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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을 찾던 철학의 삶 … 그것은 자유일까? 운명일까?
빛을 찾던 철학의 삶 … 그것은 자유일까? 운명일까?
  • 최재목 영남대 철학과
  • 승인 2013.07.01 11: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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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목의 유랑·상상·인문학(40회) 암스테르담과 덴하그 사이에서 스피노자를 생각하며

어느 때 들러도 자유롭고 설레는 곳, 항상 사람들로 붐비는 암스테르담. 13세기에 어민이 ‘암스텔’江에 ‘댐’을 설치해 살고부터 그렇게 불렸단다. 중앙역에서 걸어서 10분 남짓 거리의 담 광장에, 나는 서 있다. 비둘기들은 구구대며 날다가 앉고, 앉았다 다시 자리를 뜬다. 사람들이 쭈욱 둘러 선 가운데 묘기가 한창이다. 틈틈 박수 소리가 터져 나온다. 묘기란 절묘한 그러나 과학적 기술 아닌가. 바다보다 낮은, 자그마한 땅의 네덜란드는 물을 통제하며 삶의 영토를 확보해냈다. 이것이야말로 위대한 묘기다.

암스테르담 운하 모습. 사진=최재목

시내 운하를 따라 도는 유람선을 타보라! 금방 눈치 챌 것이다. 렘브란트의 첫 집단초상화「니콜라스 튈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에서, 튈프 박사가 시체의 팔을 절개한 다음 집게로 엄지와 검지를 잇는 ‘힘줄’을 쭈욱 끌어당겨 올리듯이, 온 땅을 뒤덮을 듯 포악한 물결을 우리에 가둔 동물처럼, 꼼짝 못하게 운하의 손아귀로 거머쥔 모습을.

그렇다. 암스테르담은 도시 전체가 여러 개의 운하로 둘러싸인, 수많은 다리와 다리로 이어진 부채꼴의 도시이다. 혈액의 역류를 막아주는 판막 같이 운하의 물길과 그 위의 길들이 교란되지 않도록 해주는 수문식 교량들, 특히 마헤레 다리 같은 목제 개폐교를 만나면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이 떠오른다. ‘험한 세상에 다리 되어’처럼 다리는 네덜란드 사람들에게는 중개?매개의 상징이다. 원래 장사와 무역으로 먹고사는 나라다보니 타협과 협력이 중시되는 것은 당연하겠다. 눈에 띄는 것 하나 더. 화단과 벤치를 갖춘, 365일 물 위에 둥둥 떠 있는 수상가옥들이다. 기둥마다 배가 붙어 울렁대는데, 엄연히 집이건만 어딘지 어색하면서 로맨틱하다.

네덜란드에서는 마약, 매춘, 동성연애, 안락사가 합법화돼 있다. 그렇다고 사회가 혼란에 빠지는 것이 아니다. 물을 잘 다스리는 운하처럼, 자유와 관용이 허용되면서 질서가 잘 잡혀있다. 일찍이 스피노자는『신학정치론』(1673)에서 말했다. 17세기 네덜란드의 황금시대에 보이는 경제 번영은 ‘자유’에서 말미암았다고! 그것은 바로 사상과 종교의 자유라고! 그래서 ‘자유와 번영’ ‘모든 민족과 종파가 공존’한다고! 그 책의 앞머리에는 1631년 암스테르담에 머물렀던 데카르트의 말이 인용돼 있다. ‘세계 어디에서 이토록 완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을까?’

암스테르담 반고흐 미술관의 모습. 사진=최재목

암스테르담의 ‘렘브란트의 집’, ‘반고흐 미술관’, ‘국립박물관’ 등을 한번 둘러보면서 나는 직감한다. 저 렘브란트와 고흐의 형형색색 빛나는 회화의 혈구들은 이곳의 ‘글쓰기’ 정신을 모두 흡입해 버렸다고. 정말일까? 16세로 죽은 유대인 소녀 안네 프랑크는 은거지(현재의 ‘안네프랑크의 집’)에서 일기를 썼다.

『안네 프랑크의 일기』, 1944년 4월 4일 화요일의 한 대목에서 “글을 쓰고 있으면 무엇이든 떨쳐버릴 수가 있습니다. 글을 쓰면 슬픔은 사라지고 대신 용기가 솟아오릅니다.”라고. 그래, 고흐의 수많은 편지에서 보듯이, ‘쓰는’ 힘은 ‘그리는’ 힘의 저변을 살려내고 있는 것이다. 회화 또한 무언가를 깊이 물어 들어가는 힘 아닌가. 그런 열정은 제 얼굴을 고쳐대며 ‘나는 누구인가?’를 붓끝으로 정교하게 끄집어낸다. 그 밑바닥에 깔린, 묘한 ‘이성의 빛’과 ‘자연의 빛’의 힘겨루기. 혹은 ‘신앙’과 ‘이성’의 조용한 양립과 조응들.

더욱이「네덜란드의 황금시대」에는 더 흥미롭다. 한쪽에서는 ‘튤립’ 뿌리 하나 가격이 천정부지라 돈독이 오를 대로 오르고, 다른 한쪽에서는 ‘빛’의 입자(알갱이)를 찾아 눈알이 충혈돼 가고 있었다. 기이하게도 1630년대 네덜란드에서는 ‘빛’과 ‘렌즈’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연이어 출생. 1632년 10월 24일에는 현미경을 만든 아마추어 과학자 레벤후크가, 같은 해 같은 달 31일에는 화가 베르메르가, 그 다음 달(레벤후크 보다 한 달 늦은 11월 24일)에는 스피노자가 태어났다. 모두 방법은 다르지만 ‘같은 것’=‘빛’을 찾았다. 빛이 입자라고 예측한 아인슈타인보다 300년쯤 앞서서 베르메르도 같은 생각을 했다. 그는 빛의 ‘입자’를 미분하는 기법에까지 이르는데, 이것은 아마도 레벤후크의 도움이 아니었을까.

덴하그의 스피노자 무덤. 사진=최재목

덴하그 스피노자하우스 근처의 스피노자 동상
이쯤에서 나는 스피노자를 다시 떠올린다. 그는 왜 렌즈를 통해 빛의 굴절을 보는데 흥미를 가지게 됐을까. 의문을 안고서 덴하그(헤이그)로 발길을 돌린다. 그리고 스피노자의 무덤 앞에 선다. 아인슈타인은 노벨물리학상을 받고 난 훗날, 어느 종교가한테서 질문을 받았다.‘당신은 신의 존재를 믿습니까?’그는 대답했다. “나는 스피노자의 신을 믿습니다. 세계의 질서 있는 조화로서 드러나고 있는 신을.”

1920년 11월 2일 아인슈타인은 스피노자를 사모해서 덴하그 근처의 레인스부르흐를 방문한 적이 있다. 무신론자로 이단시돼 암스테르담의 유대인사회에서 추방당했던 스피노자는 수년간 그곳에서 은거하며 렌즈를 깎았다. 그때부터 그가 고독 속에서 평생 넓혀갔던 것은 ‘신’이 아니라 ‘세계 자체’를 향한 자유로운 ‘전망’이었다. 그를 움직였던 것은 교수직과 같은 ‘지위에 대한 희망’이 아니라 오로지 ‘평안에 대한 사랑’이었다. 자유와 빛을 찾던 철학자, 이제 그도 한 줌 흙이 됐다. 그래, 지금 나의 학문은 무엇을 향한 것인가. 스피노자가 평소 즐겼던 거미줄 속의 거미싸움 같은 것일까. 그것은 자유일까, 운명일까.

최재목 영남대 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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