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9 05:30 (금)
“100년 후에도 다들 내가 만든 옷 좋아할 거에요” 30년 獨學내공… ‘한복 대중화’ 앞장서기도
“100년 후에도 다들 내가 만든 옷 좋아할 거에요” 30년 獨學내공… ‘한복 대중화’ 앞장서기도
  • 윤상민 기자
  • 승인 2013.07.15 11:2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우리 문화의 源流를 지키는 사람들 10. 한복 - 이나경 (아라가야 대표)

한옥 앞 오밀조밀 모여 사진을 찍는 외국인들과 데이트 나온 선남선녀들로 북적이는 계동 길을 따라 올라가다보면 계동교회에 조금 못 미쳐 붉은 벽돌의 2층 양옥이 있다. 세계 최고의 한복을 만든다고 자부하는 이나경 씨의 작업실 ‘아라가야’가 이 건물 2층에 자리 잡고 있다. 가회동 한옥 작업실을 비워주고 계동의 작은 2층에 터를 잡은 이나경 씨가 기자를 반갑게 맞아준다. 선풍기 앞에 앉으라며 냉장고에서 예쁘게 자른 수박을 세월의 흔적이 풀풀 풍겨오는 소반 위에 받쳐 내 놓는다. 유쾌한 웃음 속에 올 상반기에만 3개의 전시회를 한다며 자랑 아닌 자랑을 하던 그녀의 속내가 엿보였다. 지난 전시회에서는 큰 사위 내외가 오픈공연 연주를 했고, 막내 사위 될 사람이 사진을 찍어줬다며 사위들 자랑에 여념이 없다. 내성적이었다던 그녀는 장사를 하다 보니 이렇게 말이 늘었다며, 쉴 새 없이 말을 쏟아낸다. 그 말들 사이에 틈틈이 환한 미소를 내비치는 것도 잊지 않는다. 꽃보다 환한 미소 띤 얼굴에서 그녀의 굴곡진 삶의 흔적을 찾아내기란 쉽지 않았다. 장마로 서늘했던 7월의 어느 여름날, 그렇게 이나경 씨와의 이야기가 시작됐다.

唐衣. 돌잡이에 쓰는 아기 저고리 그녀의 작업실에 걸려 있다.

그녀는 오른팔이 없다. 처음부터 없던 것이 아니라 사고를 당했다. 호기심이 왕성하던 그녀가 열세 살 때, 방앗간에서 떡을 만드는 것을 쏙 빠져 보다 그만 옷소매가 기계에 빨려 들어간 것이다. 그녀를 수술한 사람은 다름 아닌 그녀의 아버지. 이후 그녀는 왼손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寫生대회에서 대상을 받기도 했다. 소질을 살려 이화여대 서양화과에 입학했다. 서울대 미대에서는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그녀를 문전박대했다. 1973년의 일이다.

판화, 염색 등 가리지 않고 자기만의 미술 세계를 넓혀가던 그녀의 인생을 바꾼 ‘결정적 순간’이 찾아왔다. 바로 연출가 오태석과의 만남이다. “학교 가는 길이었어요. 그때는 신촌역이 지금처럼 포장도 안 된 길이었죠. 신촌역 앞에 되게 지저분한 화장실이 있었는데… 지금도 있어요. 많이 깨끗해졌더라고요. 그 앞에서 오태석 선생님을 만났어요. 저 보더니 야, 너 이번에 옷 해라 이러시더라고요. 그 만남으로 제가 지금까지 한복을 만들고 있지 뭐에요.”

1978년 세종문화회관 개관공연이자 초연작인「胎」의 한지 무대의상은 그렇게 탄생했다. ‘단종애사’를 소재로 한 이 공연에서 그녀는 한지로 한복을 만드는 파격적인 시도를 했다. 오태석 연출가가 던진 “우리나라에 종이로 만든 옷이 있었다더라”라는 말에 그녀는 도서관의 사료를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연출가 오태석과의 운명적인 만남

그렇게 자료를 뒤지다 보니, 옷본으로 쓰는 작은 옷들은 종이로 만들었다는 기록을 찾아냈다. 목인에 입혔던 종이옷, 꼭두각시에게 입히던 종이옷에 관한 자료도 있었다. 큰 옷은 갑옷 느낌으로 종이를 두껍게 여러 번 겹쳐서 만든 것이 있었다. 이렇게 만든 종이옷은 가죽보다 더 두꺼웠다. 종이옷에 대한 자료를 찾던 그녀는 신미양요, 병인양요에서 종이 갑옷을 입었다는 한 TV 프로그램을 보다 엉엉 울었다. “조선 병사들이 종이 갑옷을 입고 전쟁에 나갔는데, 총알이 갑옷에 들어오면 불이 나잖아요. 그럼 물에 뛰어내리는 거에요. 그걸 보고 프랑스 병사들이 조선 군인은 투항할 줄 모르고 빠져 죽는다더라고 말하는데, 그렇게 눈물이 나더라고요.”

