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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롱 양단 호박단 신무늬 … 재현 상품이 된 ‘도떼기’ 시장의 추억
나이롱 양단 호박단 신무늬 … 재현 상품이 된 ‘도떼기’ 시장의 추억
  • 교수신문
  • 승인 2013.07.15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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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한국을 만든 40곳 26_ 부산국제시장

근현대 한국을 만든 40곳 목록
장충단공원, 명동·충무로 일대, 남산, 서울시의회 건물, 경복궁(광화문)일대, 덕수궁(정동), 서대문형무소, 탑골공원, 천도교 중앙대교당, 군산항, 부산근대역사관, 광주일고, 상하이 임시정부, 만주, 서울역, 경무대·청와대, 경교장(현 강북삼성병원), 이화장, 서울대(동숭동·관악), 부산 항구, 목포항, 소록도, 인천항, 제주도, 판문점·휴전선, 부산 국제시장, 거창, 지리산, 용산, 매향리(경기도), 여의도광장(공원), 마산(현 창원) 바다, 4·19국립묘지·기념관, 명동성당, 광주 금남로·전남도청, 울산 공단, 포항제철, 경부고속도로, 청계천·평화시장, 구로공단

▲ -1950년대의 부산국제시장과 오늘날의 부산국제시장. 사람은 달라졌지만, 풍경은 그대로다.

미군헌병(M.P)과 한미합동수색대의 불법 유통물품 단속, 박정희 정권 때 치안유지를 목적으로 한 대대적인 노점상 철거정책, 크고 작은 화재로 인해 잿더미로 남겨졌던 이곳. 그러나 七顚八起의 굳센 의지로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나는 ‘억척 아낙네들’의 국제시장은 피란민의 치열했던 생애사가 고스란히 녹아있는 곳이다. 또한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겪은 아픔과 생채기를 통해 역사적 성장을 이룬 대표적인 도시로 부산을 꼽는다면, 그 부산의 일면을 가장 날것 그대로 보여주는 곳이 바로 이곳 국제시장이다. ‘도떼기’시장으로 불렸던 이곳은 1948년에 1층의 목조 건물 12동을 세우고 해방의 영향인 듯 ‘자유시장’이라는 이름으로 개장했다.

미군헌병(M.P)과 한미합동수색대의 불법 유통물품 단속, 박정희 정권 때 치안유지를 목적으로 한 대대적인 노점상 철거정책, 크고 작은 화재로 인해 잿더미로 남겨졌던 이곳. 그러나 七顚八起의 굳센 의지로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나는 ‘억척 아낙네들’의 국제시장은 피란민의 치열했던 생애사가 고스란히 녹아있는 곳이다. 또한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겪은 아픔과 생채기를 통해 역사적 성장을 이룬 대표적인 도시로 부산을 꼽는다면, 그 부산의 일면을 가장 날것 그대로 보여주는 곳이 바로 이곳 국제시장이다. ‘도떼기’시장으로 불렸던 이곳은 1948년에 1층의 목조 건물 12동을 세우고 해방의 영향인 듯 ‘자유시장’이라는 이름으로 개장했다.

그러나 이후 미군이 진주하면서 미국산 물품이 이곳에 나돌게 되자 미국산, 일본산, 국내산 물품들이 한데 집결되고, 규모 또한 커져 ‘국제’가 더 적합하다해서 ‘국제시장’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950년에는 한국전쟁으로 인해 전국에서 몰려든 피란민들이 이곳에서 장사를 하게 되면서 숱한 사연들을 품은 상징적인 공간이 된다. 이들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 일본에서 온 귀환동포와 기존의 부산상인들과의 경쟁, 그리고 이른바 ‘도떼기 어깨’라는 불량배들과 단속을 나온 官의 시선을 피해 다니며 생존경쟁에 뛰어들었다.

귀환동포와 부산상인들의 애환
원래 이곳은 일제가 미군의 폭격에 대비해서 만든 공터인 ‘疏開’터였다. 해방이 되자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짐 꾸러미들을 경매에 부치면서 즉석으로 도깨비시장이 만들어졌다. 일본인이 돌아가고 뜸해지자 이번에는 귀환동포들이 고향 갈 노자마련을 위해 일본물품을 판매하면서 시장의 형태를 유지했다. 그렇지만 이곳이 급격하게 활기를 띄게 된 결정적 이유는 전쟁으로 인해 전국에서 몰려온 피란민들에 의해서였다. 각종 UN군용물자와 구호물자, 미군 부대에서 나온 통조림, 의류, 청과, 양곡들과 일본 대마도, 홍콩과 마카오 등지에서 들여온 각종 밀수품은 그야말로 국제적인 전시장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밀수품의 거점지 역할을 했던 이곳에서는 구하지 못하는 품목이 없었다.

