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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로 세평] 덕수궁, 그 운명의 표정
[신문로 세평] 덕수궁, 그 운명의 표정
  • 김정동 목원대
  • 승인 2002.09.1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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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9-19 11:01:25
김정동
목원대·건축도시공학부

지금 미국대사관 측은 ‘貞洞洞域’에 대사관과 아파트 짓는 일을 강행하려 하고 있다. 그들은 ‘정동 그 자리에 그런 건물을 지어서는 안 되는 이유’에 대한 설명을 전혀 들으려 하지 않고 있다. 우리 정부도 관계기관 책임자 회의라는 것을 갖고 ‘잘 되는(?) 방향’에 대한 수순을 밟기 시작했다.

미국 측이 내놓은 미봉책은 아파트 신축을 위한 유물 지표조사이다. 그들은 아마도 덕수궁 터에서 아무런 유물도 안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 하다. 물론 경기여고 터(미국대사관 신축 예정지)는 그 동안 건물을 짓고 운동장을 만들며 대대적으로 훼손시켜 놓았기 때문에 유물이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현 미국대사관 내에 있는 부대사관저 지역은 표면만 ‘얼핏보기’를 해도 기왓장이 들려나오는 곳이다. 부대사관저 지역이 바로 아파트 예정지이다.

사실 유물이 나오고 안나오고는 문제의 본질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역사이고 문화다. 일제는 옛 경기여고를 지으며 흥덕전, 흥복전, 안선문, 순례문 등을, 덕수초등학교를 지으면서는 의효전(혼전), 유청문 등을, 그리고 미국대사관 부대사 관저 쪽에는 동양척식주식회사 사택을 지으며 선원전, 사성당, 혜성당 등을 헐어냈다. 광화문 네거리 쪽에서 드나드는 출입문이었던 영성문도 이때 함께 헐어버렸다. 영성문은 대한문에 버금가는 매우 아름다운 문이었다. 그 기간 동안 이곳에 있던 여섯 채의 전당과 네 개의 문을 헐어버려 덕수궁은 오늘과 같이 원래 규모의 3분의 1로 줄어든 것이다.

해방이후 덕수궁 주변 가운데 종로구청 소속 지역은 난삽한 건축물들이 자리를 차지해 조선시대 전통 건축물은 덕수궁을 빼놓고는 찾아보기조차 어렵게 됐다. 근대건축물들도 대부분 헐려나갔거나 헐릴 준비를 하고 있다. 지난 7월에는 러시아 대사관(구 배재학당 터)이 완공됐고 이어 캐나다 대사관(구 하남호텔 터)도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정동은 지금 주변 고층 건축물과 외교 건축물 문제로 심한 몸살을 앓고 있는 중이다.

문제는 경기여고가 강남으로 이사가면서 미국 측에 정동 땅을 빌려준 것에서 시작됐다. 당시 미국대사관 측이 요구했던 것은 한국일보 맞은 편 송현동 땅이었다. 그곳은 순종의 장인이었던 윤덕영의 사저가 있던 곳으로, 경복궁 종친부와 가까운 곳이었다. 소나무가 울창한 언덕길이어서 송현이라고 이름 붙일 정도로 매우 아름다운 숲을 가진 곳이었지만 이곳도 여지없이 일제가 파괴시켰고, 미국 대사관 숙소가 들어간 것은 해방 이후였다. 이곳이 청와대와 경복궁에 가까워 미국에 그냥 내 줄 수는 없었고, 궁여지책으로 넘겨준 곳이 경기여고 터다. 역사적 유적지가 동네 땅 넘어가듯 훌쩍 넘겨졌다. 정부 실책 중의 실책으로, 경기여고 부지가 ‘덕수궁 궁역’이었다는 사실과 ‘정동 동역’에 포함돼 있다는 것을 몰랐던 데서 나온 ‘무식의 소산’이다.

아파트 설계를 맡은 미국 건축가 마이클 그레이브스는 이 땅의 역사에 대해 전혀 무지한 상태에서 설계를 맡았다. 건물의 설계가 잘 됐는지 못 됐는지를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15층 짜리 대사관과 8층 짜리 아파트를 아무리 멀리 떨어뜨려 짓는다 해도 그곳은 옛 덕수궁의 일부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미국은 자신들의 대외적 얼굴인 미국대사관 관련 건물을 짓겠다 하면서, 정작 가장 존중해야 할 해당 국가의 전통과 국민적 자존심은 무시하고 있다.

우리가 내놓는 반대 의견은 장래 미합중국을 위한 일이 될 것이며 또한 우리 ‘대한민국’을 위한 일이기도 한 것이므로 당사자들에 귀기울여 줄 것을 간곡히 바라는 것이다. 미국대사관과 관저 아파트 신축문제는 역사에서 결코 가볍게 기록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단순히 ‘집 짓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소견으로는 미국 정부가 하루빨리 이 자리를 덕수궁으로 돌려주고 대사관을 인천공항과 가까운 한강변 한적한 곳으로 옮기는 것이 좋을 것이라 생각된다.

어쨌든 우리 정부가 지금 해야 할 일은 단순히 경기여고 터만 조사할 것이 아니라, 미국대사관을 포함한 정동동역 조사다. 미국대사관 일대는 우리 덕수궁의 중요한 부분으로, 우리의 역사로 복원해야 하며, ‘정동궁’으로 다시 돌아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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