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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한 페미니즘의 매혹
독특한 페미니즘의 매혹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3.07.06 19: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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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작가’ 이쾌대 탄생 100주년, 그의 작품들은?


이쾌대는 대구출신의 월북 화가다. ‘월북’이라는 그의 정치적 선택은 오랫동안 그를 남과 북 두 공간에서 잊혀진 존재가 되게 만들었다. 지난달 29일 대구미술관과 대구문화재단이 이쾌대 탄생 100주년을 맞아 대구미술관에서 이쾌대를 주제로 학술대회를 개최한 것은 그에 대한 본격적인 미술사적 재조명의 신호탄으로 볼 수 있다. 이날 학술대회에서는 윤범모 가천대 교수와 홍지석 단국대 교수, 이중희 계명대 교수, 서경식 도쿄경제 교수가 논문을 발표했다. 이쾌대의 미술세계를 일찍부터 조명해온 윤범모 가천대 교수의 발표문 「이인성과 이쾌대 혹은 서정적 상징성과 서사적 현실성」에서 이쾌대 부분을 발췌했다.

이쾌대의 작품은 대개 인물풍속화다. 후기로 갈수록 당대 현실 속의 인물 즉 특정 상황 속의 인물을 묘사했지만 등단 초기만 해도 전통 속의 인물을 선호했다. 「궁녀의 휴식」(1935)은 세 명의 나체 여성이 등장하는 작품으로 굳이 민족적 특징을 강하게 들어내려 하지 않았다. 다만 한 궁녀의 발에 신겨 있는 버선과 가구 디자인을 통해 조선의 여성임을 짐작하게 할 따름이다. 하지만 「궁녀의 휴식」은 작가의 제작 의도를 분명하게 들어냈다고 보기 어려운 바, 아직 세계관의 확립 이전 단계의 작품임을 짐작하게 한다. 하지만 「무희의 휴식」(1938)은 화사하기 그지없는 전통 복장의 젊은 무희의 좌상이 섬세하게 표현돼 있다. ‘궁녀’보다 ‘무희’가 제작의도나 표현방식에서 진일보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렇듯 애매한 상황 속의 인물은 점차적으로 뚜렷한 시공간을 알리면서 존재의 이유를 확실하게 들어낸다. 그 같은 연장선상에서 30년대의 야심작으로 「운명」(1938)과 「상황」(1938)을 꼽게 한다. 「운명」은 좁은 방안에 누워 있는 남성 주위로 슬픔에 젖어 있는 젊은 여성들로 구성된 작품이다. 작품 「운명」은 구체적 사건이나 장소 혹은 인물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화면에 나타난 사항만 가지고 볼 때, 가장과 같은 남성의 절망적 순간과 이를 슬픈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는 젊은 여성들의 특정 상황을 묘사했다는 점이다. 비극의 현장, 하지만 작품 속에는 그 구체성을 알리지 않고 있다.

다만 제작년도인 1938년은 한 해 앞서 중일전쟁의 발발로 일제에 의해 본격적으로 전쟁에 돌입한 시기라는 점이다. 「상황」은 「운명」보다 적극적인 스토리텔링의 경우에 속하는 작품이다. 여타의 작품과 달리 서사적 구도는 무엇인가 엄청난 격동을 암시하고 있는 것 같으나 그것의 구체적 내용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화면의 중앙에는 화려한 옷차림의 무희가 춤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하지만 바닥에 주저앉아 슬픔을 표하고 있는 젊은 여성은 상반신이 벗겨져 있는 상태이다. 게다가 방바닥에는 깨진 그릇 파편이 뒹굴고 있어 뭔가 격렬한 상황이 금방 지나간 것 같다. 어떤 상황, 분명히 어떤 구체적 사건을 도해화한 것 같으나 현재로서는 자세히 알 수 없는 이색 형식의 작품이다.

다만 「상황」에서 주목되는 부분은 화면 중앙의 젊은 여성이다. 그의 자세는 춤추는 모습으로 ‘특정 상황’의 변화를 유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조선식 전통복장, 암흑기 일제시대에 이러한 옷차림의 당당한 제시는 작가 의식의 단면을 확인하게 한다. 이쾌대는 화필을 들고 자신이 화가임을 천명한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1948~49) 같은 자화상도 더러 그렸지만 인상적인 작품은 「2인 초상」(1939)이다. 이 작품은 부부초상으로 부인을 전면으로 내세워 강건한 존재로 부각시킨 반면 화가 자신은 부인 뒤에서 하나의 실루엣으로 약화돼 있다. 부인의 그림자, 이색적인 부부초상화가 아닐 수 없다.

어떻게 보면 이 작품은 페미니즘 측면에서 부상시킬 수 있다. 여성 강조의 부부초상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부부초상 작품도 사례가 없어 의미부여를 각별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쾌대는 진보적 현실주의의 입장에서 당대 현실을 상징하고 비판한 세계였다. 그는 남북분단의 희생양처럼 20세기 후반에도 질곡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이쾌대는 월북 이후 북한 정권으로부터 도태돼 불행한 만년을 보내야 했다.

평양 발행 『조선력대미술가편람』(리재현 편저)의 초판에는 이쾌대 항목이 없다. 하지만 증보판(1999)에는 “김정일 위원장의 ‘귀중한 가르침’에 의거해” 이쾌대 항목을 추가했다. 이는 이쾌대의 정치적 복권을 의미하는 것이다. 남한에서는 월북화가라 해서 금기인물이었고, 북한에서는 김일성파가 아니라서 역시 금기인물이었던 이쾌대, 그는 분단시대의 대표적 희생양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가 20세기 전반부 한국미술사에서 가장 뚜렷한 예술세계를 이룩했다는 점은 재평가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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