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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이름에 이미 書刻의 운명 깃들어 있었죠”
“제 이름에 이미 書刻의 운명 깃들어 있었죠”
  • 김영철 편집위원
  • 승인 2013.07.01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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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화의 源流를 지키는 사람들_ 9. 書刻·목판각 - 趙丁勳 刻手

▲ 조정훈 刻手가 심혈을 기울여 제작하고 있는 法華經 목판각.

書刻은 말 그대로 글자를 새기는 일이다. 무엇인가를 새겨서 전하려는 것은 인간의 욕구로, 그래서 서각의 역사는 길다. 고대 원시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신석기시대 도기에 새겨진 각종 부호로부터 龜甲이나 牛骨에 새겨진 갑골문자, 석비, 묘비, 바위 등에 새겨진 금석문자, 그리고 사찰이나 서원, 가옥의 현판과 柱聯, 문패 등이 모두 서각이다. 우리 선조들은 이 서각을 나무판재를 이용해 많이 만들었다.

세계 최초의 목판 인쇄본인 국보 126호 無垢淨光大陀羅尼經과 지금은 소실된,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초조대장경, 그리고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목판각 예술의 결정판인 국보 32호 해인사 팔만대장경 경판도 모두 나무판재로 만들어진 서각 작품이다. 서각을 대량으로 많이 전하기 위한 목판각 인쇄술은 우리 선조들의 깊은 지혜가 담긴 문화유산이다. 예로부터 서각 일을 하는 사람을 일컬어 ‘刻手’라고 한다. 지금은 서각과 목판각 판본제작을 함께하는 사람을 그렇게 부른다. 조정훈(58)도 서각과 목판각 판본제작에 능한 각수이다. 그는 근 30년 째 전래의 방법에다 자신의 창의성을 더해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서각과 목판으로 재현해 내고 있는 전통문화 계승자임을 자임한다.

1992년 ‘다라니경’ 판각·재현하면서 주목받아
그의 존재가 부각된 것은 지난 1992년 세계에서 제일 오래 된 목판인쇄본인 무구정강대다라니경을 목판에 판각, 재현해내면서부터다. 조 각수는 1991년 이 작업을 위해 동국대도서관 소장 영인본을 복사해 은행나무 목판 12장(총길이 6m50cm, 폭 6cm)에다 이 경전의 5천4백6십여 자를 복원했다. 그리고 다시 돌배나무 14장(6m80cmx6.3cm)에다 해인사 고려대장경의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판각, 20세기의 목판으로 재현한 것이다. 이 작업과정에서 원 경전에서 마멸된 글자 34자를 살려냈으며, 60여 자의 오자를 바로 잡았다. 13개월에 걸친 이 작품으로 그는 처녀 출품한 제 17회 전승공예대전에서 장려상을 수상한다.

그는 “다라니경은 원래 불상이나 탑의 복장유물로 들어가던 것인데, 이를 목각판으로 제대로 된 판본을 만들어보고자 했던 것”이라며 그 당시를 회상했다. 물론 그 전에도 그는 많은 작품을 선보였다. 자신이 독실한 불교신자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대표적인 서각작품들이 경전을 포함해 대부분 불교에 관련된 것이어서 사찰 일을 많이 했다.

1984년 인사동에서 서각 일을 시작한 조 각수는 그 이듬해 해인사로부터 반야심경과 화엄변상도 등을 부탁받고 불교작품과 인연을 맺는다. 송광사의 목우가풍과 해인사의 연경당 등 상당수의 사찰 柱聯과 현판에 자신의 刻 솜씨를 담아냈다. 또 낙산사의 보타전 현판을 서예가인 故 여초 김응현의 글씨로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해인사 승가대학 현판 및 연경당 편액을 만들어 걸었다.

大東輿地圖 복각으로 전통목판인쇄술 우수성 재확인
그렇다고 그가 불교 일만 한 것은 아니다. 그는 1994년 민족통일의 염원을 담은 작품으로 각수로서의 그의 이름을 뽐낸다. 바로 古山子 김정호가 만들었던 대동여지도의 목판을 복각한 것이다. 고산자가 1861년에 제작한 대동여지도는 남북 1백20리, 동서 80리를 1판으로 모두 1백26판에 우리나라 전체를 담아낸 목판 인쇄지도이다. 그러나 대원군 시절, 대동여지도의 상세함에 놀란 조정대신들이 판각을 압수해 불태워버리는 바람에 현재 1판만 전해져 보존되고 있는 것을, 조 각수가 그대로 복원한 것이다.

