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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양지에서 만난 인물·풍토 기록 … 景物 묘사한 詩들 압권
귀양지에서 만난 인물·풍토 기록 … 景物 묘사한 詩들 압권
  • 교수신문
  • 승인 2013.06.17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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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전번역원 - 교수신문 공동기획 ‘고전의 숲’ 2. 『국역 아계유고』

 
<교수신문>은 올해 창간 21주년을 맞아 한국고전번역원(원장 이동환, 전 민족문화추진회)과 공동기획한 ‘고전의 숲’을 지난 687호부터 격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고전의 숲’은 한국고전번역원이 각고의 노력으로 번역해낸 한글 번역 문화의 정수를, 관련 번역자들이 직접 소개하는 연중기획입니다. 민족문화의 핵심을 이루는 선현들의 다양한 저작을 현대화한 이 작업은 한국문화의 저변을 확장하는 한편, 학문적·사상적 사유의 깊이를 ‘한글’로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것입니다. 다방면에 걸친 학술 연구와 사회 각 부문에서 해당 고전이 재음미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국역 아계유고|이산해 지음|이상하·조동영 옮김|민족문화추진회|1997~1998

 

 

『鵝溪遺稿』는 鵝溪 李山海(1539~1609)의 문집이다. 이산해는 당쟁 초기에 이른바 大北의 영수로 활약해 대개 정치가로만 알려져 있는데 선조 때 文章八家의 한 사람에 꼽혔을 만큼 문학에도 뛰어났다. 1590년에 영의정의 자리에 올랐으나 1592년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국정을 잘못 운영해 왜적의 침입을 초래했다는 죄목으로 탄핵을 받아 파직됐고 평양에서 다시 탄핵을 받아 경상도 平海로 귀양 갔다. 이산해의 詩文은 임진왜란 이전에 지은 것은 戰火에 모두 소실돼, 평해로 귀양 간 뒤부터 지은 것들만 수습해 이 책으로 묶었다. 그래서 遺稿라 한 것이다.

 

내용을 보면, 1, 2권과 4권은 詩集이다. 1, 2권은 모두 귀양지 평해에서 읊은 시들을 싣고 있다. 앞부분에는 임금에 대한 연모, 전란통의 시국에 대한 근심이 주로 보이다가 「중국 군사가 西京(평양)을 수복했다는 말을 듣고」란 작품을 기점으로 일상에서 격은 일과 감정들이 보인다. 4권은 평해에서 서울로 돌아온 뒤에 지은 시들을 싣고 있다. 이산해의 시에서 가장 볼만한 것은 景物을 그림처럼 아름답게 묘사한 작품들이다. “저물녘 조수가 막 불어 모래톱을 삼키키(晚潮初長沒汀洲)/ 섬들은 흐릿하고 안개는 걷히지 않았어라(島嶼微茫霧未收)/배 가득 폭우 내려 돌아가는 노는 급한데(白雨滿船歸棹急)/서너 마을에 사립 닫혔고 가을 콩꽃 피었네(數村門掩豆花秋)” 「卽事」란 제목의 작품이다. 눈앞의 경물을 읊은 것인데 그야말로 詩中有畵요 畵中有詩라 함직하다. 이 시에 대해 南龍翼은 그의 『壺谷詩話』에서 “아계의 시는 지나치게 軟媚해 혹자는 죽은 양귀비가 꽃 아래 누워 있는 것 같다고 혹평하지만 ‘배 가득 폭우 내려 돌아가는 노는 급한데 서너 마을 사립은 닫혔고 가을 콩꽃 피었네’라는 구절은 실로 그림 속에 시가 있는 것이다”라고 극찬했다.

遺稿이지만 秀作 거의 수록해
3권, 5권, 6권에는 산문이 실려 있다. 그 중에서 3권은 평해에서 지은 산문들인데, 이 책에서 가장 재미있게 읽을 만한 부분이다. 東坡嶺外文이란 말이 있다. 嶺外는 중국의 남방 五嶺 밖 지역으로 유배지를 뜻한다. 東坡 蘇軾이 영외 지방에 귀양 간 뒤로 문장이 더욱 좋아져 「范增論」과 같은 명문을 남기게 됐다 한다. 대개 귀양지에서는 환경은 적적하고 마음은 울울해 문학에 마음을 쏟기가 쉽다. 그래서인지 이산해의 글도 평해에서 지은 작품들이 가장 좋다.

따라서 이 책을 遺稿라고는 했지만 이산해의 秀作은 거의 수록돼 있는 셈이니, 이 책을 다 읽을 겨를이 없는 독자에게는 우선 3권만이라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 중에서도 평해에서 만난 특이한 인물을 묘사한 「安堂長傳」, 「安主簿傳」, 바닷가에 사는 미개인을 읊은 「海濱蜑戶記」, 평해의 풍토를 소상하게 기록한 「箕城風土記」 등이 특히 재미있다. 지면이 좁아 다 소개할 수는 없고, 그 중에서 짧은 글 두 편만 발췌해본다. “내가 처음 유배지로 갈 때 箕城 경내로 들어서니, 날이 이미 캄캄하여 沙銅의 西京浦에 임시로 묵게 됐다. 이 포구는 바다와의 거리가 수십 보가 채 안 되고 띠풀과 왕대 사이에 민가 십여 채가 보였는데, 집들은 울타리가 없고 지붕은 겨릅과 나무껍질로 이어져 있었다. 맨땅에 한참을 앉았노라니, 주인이 관솔불을 밝혀 비추고 사방 이웃에서 사람들이 구경하러 모여들었다.

