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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매일 배반하고 산다
우리는 매일 배반하고 산다
  • 김준형 한동대·국제정치학과
  • 승인 2013.07.01 14: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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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而思

최근에 책을 하나 냈다. 전공인 국제정치학 관련 서적은 아니다. 그리고 단독이 아닌, 언어학자 윤상헌 한동대 교수와 함께 썼다. 한동대에 부임한 것이 1999년이었으니 같은 학부에서 가까운 벗으로 지낸 지가 14년이 됐다. 복수전공과 학제간 연구라는 신생대학의 야무진 꿈으로 인해 어문학과 국제지역학이라는 이질적인 두 전공이 묘한 동거를 하고 있다.

하지만 국제어문학부라는 학부 이름에 대한 사람들의 숱한 질문을 제대로 설명해내는 일보다 정치학자와 언어학자의 동거는 생각보다 쉽고 즐거웠다. 그리고 이미 정책 이데올로기나 캠페인의 냄새가 배어든‘학제간 통합연구’라는 용어 자체에는 알레르기가 있지만, 만들어낸 결과물을 보니 사실 그렇게 볼 수 있을 것도 같다.

당연히 처음부터 거창한 프로젝트로 시작하지는 않았다. 3천 명이 안 되는 학생과 150명 남짓한 교수로 이뤄진 포항 변두리 산속의 고립된(?) 학교에서 가능했던 두터운 시간의 공유가 만들어낸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몸담고 사는 정치와 사회에 대해 참 많은 대화를 나눴다. 그가 가진 사회과학도 이상의 비판적 사고와 나에게 남은 인문학적 감성은 상대방의 전공에 대한 진입장벽을 처음부터 낮춰줬기에 꽤나 심각한 주제를 놓고 토론을 벌일 수 있게 만들어줬던 것 같다.

그러다가 맞닥뜨린 것이 바로 언어와 권력의 관계라는 주제였다. 언어는 그의 영역이고, 권력은 나의 영역인 셈이다. 그런데 언어의 오용과 뒤틀린 권력이 밀접하게 닿아있다는 것을 발견했고, 이것을 언어의 배반으로 부르기로 했다. 무심코 사용하는 언어들 중 본래 의미를 왜곡하고 편견을 조장하는 것들이 매우 많다. 살색, 검둥이, 처녀작, 환향녀, 여류작가, 바른손 등 인종이나 여성 차별적 언어나 과장된 어휘 등은 이미 많이 알려진 언어배반의 사례들이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한 것은 이보다 훨씬 더 정교하게 위장한 채 숨어있는 것들이었다. 좌빨, 공정함, 진정성, 긍정성, 착함, 확신, 평범, 국가, 시장, 평화, 양비론과 양시론, 욕, 강남좌파, 스폰서 등 우리가 발굴한 무수한 언어배반의 사례들에 대해 그는 언어학적 왜곡과 결핍을, 나는 그 이면에 작동하는 뒤틀린 권력의 음모와 방조를 고발하고자 했다.

어떻게 보면 단순한 말실수를 두고 지나친 비약을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표현이나 용어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저항 없이 지나치는 순간 우리는 그 단어를 태생시킨 거대한 편견의 권력구조에 편입되고, 차별행위를 조장할 수 있다. 즉, 기성 이데올로기나 권력에 자기도 모르게 공범이 돼 소수를 외면하고 차별하는 다수의 가해자가 될 수 있다. 여러 가지 면에서 사회적 약자라 하더라도 다수가 돼 언어배반에 동참하는 순간 이미 약자의 행위가 아니다. 가해행위의 책임은 무의식의 실수로 변명되며, 다수로 나눠지면서 희석되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기호언어학자인 롤랑 바르트는 ‘언어는 파시스트’라는 말로 언어의 권력적 측면을 갈파했다. 그는“언어는 우리의 무의식을 만들고, 그 언어의 창을 통해 세상을 바라볼 수밖에 없으며, 특정계급과 특정언어의 밀착관계에 의해 권력의 수직적 위계질서를 고착시킨다”라고 했다. 이를 피하기 위해서 바르트는 언어가 권력을 행사하려 들 때마다 그 언어를 버리고 권력이 우리를 이용할 수 없는 다른 자리로 끊임없이 이동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그렇다! 이는 언어가 품고 있을 지도 모를 권력의 구조적 폭력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잘못된 언어표현을 끊임없이 따져봐야 한다는 우리가 쓴 책의 의도를 대변해준 말이다.

공저자 윤 교수의 다음 언급은 이 작업이 지향하는 목표점이다. “언어가 우리를 배반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언어를 배반한 것이다. 말을 빼앗기지 않으면 얼은 죽지 않는다. 정신이 오롯하게 살아 있으면 언어가 배반의 기호가 되지 않을 수 있다.”

사족을 단다면, 이 책을 읽는 모든 사람들이 권력에 중독된 배반의 언어들을 무의식적으로 쓰면서 편견을 확산하는 공범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김준형 한동대·국제정치학과
미국 조지워싱턴대에서 박사를 했다. 미래전략연구원 외교안보전략센터장 등을 역임했고, 현재 연구기관인 싱크탱크 미래지(mirezi)의 부원장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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