그렇게 모은 철저한 고증 사료와 절절한 마음이 합쳐진「태」의 한지 무대 의상은 100여 벌. 공연은 그야말로 ‘대박’이었다. 그때까지 그 누구도 무대를 이렇게까지 풀어낸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연극평론>을 창간했던 연극평론계의 대부 여석기 선생이 나레이션을 맡은 김민기와 그녀를 데리고 당시 제일 높은 종로의 삼일빌딩에서 스테이크를 사주기도 했다. 그녀는 이 공연을 통해 일약 스타가 된다. 스물여섯 살 때의 일이다.

지난달 15일부터 다음달 18일까지 남양주시에 위치한 서호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그녀의 개인전 '색으로 말하다  - 품은, 그림자'에 전시된 작품. 그녀는 이번 전시회를 통해 한복과 그림의 경계를 허무는 시도를 했다. 

화려하게 옷으로 데뷔한 그녀에게 무대의상 주문이 밀려들었다. 그런데 그녀는 스스로가 그림을 그리던 사람인지라 공연 의상으로 공동 작업을 할 때면 늘 힘이 부쳤다고 말한다. 하기 싫어 도망을 가기도 했지만, 결국 다시 돌아와서 작업을 했다. 연출가와 공연관계자, 그리고 그녀가 생각하는 방향이 달라 싸우기도 부지기수였다. “그래도 난 마지막 무기가 있잖아요. 막 싸우다가 옷 다 잘라 버릴거야 이러면 뭐라 못하더라고요.”

그녀는 혼자 산다. 남편과는 오래 전에 이혼했다. 어린 나이에 딸만 셋이었던 그녀는 이혼 후에 먹고 살 궁리를 해야만 했다. 손맛이 뛰어난 어머니 아래서 자라 추어탕 하나만큼은 어머니보다 잘 끓일 수 있다는 생각에 추어탕집을 차리려던 그녀를 번쩍 일깨운 건 어머니의 한 마디 “네가 살생을 얼마나 더 하려고 그러느냐”였다. 가톨릭 가정에서 자랐지만 佛心이 깊은 그녀는 단박에 추어탕집에 대한 생각을 접었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미술학원을 차릴까 생각하며 돈암동 길을 걷는데, 2층 미술학원의 열린 창문 틈으로 보이는 학생들의 작품들을 보고 그만 숨이 턱 막혀 이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단다.

그러다 떠오른 것이 한복이었다. 1995년, 인사동 최초의 한복집 ‘아라가야’는 그렇게 탄생했다. 손주들에게는 더없이 자상한 할머니지만, 그녀에게는 호랑이보다 더 무섭도록 엄격했던 어머니가 영국에 간 틈을 타서 일을 저지른 것이다. 경남 마산 출신인 그녀는 함안이 가야의 발상지 중 하나라며, “아라가 알에서 나온 말이고, 그게 하늘을 의미하고, 가야는 가람이라고 해서 강을 뜻해요. 그러니까 내가 한복을 지을 때 하늘의 힘과 땅의 힘을 빌려서 만든다고 해서 아라가야라고 한 거죠. 학술적으로 증명된 거는 아니고, 우리 애들도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웃어요.” 그녀다운 옷가게 이름 풀이다.

어머니의 부재를 핑계로 개업식도 안했는데 아라가야가 KBS 뉴스라인에 10여분 방송되며 그녀는 순식간에 유명인사가 됐다. 밀려드는 언론사의 인터뷰와 취재로 유명해졌던 그녀는 아라가야 오픈 1년 만에 신라호텔 패션쇼에도 초청받는다. 한복연구가이자 전통인형작가인 故허영 선생이 1, 2, 3회를 맡았던 신라호텔 패션쇼에 4, 5회 차례에 초청받았다. 대통령의 한복을 디자인하며 이름을 떨치던 이영희 한복연구가보다도 빠른 한복 패션쇼였다.

그녀는 한복을 구체적으로 누구에게 배운 적이 없다. 그냥 궁금하면 자료를 찾아서 혼자 연구한다. 게다가 양 손이 해도 쉽지 않은 일을 한 손으로 30년 넘게 해오고 있다. 그녀에게 한복을 만들 때 어떤 과정이 가장 힘든지 물었다. “모든 과정이 다 힘들어요. 그 과정 과정이 다 모여서 나오는 결산물이니까요. 옷감을 제가 고르고, 짜고, 또 물을 들여요. 염색을 하고 나면 풀다듬이를 해야 해요. 손으로 만지고 밟고 두드리고… 옷감이 좀 맞아야 반짝반짝해지거든요. 요즘은 끝까지 못 다리니까 다림질로 다려요. 그리고 재단해서 마름질하고. 한복 같은 정교한 옷은 풀을 붙여 가면서 해요. 안감이랑 싱을 딱 붙여야 하는데, 싱은 옷감 천을 받쳐주는 거고요. 그걸 세 겹으로 해서 옷을 뒤집는 거예요. 이렇게 해야 옷이 반듯해지고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아요.”