카탈로그에 있는 물품을 주문하면 삼일 후에는 반드시 구해놓을 만큼 밀수조직이 탄탄했다. 암암리에 거래된 밀수품들은 서울을 비롯해 전국적으로 팔려나갔다. 특히 군용물자 가운데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군화와 군복은 불티나게 팔려나가는 품목이었다. 군복은 검정색으로 염색을 하거나 수선을 거친 후 시장에 나왔다. 여인들은 단속을 피하기 위해 한복 허리춤에 감추고 임신부 행세를 하며 시장에 내다 팔았다. 그나마 점포라도 있는 상점은 단속을 피해 문을 닫아버리면 그만이었지만, 노점 상인들은 벌금에 물건까지 빼앗기는 어려움을 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계를 위해서는 다음날 어쩔 수 없이 노점을 펼칠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 ‘다이’하나 없이 광목천으로 만든 전대에 놓고 장사를 하거나 몸에 지니고 돌아다니면서 장사를 했다. “단속 뜨면 잽싸게 튀어야 하니끼니 광목으로 된 전대 같은 데 초코렛이나 과자, 담배, 시레이숑 같은 걸 허리에 차고 잠바로 덮어 숨겼댔어. 잡히먼 물건 뺏기디, 붙들려 가디, 벌금까지 내야니 별 수 있간?”(김영준 깡통시장 김영상회 운영, 『굳세어라 국제시장』 中, 이상섭, 도요출판, 2010) 이곳은 불법과 부정 상거래로 인한 불량배들의 활개 속에서 소매치기들과 야바위꾼들로 인한 범죄와 사기, 상인들 간의 싸움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아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삶의 고단함과 억척스러움이 배어있는 생존을 위한 전쟁터였다. 「굳세어라 금순아」와 같은 노래가 그 시절에 나온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배고프고 힘든 나날을 희망이 담긴 가사와 경쾌한 곡조를 흥얼거리며 이겨내고 싶었으리라.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음식물 찌꺼기를 모아 끓여서 만든 ‘꿀꿀이죽’이라고도 불리는 ‘유엔탕’ 장사도 이 무렵 생겨났다. 꿀꿀이죽은 돼지먹이로 사용하기 위해 받아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지만 거기엔 소시지, 햄, 콩 등이 들어있어 그 시절 영양보충을 하기엔 훌륭한 음식이었다. 가끔 이쑤시개와 같은 이물질도 나옴에도 불구하고 없어서 못 팔 지경이었고 가격 또한 비싼 편이었다. 어려울 때마다 모습을 바꿔가며 이겨냈던 국제시장의 가장 큰 시련은 火災였다. 1952년 한 해 동안 490건의 화재와 355억 원에 이르는 피해액을 발생해 부산이 ‘불산’이라고 불리는 불명예도 안았다.

국제시장도 이 화마를 비껴날 수 없었다. 1950년대 7여 건의 크고 작은 화재 가운데 1953년 1월 30일 일어난 ‘국제시장대화재’는 1천6백동이 전소되면서 많은 이재민과 손해를 발생시킨 어마어마한 사건이었다. 널빤지로 만든 가게들로 빼곡하게 들어차 있어 불길이 순식간에 번져 손쓸 틈 없이 번져갔다. 그러나 이런 대형 참사도 우리 어머니 아버지들의 끈질긴 생명력을 이겨내진 못했다. 황무지로 변한 잿더미 가운데서도 이 곳 상인들은 복구를 위해 ‘국제시장복구대책위원회’를 조직하고 공사비를 부담했다. 7월 17일에 낙성식을 거행하고 2층으로 건축된 새 건물에서 다시 영업을 시행했다. 이곳은 참으로 거래할 수 없는 물품들이 거래되는 곳이고, 먹을 수 없는 음식이 만들어지는 곳이며, 잿더미에서 다시 일어서는 불굴의 의지를 가진 곳, 애환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긴 장소인 것이다.

1980년대 해외여행 자유화 이후 내리막길
이곳에서 오랜 기간 장사한 사람들이 기억하는 제1의 전성기는 자유당시절이다. 전쟁이후 허무주의로 인해 사치품의 수요가 늘어나면서 많은 이문을 남길 수 있는 밀수품들의 거래가 왕성해졌다. 또한 억척스러운 피란민들은 부산의 원래 상인들을 밀어내고 이 시장의 절반이상을 차지했다. 한일합섬, 동양 시멘트, 고려해운 등을 세운 회장들도 바로 이곳에서 기반을 마련한 거상이었다. 이후 1960~70년대에도 명절 때가 되면 남해, 거제의 도매상들이 배를 대절해와 사나흘씩 묵고 가면서 물건을 장만해 갔다.

인근의 마산, 창원, 울산, 포항, 대구에서도 물건을 떼러오는 상인으로 인해 발 디딜 틈 없이 복잡하고 활기찬 모습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 해외여행이 자유화 되면서 이곳에서만 구할 수 있었던 카세트나 카메라와 같은 전자제품이나 화장품 등은 희소성이 사라지면서 조금씩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런 역경에서도 이들은 삶의 방편을 찾는다. 이른바 ‘짝퉁’이라고 불리는 이미테이션 상품을 끌어들이고, 구제품과 안경, 한복, 그릇, 혼수품 등 다양한 물품들의 도소매로 소비자들의 발길을 붙잡았다. 그렇지만 지금은 대중매체로 인해 국내·외 여행객들에 의해 새롭게 소비되는 관광의 장소로 변모되고 있다. 먹자골목에서는 씨앗호떡, 비빔당면 등을 아무 데나 걸터앉아 먹는 관광객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그 옛날 피란민들이 생을 유지하기 위해 팔기도 하고 사먹기도 했던 그들의 삶의 애환이, 이제는 관광 상품화가 돼 그때의 모습과 비슷하게 재현되는 아이러니한 광경을 보이고 있다. “어서어서 오십시오/마음대로 골라보세요/나이롱 양단 호박단/신무늬 들어왔어요./(중략)/어서어서 오십시오/마음대로 골라보세요/비로도 양단 나이롱/신무늬 들어왔어요.”(1960년 발매, 황정자 노래, 「저무는 국제시장」) 흥겨운 가락과 어울려 외치는 이 소리들은 아직 구석구석에서 들려오는 듯 하건만, 그날의 ‘억척 아낙네’들은 이제는 모두 어디로 갔을까.

손은하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 HK연구교수
필자는 부산대에서 공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영상공학을 전공했으며, 대표 논문에는 「부산 원도심의 역사와 문화 색채 이미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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