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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과 니체가 바라본 과학의 풍경
비트겐슈타인과 니체가 바라본 과학의 풍경
  • 김재호 학술객원기자
  • 승인 2013.06.18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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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로 읽는 과학本色18. 철학이 본 과학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은 두 가지다. 과학적 혹은 기적적 방식. 그에게 윤리, 종교, 미학은 과학과 다르다. 특히 인간은 불완전하다. 두려움을 극복하고 치유하기 위해 도움을 느끼는 혹은 바라는 정도가 절실할수록 종교인이 된다. 과학적 태도는 이러한 불완전함을 메우는 다른 방식이다.

지난 1일 인제대에서는 한국분석철학회의 ‘분석철학이 바라보는 기술, 인간, 치료’ 관련 논의가 있었다. 인제대 하영미 강사(종교철학)는“제의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발표했다. 아래 인용은 하 강사가 비트겐슈타인의『확실성에 관하여』,『 문화와 가치』등을 참조하여 발표한 내용이다.

하영미 강사의 아래 설명에 따라, 비트겐슈타인의 제의적 행위를 도식화해보았다. 과학적 태도가 우리 삶의 두려움을 제거할 수 있을지는 의문으로 남는다.

하영미 강사는 비트겐슈타인의 설명을 따라, 무어 명제의 확실성과 종교적 믿음의 공통점·차이점을 밝혔다. 둘 다 근거 없는 확실성을 갖고 삶을 통해 확인된다. 비트겐슈타인 표현을 따르자면 “근거 있는 믿음의 근거에는 근거 없는 믿음이 놓여 있다.”내가 키보드 타자를 치고 있는 것은 의심 불가능하고 나의 행위를 통해 알게 된다. 이러한 무어 명제의 확실성은 동물적 본능이지만 종교적 믿음은 제의적 본능과 관련된다.

동물적 본능과 제의적 본능

제의적 본능은 ‘깨어나는 인간 정신’이다. 하 강사는 비트겐슈타인의 표현을 빌려 “지성의 각성은 근원적인 지반으로부터의 분리에서 발생하며 분리를 포착하는 것이 깨어나는 정신”이라고 강조했다. 참나무를 오랫동안 숭배해온 유럽인들이 참나무를 인간과 분리하듯이 말이다. 제의를 만드는 것은 인간의 공통 정신인데, 인간에게 깊은 두려움의 인상을 준다. 처음에 언급했듯, 종교는 두려움을 극복하려는 절실한 태도이다. 이에 반해 “과학은 세상과 삶이 그렇게 두려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세계를 기적적으로 바라보는 태도는 깨어나는 인간 정신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런데 과학적 태도는 무어 명제의 확실성만을 기반으로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과학은 깨어나는 인간 정신을 다시 잠재운다.”기적적 관점에서는 모든 것이 축복이며 경이이다.

하지만 과학은 “풍부한 삶의 색을 은폐하며 그래서 삶 자체를 은폐한다.” 이 때문에 하 강사는 과학이 할 수 있는 부분은 제한적이고, “특히 삶의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라고 결론지었다.

이상룡 부산대 강사(언어분석철학)는 논평에서 무어 명제의 확실성-동물적 행위(본능)-과학적인 관점(태도)를 동일시하는 것인지, 과학이 과연 필요한지 등을 지적했다. 이에 대해 하 강사는 “과학적 태도는 무어 명제의 확실성만으로 가능하지만 종교적 태도(기적적인 태도)는 무어 명제의 확실성(동물적 본능)+제의적 본능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이었다며 “비트겐슈타인은 과학이 필요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것처럼 하는 과학 혹은 과학주의의 오만을 비판”하는 것이라고 답변했다.

한국니체학회·한국칸트학회는 이날 ‘니체와 칸트 그리고 과학기술의 문제’를 다뤘다. 그 중 정낙림 경북대 강사(예술철학)는 “니체는 다윈주의자인가? - 진화인가, 극복인가?”를 발표했다. 정 강사는 다윈에 대한 세 가지 오해를 소개했다. 첫째, 진화론은 다윈에 의해 수립된 가설이 아니다. 둘째, 다윈과 다윈주의는 일치하지 않는다. 셋째, 진화와 진보는 같지 않다. 그는 “대체로 초기의 니체는 다윈에 대해 우호적”이었다며 “힘에의 의지와 영원회귀의 사유를 본격적으로 펼친 후기에서 니체는 다윈에게서 거리를 취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정 강사는 위버멘쉬를 강조하는 니체에게서 다윈을 배제하는 것은 쉽지 않다고 강조했다.

다윈을 비판적으로 수용한 니체

『종의 기원』은 △ 진화 그 자체 △ 공동후손 △종의 증가 △ 단계주의 △ 자연선택의 가설을 증명하려 한다. 이에 대한 니체의 비판은 첫째 적자생존론에서 벗어날 수 없는가, 둘째 생명이 환경에 지배되면 능동적 측면이 간과되지 않는가, 셋째 진화론은 언제나 발전을 지향한다고 확신한다, 세 가지로 나뉜다. 정 강사는 “니체가 다윈과 다윈주의, 특히 스펜서류의‘사회진화론’을 엄격히 구분하고 있지 않다”면서 “니체가 다윈의 저서를 읽지 않았다는 근본적 이유”를 지적했다.

니체는 인간 정신의 변화를 ‘낙타→사자→아이’혹은‘원숭이→인간→위버멘쉬’로 비유한다. 특히, 진화론적 관점에서 순서가 있지 않다. 후퇴도 가능한 것이다. 이 때문에“니체는 종으로서 인간의 진화에 회의적”이고 “그의 관심은 뛰어난 개인이나 예외자들”이다. 정 강사는“니체에게 낙타→사자→아이의 변화는 다윈의 형질변화라는 진화의 산물이 아니라 바로 힘에의 의지 차이에서 기인한다”고 설명했다. 아이와 위버멘쉬가 진화사슬의 마지막 단계가 아니고, 어느 순간 갑자기 도래해‘번개’에 비유되는 이유다.

다윈의 이론은 자연의 영역에 제한된다면 정당화될 수 있다. 그러나 문화 혹은 도덕의 영역에 적용하게 되면 “노예의 도덕, 평균인들의 가치는 적응의 결과이고 그것은 선택되어야 한다”는 문제점을 낳는다. 정 강사는 “니체는 인간을 자연적 존재이면서도 자신의 가치를 실현하는 문화적 존재로 보고, 인간의 인간다움은 결국 진화에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 극복에 있다는 점을 역설한다”고 말했다. 결국, 니체는 다윈을 비판적으로 수용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비트겐슈타인과 니체가 바라본 과학은 삶이라는 총체를 가늠하는 하나의 잣대이다. 철학의 테제가 지극히 인간적·사회적이라면, 과학의 본질은 충분히 비(?)인간적·자연적일까.


김재호 학술객원기자 kimyital@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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