천연염색에 주력 … 사라예보 윈터 페스티발 초청받기도

서양옷의 경우 보통 옷본을 만들어서 대고 제작을 한다. 한복에도 옷본이 있지만 그녀는 곧장 마름질을 한다. 옷감을 놓고 바로 가위로 자른다. 그녀는 데생과 크로키를 예로 든다. 데생이 밑그림을 많이 그려 대상을 재면서 표현해 낸다면 크로키는 한 선으로 구현해내는 차이가 있는데, 그녀가 한복을 만드는 과정이 크로키랑 닮았다는 설명이다. “동양화도 그래요. 연습을 많이 하지만, 일단 종이 놓고 먹묻혀서 한 필에 완성해야 하는 거잖아요. 재료는 다르지만 옷도 바로 가위로 자르는 거예요. 신선한 느낌이 있는 거죠. 김치로 치면 묵은지와 생겉절이의 차인데, 묵은지의 깊은 맛도 있지만, 제 옷은 생겉절이의 느낌이 있는 겁니다.” 마름질을 하면서 가끔 제대로 하는 건가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녀는 항상 자신만만하다. 100년 후에도 내 옷을 보고 다 좋아할 거고, 정말 잘 만든 옷이라고 얘기할 거라며 웃는다. 그 웃음 속에서 그녀의 30년 내공이 느껴진다.

서호갤러리에서 전시중인 작품. 천연염색을 한 노란 저고리 뒤에 있는 작품은 옷과 그림의 경계를 묘하게 넘나들고 있다. 이나경 씨는 옷도 그림의 하나라고 말한다.

그녀의 한복이 특이한 점은 천연염색을 한다는 것이다. 그녀는 한국인 최초로 ‘사라예보 윈터 페스티발’에 2009년, 2012년 두 번 초청받았다. 천연염색으로 한복의 미를 한껏 살려낸 그녀의 작품을 감명깊게 본 이브라힘 스파히치 조직위원장의 적극 추천 덕분이다. 왜 한복에서 천연염색이 중요한가 물었더니, “화학염색으로도 예쁜 색을 낼 수 있지만, 손으로 내는 천연염색은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색이기에 더 맑고 깊이 있는 질감을 찾을 수 있다”라고 대답했다. 재료는 주로 한약방에서 구한다. 식물성 염료를 사용하다보니 대개 한약재에서 재료를 찾는다.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는 다 재배해서 보내주셨는데, 이제 혼자서는 힘에 부쳐한다. 가끔 경동시장을 찾아 재료를 구하기도 한다.

잘 알려져 있듯 동양적 색의 분류는 五方色이다. 陰陽五궋說에서 풀어낸 다섯 가지 순수한 색은 靑, 赤, 黃, 白, 黑색이다. 서양에서 인디고로 불리는 청색을 내는 대표적 염재는 쪽이다. 모든 염색의 기본이 되는 색. 적색을 내는 대표적 염재는 소목이라는 관목이다. 삼한시대부터 썼던 이 소목이 국내에는 없어서 동남아 것을 수입해다 쓴다. 홍화도 있지만 색 내기가 어려워 국내에는 홍염장이 없다. 꼬두서니라는 식물의 대 안에 있는 빨간 심 역시 적색을 내는데 국내 것은 대가 너무 약해 쓰기 어려워 인도의 것을 수입한다. 봉숭아나 적자두, 맨드라미 역시 결래도가 떨어져 재미로 할 뿐이다. 결래도는 옷감이 햇빛이나 공기, 바람, 땀을 견디는 정도를 뜻한다. 이런 걸로 여름에 물을 들이면 10월에는 붉은 색이 다 날아가고 벽돌색으로 변해버려 권장할 게 못된다고 그녀는 설명한다. 황색을 내는 염재는 황백, 울금, 대화, 황년 등이 있다. 그녀는 애기똥풀이나 치자, 양파껍질도 노란색을 내지만, 결래도가 떨어져 재미로 해보는 거라고 말한다. 그렇게 색에 대한 그녀의 설명은 끝이 없다.