그가 복각한 대동여지도의 총 목판 수는 69판. 양면 각으로 계산하면 모두 139면으로 원본과 똑같이 목판으로 제작했다. 조 각수는 대동여지도의 영인본을 종이에 베껴 이를 다시 강원도 자작나무와 은행나무에 새겨 넣는 과정과 옻칠 작업을 거쳐 4년의 각고 끝에 이를 만들었다. 당시 조 각수의 대동여지도 목각판 복원은 그 자신의 통일염원과 함께 서울 정도 600년에 맞춰 우리나라의 세계최고의 목판인쇄술 우수성을 재확인시켜 줬다는 평가를 받았다.

조 각수의 대동여지도 목각판은 원본과는 좀 다르다. 원래 목판각은 당시 제작과정에서 山名과 地名이 삭제돼 판각됐으나, 조 각수의 복각 지도에서는 새로이 3천8백여 개의 지명을 추가해 판각했다. 특히 대동여지도 원본에는 편입이 안 된 독도를 새겨 넣은 것은, 조 각수의 우리 영토에 대한 의지가 담긴 것이다. 또 원본의 지명에서 경상도 함양과 악양이 서로 바뀐 것을 바로 잡기도 했다. 이 대동여지도 복원으로 그는 그해 전승공예대전에서 장려상을 받았다. 이밖에도 그는 지난 2002년에는 영국 대영박물관의 한국관 현판을 여초 김응현의 글씨로 만들어 걸었다. 반평생을 서각과 목판 제작에 몰두해온 조 각수의 작품은 얼마나 될까. 그는 그것을 꼼꼼하게 기록해두고 있다.

그에 의하면 지금껏 1천484점의 현판과 2천547점의 주련, 그리고 25만9천100자의 記文이다. 각종 수상경력도 많다. 앞에 언급한 두 번을 제하고 19회나 수상했다. 그 가운데 가장 큰 상으로는 2010년 ‘阿彌陀九尊圖’ 목판본으로 제 6회 대한민국 평화예술대전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것이 꼽혀진다. 그는 우리 전래의 서각을 세계 최고의 것으로 친다. 그리고 자부심도 대단하다. 중국과 일본의 서각은 비교할 게 안 된다고 단언한다. “중국은 서각을 하기는 하는데, 자잘한 잔꾀를 많이 부린다. 예컨대 쌀에다 글자를 새긴다든가 하는데, 그건 장난질 같은 것이다. 일본은 우리보다 한참 뒤떨어져 있다”며 그런 차원에서 그는 “각수의 역할이 우리 민족의 기술을 복원해 계승시키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가 하는 서각과 목판제작, 그리고 목판인쇄는 꼼꼼하기 그지없다. 거기서 그의 이런 의지가 묻어난다. 그의 서각 기술은 과학적이다. 물론 우리 선조들의 지혜를 바탕으로 한 것이지만, 무엇보다 서각 기술이 비과학적이면 화선지에 찍어내는 목판인쇄를 버린다고 한다. “대장경 판의 글씨가 수평으로 보면 톱니 형식으로 각이 돼 있다. 이 톱니 형식에 가장 맞는 각도는 글자의 앞면이 45도, 옆면이 각각 50도, 그리고 글자의 끝나는 면이 직각으로 새겨져야 한다”는 게 그가 십 수 년의 경험과 연구 끝에 알아낸 결과다. 이 각도로 글을 새겨 판으로 찍어야 인쇄가 잘 된다는 것이다. 인쇄될 종이와 풀의 두께 등도 감안한 셈법이다. 그는 이런 연구결과를 4년 전 강화도 선원사에서 개최된 ‘대장경판 세미나’에서 발표하기도 했다. 조 각수는 해인사 팔만대장경과 인연이 깊다.

▲ 趙 각수의 공방 현판인 ‘藏經刻書’. 故 여초 김응현이 글을 썼다

그가 불교 서각 및 목판각과 본격적으로 연을 맺은 것도 지난 1985년 해인사 여연 스님이 그에게 반야심경과 화엄변상도 서각을 의뢰하면서부터다. 2001년에는 팔만대장경 반야심경의 모판(모조판) 1천500장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그는 “불교적인 관점에서 사찰들이 불교 古來의 경전을 많이 모셔야 한다”고 말한다. 많은 佛事 가운데 경전 모시는 게 으뜸이라는 얘기다. 그래서 불교 경전 가운데 불심이 가장 깃든 팔만대장경이 각 사찰들에서 널리 모셔져야 한다는 바람을 갖고 있다. 이런 차원에서 그는 팔만대장경을 널리, 그리고 오래도록 보관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했고, 이를 바탕으로 작업에 착수한다는 원대한 계획을 갖고 있다. 그것은 바로 팔만대장경을 銅版으로 복원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동으로 글씨를 주조하는 것이다. 팔만대장경판은 정확히 8만1천528개이다. 이를 글자로 계산하면 대략 5천900만자가 넘는데, 이 방대한 글자를 동판으로 복원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연구와 방법으로 자신만만해 한다.

