 길을 친절하게 열어 주었다.

 

하승현 한국고전번역원 역사문헌번역실 선임연구원
필자는 민족문화추진회 국역연수원 연수부와 상임연구부를 수료했다. 주로 영조대, 고종대 승정원 일기를 번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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