자연·문화유산·동양철학이 靈感의 根源

그녀는 철장액을 媒染劑로 사용한다. 서양에선 동 삭힌 것, 알루미늄 삭힌 것도 매염제로 쓰는데 그녀는 철장액을 쓴다. 못 같은 무쇠를 식초에 담가 만드는 철장액에 천을 담그면, 양파껍질에서 카키색이 나오고, 결래도도 높아진다. 색도 고상하게 나온다고 한다. 그녀는 이렇게 나온 옷감은 천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색을 보장한다고 말한다. “염색도 한복과 같아서 앉아서 금방 후다닥 방법대로 한다고 나오는 게 아니라 도 닦는 마음으로 해야 해요. 정말 죽을 듯 최선을 다해야 결과물이 나오는 거죠.”

내 일을 하는 동안 최선을 다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스스로에게 엄격한 기준을 적용해온 그녀. 혹시 손이 하나라는 이유가 그 열정을 불러 일으켰을까. 꼭 그런 건 아닌 것같다. 어릴 때부터 정신없이 워낙에 이것저것을 해오던 성격이고, 팔을 다쳤지만 그걸로 인해 뭘 못 한다는 생각은 해 본 적도 없다. 부모님께서 그녀를 잘 키워주셨다는 말도 덧붙인다. 오히려 그녀는 팔을 다친 이후로도 지금까지도 무수히 다치고 있다고 말한다. “제가 命理 공부를 하고 있는데, 죽을 때까지 부딪히는 삶이래요. 근데 일을 할 때에는 빠져서 하는 거에요. 그림이나 옷이 내가 움직인다고 바로 나오는 게 아니라 죽을 듯 살 듯 머리를 싸매야 하고, 어떤 때는 머리를 싹 비우기도 해야 해요. 그런 과정들을 겪다 보니 항상 기도하는 마음으로 어머니 말씀처럼 겸허하게 자중하려고 노력하고요.”

한복 디자인이나 그림과 관련해 그녀는 세 곳에서 영감을 얻고 있다. 첫째는 자연이다. 산, 바다, 들 그리고 사람까지가 모두 그녀에게 영감을 준다. 두 번째는 우리의 문화유산이다. 한국 미술을 정말 좋아한다는 그녀는 그 안에 모든 게 다 들어있기에 컨닝만 잘해도 된다고 한다. 거의 불교 미술로 남은 한국 미술사도 기독교의 제한된 시각을 걷어내고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고 제자들에게도 늘 강조한다. 세 번째는 동양철학이다. 그녀는 오행을 기본으로 우주를 설명하는 동양적인 우주관을 공부하다 보면 자연이나 동양의 우주관이 같다고 말한다. 한국 미술사는 그 방법론적인 성격이다.

우리 문화가 세계 최고라고 자부하는 이나경 씨.

늘 새로운 옷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그녀는 우리의 문화가 세계 최고라고 자부한다. “과연 우리 문화를 따라올 것이 있을까요? 한국미술사만 공부해도 정말 이런 게 어디있나 할 정도의 것들 투성이에요. 중국은 규모만 컸지 뭐가 있나요? 일본인들 잔재주만 부리지 깊이가 있나요? 신라시대의 토우는 손으로 한 번 쥐었다 편 것일 뿐인데 거기 모든 게 다 들어있어요.”그러면서 덧붙인다. “한복이 최고라고 너무 외국에 알리려고 하는데, 그럴 필요 없어요. 최선을 다하다보면 자연히 알아주게 될 거에요.”

요즘은 시대가 바뀌어 혼례에도 한복을 입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한국인으로 태어나 이 좋은 옷을 평생 한 번도 못 입어 보는 것이 안타까워 그녀는 한복 대중화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중저가 한복을 만들기도 했지만 개인 노력으론 한계가 있음을 깨달았다. “왜 한복을 안 입는가 생각을 많이 했는데, 억지로 좋은 걸 왜 안 하냐고 강요할 수는 없는 문제 같아요. 문화는 흐르는 건데, 명품백 좋아서 병날 정도로 된 것처럼 정말 제대로 된 한복을 만들어야겠죠.”

올 상반기 3개의 전시회를 진행하느라 그녀는 마음이 분주하다. 지난 5월에 인사동 갤러리 서호에서 열린 한복 전시회, 지난달 14일부터 다음달 18일까지 남양주 서호미술관에서 한복과 그림의 경계를 무너뜨린 전시회, 그리고 다음달 국민대 그린디자인대학원의 제자들과 상암동 디지털미디어센터에서 함께 하는 전시회까지 일정이 빡빡하다. 앞으로 계획을 물었더니 “10년 뒤 70이 되면 국내에서 제대로 큰 패션쇼를 할 거예요. 그걸로 옷은 은퇴에요. 상업적인 장사는 그때까지 할 거란 말입니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그림 그려야죠”라며 웃는다. 예전에는 그림이 너무 무거웠는데, 앞으론 예쁜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그녀. 이번 주말엔 한복과 그림의 경계를 초월한 그녀 전시회에 다녀오면 어떨까.


윤상민 기자 cinemonde@kyosu.net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