그들은, 남자는 쑥대머리에 때가 낀 얼굴로 삿갓도 쓰지 않고 바지도 입지 않았으며 여자는 어른 아이 없이 모두 머리를 땋아 쇠 비녀를 지르고 옷은 근근이 팔꿈치를 가렸는데, 말은 마치 새소리와 같이 괴이해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방으로 들어가니 비린내 때문을 코를 감싸 쥐고 구역질이 나려 했으며, 이윽고 밥을 차려 왔는데 소반이며 그릇이 모두 고약한 냄새가 나서 가까이할 수가 없었다. 주인 할아범과 할멈이 곁에서 수저를 대라고 권하기에 먹어보려 했지만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이에 내가 몹시 놀라, 窮鄕 벽지에는 반드시 별종의 추한 인종이 세상에는 알려지지 않은 채 살고 있나 보다 생각했다.

그후 사람들에게 물어본즉 이곳이 이른바 바닷가의 단호란 것으로 箕城에만 열한 곳이 있으니, 餘音·栗峴·鷗尾·蟹津·正明·朴谷·表山·長汀·陶峴·望洋亭 등이며 사동도 그중 하나라 했다.” 「해빈단호기」이다. ‘단호’는 바닷가에 사는 미개인의 집이란 말이다. 이 당시까지도 언어가 통하지 않는 종족들이 우리나라 도처에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은 「기성풍토기」로, 당시 경상도 평해의 풍토와 풍속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기성의 땅이란 멀리 가봤자 60리를 벗어나지 못하여 동쪽은 바다를 끼고 있고 서쪽, 남쪽, 북쪽은 높은 산들이 많다. 바닷가에는 모래와 돌이 많고 너른 평야라곤 없으며, 논과 밭이 산과 구릉 사이에 섞여 있으므로 부유한 사람일지라도 파종해 겨우 대여섯 섬을 수확할 뿐이고, 가난한 사람들은 한 섬도 채 수확하지 못한다.

토질이 척박해 곡식을 심기에 적합하지 않으니 분뇨를 거름으로 주지 않으면 양식을 하기도 어렵다. 따라서 집집마다 거처 가까운 곳에 뒷간을 지어두는데, 이는 남들이 분뇨를 훔쳐갈까 염려해서이다. 집들은 나무껍질로 지붕을 이었고 뜰이 없어 낮에도 집 안에서 해를 볼 수 없으며, 누에치기를 좋아하지 않아 삼을 자아서 옷을 짓는데, 사람들은 尊卑를 막론하고 모두 시든 뽕잎 빛 누른 옷을 입는다.

물은 맑지도 차지도 않으며 독한 ?氣가 항상 자욱이 피어 올라 병이 들었다 하면 거의 일어나지 못하는 탓에 온 고을에 노인이 적다. 매양 동북풍이 불거나 바다가 울면 비가 그치지 않고, 겨울에는 눈이 내리지 않다가 봄이 된 뒤에 정강이가 묻힐 정도로 많은 눈이 내리므로 겨울은 날씨가 춥지 않고 봄이 돼야 비로소 춥다. 무릇 한 달을 두고 볼 때 비가 오지 않으면 바람이 불고 바람이 불지 않으면 비가 오며, 바람도 불지 않고 비도 내리지 않으면 안개가 끼므로, 화창한 날은 겨우 4, 5일뿐이다.

경상도 평해의 풍토와 풍속
이 지방의 풍속이 귀신을 숭배해 집집마다 작은 사당을 짓고 紙錢이며 삼베를 걸쳐두고는 드나들 때마다 반드시 기도하니, 곳곳마다 모두 이러하다. 따라서 여인으로서 다소 의식이 풍족한 자는 모두 무당이다. 姓氏는 孫씨와 黃씨가 많고 명색이 향교에 소속됐다는 이들도 글은 모르고 모두 활을 잡는다. 인심은 순박한 듯하지만 실상은 싸움과 소송을 좋아한다.

사람을 안장할 때는 대다수 산꼭대기에 묻고, 혼인을 할 때는 굳이 먼 곳에서 배필을 구하지 않으며, 禮法은 소략하나 嫡庶의 구별은 분명하다. 민가 근처엔 대부분 대, 탱자, 모과, 호도 등을 심고, 과일로는 감, 배, 대추, 밤, 복숭아, 살구, 능금 등이 있으나 모두 맛이 좋지 않다. 꽃으로는 진달래, 철쭉, 동백이 있으나 모두 빛깔이 옅고 해당화만이 가장 흐드러지게 핀다. 왕왕 매화가 일찍 피는데 가지가 촘촘한 것이 마치 산살구와 같다. 생산되는 어종은 은어, 복어, 광어, 방어, 대구, 문어 등인데 맛이 그다지 좋지는 않다.”

 

 


이상하 한국고전번역원 고전번역교육원 교수
필자는 고려대에서 박사학위를 했다. 민족문화추진회 부설 국역연수원 연수부를 마쳤으며, 고전번역연구소 소장, 퇴계학연구원 책임연구원 등을 지냈다. 『아계유고』등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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