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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미리사 여사는 누구인가]
[차미리사 여사는 누구인가]
  • 교수신문
  • 승인 2002.09.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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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평등 실천한 독립운동가로 신교육 앞장
“살되, 네 생명을 살아라. 생각하되, 네 생각으로 하여라. 알되, 네가 깨달아 알아라. 수레 두 바퀴와 같은 남녀의 관계가 안쪽으로 기울어졌으니 이것을 바로 잡아야 한다. 남자의 덧붙이가 되지 말고 스스로 삶을 일구어 나가야 한다.” 지난 6월 3일 덕성여대의 교정 한가운데에 자리잡은 차미리사 여사(車美理士)의 동상에는 이렇듯 모든 여성이 남성에게 종속된 존재가 아니라 ‘주체로서의 여성’으로 바로 서야 한다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차미리사 여사의 어록에 적혀 있는 이 문구에서부터 남녀 평등 사상의 선구자이자, 민족운동계열 여성교육가로서의 차미리사 여사의 모습이 엿보인다.
그러나 차미리사 여사를 표현하는 또다른 수식어가 있다. ‘여성독립운동가’가 그것이다. 지난 8월 15일 광복 57주년을 맞아 정부는 그간 잊혀져 있던 여성독립운동가인 차미리사 여사에게 건국훈장(애족장)을 내려, 그 넋을 기렸다.
차미리사 여사는 친일여성단체에서 주도적으로 활동한 김활란, 송금선 등과는 달리 민족운동계열에서 활동한 여성교육가로 알려져 있다. 미국에서 1905~1910년까지 한인교육기관인 대동교육회·대동보육회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대동’신문 발간에 기여했으며, 일제의 국권 강탈이 이뤄진 1910년에 급히 고국으로 귀국해 배화학당 교사로 활동했다. 3·1운동의 정신을 계승해 부인야학강습소를 개설,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가르쳤으며, 1920년 조선여자교육회를 설립해 순회강연을 통해 본격적인 부인 신교육 사업을 전개했다.
당시 그녀는 전국순회강연을 통해 여성들에게 남녀평등사상을 확산시키는 한편, 1921년 10월 10일에 교육기금을 모아 무궁화[槿花]를 뜻하는 근화여학교를 설립했다.
그러나 1940년 조선총독부의 압력에 의해 덕성여자실업학교 교장직을 송금선에게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한편 일제 강점기 조국의 독립을 위한 차미리사 여사의 활동은 해방후 통일 민족국가 수립 운동으로 이어져 독립운동가로서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줬다. 1948년 4월 독립 운동가, 문학인, 학자, 언론인, 법조인 등 김구의 남북회담을 지지하는 문화인 108인 성명 동참이 대표적인 경우다. 차미리사 여사는 1952년에는 덕성여대 이사장을 사임, 1955년 76세의 나이로 운명을 달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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