그의 야심찬 포부-청동주물로 八萬大藏經 영구보전하기 “팔만대장경에 수록된 글씨는 5천9백만 자가 넘지만, 내가 연구하기로 한 경판에 많이 등장하는 卍자 등 중복되는 한자와 異體字를 감안하면 실제 반복되는 글자는 2만여 자에 불과하다. 이 2만여 자의 한자를 만들 당시에 쓰여졌던 구양순체 그대로 복각해 나의 방식대로 주물을 뜨면 거의 원형 그대로 목판을 동판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금강경도 5천400자가 넘는데, 230자만 파면 된다고도 덧붙인다. 팔만대장경을 자신의 셈법과 이 청동주물 방식대로 하면 그것을 영원히 보전할 수 있게 되는 ‘新 팔만대장경’ 복원 계획으로 들린다. 그러나 그는 이와 관련해 팔만대장경을 단순히 복사하는 수준에 그쳐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장경을 일일이 새기지 않고 컴퓨터로 복사해 동판을 부식시키는 방식으로 복원한다면 예술적 가치 등의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는 청동주물로 팔만대장경을 복원하는 방법을 특허 신청해 지난 2006년 특허를 취득했다(특허번호 제10-055836). 이 계획의 일환으로 이미 샘플은 만들어 놓은 상태인데, 일이 밀려 지연되고 있지만 곧 제작에 들어갈 예정이다. 그런 그가 근자에 심혈을 기울여 작업하고 있는 일은 法華經이다. 154장에 7만 자의 화엄경을 3년 째 새기고 있다. 조 각수의 연구실이자 공방인 ‘장경서각’은 경기도 파주의 용미리에 있다. 서울 은평구에 있다가 지난 2010년 이 곳으로 옮겼다. ‘장경서각’의 현판이 예사롭지 않다. 여초 김응현 선생이 써준 글을 서각한 것이라 했다. 서각과 목판인쇄, 그리고 여러 형태로의 제작은 손으로 하는 수작업이다. 그러니 할 일이 많다. 대패질도 해야 하고 염색도 해야 한다. 그리고 옻칠과 배접도 해야 한다. 이 모든 일을 직접 한다. 그의 공방은 한창 공사 중이다. 각각의 작업에 맞는 방들을 꾸미고 있는 중이다. 서각 기술도 그렇지만, 그의 손재주는 이미 어려서부터 정평이 났다. 지금은 순천시로 편입된 전남 승주군의 주암면이 고향인 조 각수는 그의 선조의 기술과 안목을 이어 받았다.

 태어나서부터 그는 집안으로 전해 내려오는 서각작품들을 많이 보고 자랐다. 따로 배운 것도 없이 절로 손에 익혀진 게 서각이고 판각이고 목각이다. 이런 안목과 기술을 바탕으로 그는 1984년 서울 인사동에 입성했다. 처음엔 인간문화재였던 철재 오옥진 선생의 제자가 하는 공방에서 수학을 했지만, 기술이 너무 좋아 4개월여 만에 따로 공방을 냈다. 그만큼 손재주가 뛰어났다. 그는 자신의 현재가 선조의 뒤를 이어야 할 운명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자신의 이름도 그렇다는 뜻이다.

 “ 내 이름의 가운데 자가 고무래 丁이다. 성씨의 하나인 이 자는 이름으로는 잘 쓰이지 않는데, 고무래는 무엇을 펴고 고르거나 할 때 쓰는 丁자모양의 기구다. 이 자를 내 이름으로 지어준 부모와 조부의 바람이 깃든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조 각수는 그의 손가락도 ‘서각용’이라고 웃으며 말 한다. 봤더니 과연 양손의 새끼손가락이 남들과 다르다. 새끼손가락 위 옆에 똑 같은 모양의 돌기가 나있다. 그 돌기가 서각 작업하는데 그렇게 편리하다는 얘기다. 그에게서 배운 제자들도 꽤 있다. 지금껏 70명 정도가 그에게서 배웠다. 그 가운데 14명 정도가 전통 서각 일을 하고 있다고 한다. 현재 파주 용미리 그의 공방엔 그를 포함해 모두 4명이 일한다. 그 가운데 한 명이 바로 그의 아들인 조한상(27)이다. 그는 그가 그랬듯이 아들에게 자신의 안목과 기술을 물려 줄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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