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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교육학 아닌 새로운 사회 형성에 관여하는 거시적 학습학이 시대적 요청”
“미시교육학 아닌 새로운 사회 형성에 관여하는 거시적 학습학이 시대적 요청”
  • 윤상민 기자
  • 승인 2013.07.08 11: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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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육 60년 돌아본 한국교육학회 학술대회

지난달 28~29일 한국교원대에서 ‘한국교육학 60년, 그 성과와 과제’를 주제로 한국교육학회 60주년 기념 학술대회가 열렸다. 7개의 기획세션 외에도 한국교육개발원, 한국교육학술정보원 등 정부출연연구기관의 별도 세션이 열려 학술대회를 풍성하게 했다. 특히 「한국 교육학 60년 회고와 반성」으로 기조강연에 나선 김신일 전 교육부총리는 식민지 교육을 청산하지 못했던 교육1세대와 4·19혁명 이후 5·16군사정권에 잠식당한 이후 교육세대들의 문제점을 짚으며 교육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김 전 교육부총리의 기조강연의 일부를 발췌했다.

김신일 전 교육부총리
과학적 교수이론이 현실적으로 가능은 한 것인가? 이 이론을 주장하는 책들을 보면 매우 이상적이어서 학교의 일반 교사들에게는 거의 비현실적이다. 존 듀이는 책에 이렇게 썼다. “사고훈련방법은 교사가 사고훈련의 목적을 위해 의도적으로 궁리하고 사용한 것 뿐만 아니라 교사가 무의식적으로 행한 것까지 포함하며, 아동의 호기심, 반응, 정연한 활동에 어떤 방식으로든 영향을 주는 학교 환경 속의 모든 것을 포함한다는 것을 교사는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 말은 어느 한 종류의 사고방식을 학생에게 성공적으로 학습시키기 위해서는 교사가 의도적으로 계획한 교수방법 뿐만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행할이지 모르는 행동은 물론이고 학생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학교를 형성하고 있는 모든 환경요소를 교수계획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에 어느 교사가 이런 계획을 짤 수 있으며, 과연 시행할 수 있을까.

기존 교육패러다임은 학교를 전제로 한 것이고, 학교교육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이 산업국민국가 시대의 산물이다. 즉 아동 청소년기에 국민으로 기르고 산업인력으로 양성해야할 필요에 따라 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이것도 두 말할 필요 없이 정보혁명이 초래한 평생학습시대이다. 이 시대에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교육의 장이 학교로부터 사회로 확장된다. 과거에도 학교 밖에 교육을 제공하는 시설이나 조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20세기 말부터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이 학교 밖 교육의 양적 확대와 전문성 향상이다. 이제는 학교나 대학을 상대로 경쟁하는 교육조직과 시설도 적지 않게 늘고 있다. 제도권 밖에서 운영되기 때문에 과거에는 학력이나 학위를 인정 받지 못하던 비형식 교육기관들 가운데 학력과 학위를 인정 받는 수가 증가하고 있다. 이 문제를 교육학은 어떻게 다룰 것인가.

학습시기가 생애초기 즉 아동기와 청소년기로부터 평생으로 연장돼 성인기와 노년기에도 학습이 생활의 중요 부분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유아기 교육도 과거에는 선택사항처럼 인식됐지만, 평생학습시대에는 평생에 영향을 미칠 학습의 기초능력과 태도가 이 시기에 형성되는 것이므로 그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고 있다. 성인기와 노년기 학습자에 관한 연구가 그동안 경시됐기 때문에 이론과 지식이 한정돼 있다. 교육학의 미개척지나 다름 없다.

교육과 학습의 장에서 주도권이 이동하고 있다. 종래에는 교사 즉 교수자에게 주도권이 전적으로 집중돼 있었으나, 점차 학생 즉 학습자에게 조금씩 점진적으로 옮겨가고 있다. 사실, 교사 뒤에는 학교, 교육청, 국가권력,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자본이 자리 잡고 있어서 때로는 감독하고 지시하지만 제도적 장치를 통해 교사의 권위를 보장해주기도 하기 때문에 학생에게는 대응해야 할 대상이기도 하다. 어느 때인가는 정부기관은 조정자 위치에서 교수자와 학습자간의 균형을 유지해주는 역할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하튼 과거에 비하면 교육상황에서 학습자의 위상이 높아지고 있어서 학습자 중심이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그에 따라 요즈음의 학교에는 학생/학부모와 교사/학교 간 대결 구도가 자주 나타난다. 학생의 권리를 조례를 통해 보장하려는 지자체에서는 갈등도 일어난다. 이러한 현상은 새로운 시대를 향한 출발단계에 나타나는 것으로 생각된다. 좀 더 큰 변화와 그에 따라 사회적 논쟁이 일어나고, 그것이 정리됨으로써 새로운 시대로 안정될 것이다. 이런 과정에 교육학계가 피하거나 배제당하지 말고 주도적으로 참여해 새로운 교육시대를 여는 데 중심 역할을 하기 원한다.

학교 밖의 학습공간에서는 학교에 비해 훨씬 더 학습자의 주도권이 강하다. 학습자가 스스로 선택하는 상황에서는 물론이고, 온라인 학습공간처럼 학습자가 전적으로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는 상황에서는 말할 나위도 없다. 교수자가 없거나 역할이 제한적인 학습공간이 점점 더 증가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그야말로 자기주도학습 또는 자율적 학습이라 부를 만한 활동이 다양하게 벌어진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계속 증가하고 있다. 교육학은 앞으로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만약 계획적 교수활동만을 교육이라고 규정한 정의를 충실하게 지킨다면, 교수자와 무관한 학습이나 교수자가 최소한의 보조만 제공하는 학습은 누가 연구할 것인가. 교육학의 시각을 확대하는 패러다임의 변화가 필요하지 않은가?

결론으로, 시대는 민주적 시민사회를 지향하고 있다. 의회제도나 선거제도와 같은 제도적 장치가 민주적 시민사회를 보장해주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시민의 민주역량이 관건이다. 시민의 민주역량은 지시적인 교육이 아니라 자기주도적 학습을 통해서 향상된다. 자기주도적 학습은 정답 맞추기 훈련과 다르다. 자신의 판단에 따라 찾아보고 시도해보고, 제대로 안 되면 다시 해보는 것이다. 틀린 것은 잘못이 아니고 실패가 아니다. 그것은 학습의 중요한 과정일 뿐이다. 정답을 찾지 못한 것을 잘못으로 규정하고 실패자로 낙인찍는 것이야 말로 잘못된 해로운 교육이다.

자율적 학습자라면 동료 학습자들을 찾아 先學과 後學의 관계를 만들면서 함께 진행하면 더욱 힘이 된다. 많이 앞선 선학이 있으면 옛 선인들이 먼 길을 마다않고 스승을 찾아가 배웠듯이 그를 찾아가 가르침을 베풀도록 청할 일이다. 이런 학습방식을 전문적으로 조언하고 재정적으로 지원한다면 그것이 새로운 시대의 학습제도의 한 모습이겠다. 사회를 주어진 것으로 전제하고 교수방법에 몰두하는 소극적이고 미시적인 교육학이 아니라 자율적 학습 지원에 의한 시민역량의 향상을 통해 새로운 사회의 형성에 직접 관여하는 적극적이로 거시적인 학습학이 시대적 요청이다.

정리 윤상민 기자 cinemonde@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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