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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 만지는 사람은 흙이 선생이죠”선조들의 숨결 전하는 一念으로 그릇 빚어
“흙 만지는 사람은 흙이 선생이죠”선조들의 숨결 전하는 一念으로 그릇 빚어
  • 김영철 편집위원
  • 승인 2013.06.17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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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화의 源流를 지키는 사람들 8. 熊川 찻사발 최웅택 사기장

▲ 웅천 정호 차사발. 사발 굽에 유약이 뭉쳐진 망울인 ‘매화피’가 선명하다

사발은 예로부터 전래돼오는 우리의 생활 그릇으로 그 연원은 깊다. 문헌상으로 고려시대의 청자로부터 보이기 시작하며 조선시대에는 백자 또는 분청사기로 만들어졌다. 아래는 좁고 위는 넓게 만들어져 밥이나 국그릇, 찻그릇으로 사용된 생활용기였고 절에서 부처에게 올리는 차 공양 그릇이나 제기로도 쓰여 졌다. 이 그릇 앞에 흔히들 ‘막’을 붙여 막사발이라고 한다.

막걸리의 ‘막’처럼 막 만들었고 막 쓰는 그릇이라 해서 그렇게 불리는데, 밥그릇이나 국그릇으로 쓰다 금이 가면 막걸리 잔, 심지어는 개밥그릇으로도 썼다. 이 그릇은 예로부터 우리들 주위에 흔하게 있어온 터라 그 가치나 중요성이 무시돼온 게 사실인데, 이 ‘조선사발’의 가치와 그 아름다움이 부각된 것은 우리나라에서가 아니라 茶문화가 발달한 일본에서였다.

조선사발이 임진왜란을 전후한 16세기 후반부터 일본 茶道의 찻사발로 엄청난 각광을 받은 탓이다. 당시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에서 가져간 찻사발을 ‘이도다완(井戶茶碗)’이라 부르며 참모들과 茶會을 열었고, 그 때 사용한 찻사발이 일본 국보 26호로 지정돼있는 ‘기자에몬 이도다완’이다. 그때부터 조선 사발은 이도다완으로 불리고 있으며, 일본에서는 최상의 찻그릇으로 칭송받고 있다. 이 때 만들어진 조선 사발은 한국에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 최상의 조선사발은 모두 일본에 있다.

우리에게 낯선 조선사발, 일본에선 국보로
이처럼 우리가 기록하거나 전해주기도 전에 일본으로 건너가 다른 각도에서 그 정체성이 부각된 이도다완을 우리는 그 본연의 이름도 모른 채 막사발이라고 부른다. 이 사발을 400년 만에 재현하면서 조선 사기장의 맥을 이어가고 있는 사람이 조선사발 유래지의 한 곳인 웅천도요지에서 ‘웅천 찻사발’ 재현에 힘과 노력을 다하고 있는 최웅택(58) 사기장이다. 경남 진해의 웅천 보개(배)산 정골[井谷] 계곡에 위치한 웅천도요지의 옛 가마터에서는 1500년대 초부터 사발을 굽기 시작했으며 1598년 100년을 채우지 못하고 폐요가 된다. 정유재란이 끝날 무렵 웅천도요지의 도공들과 그 가족들 125명이 퇴각하는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일본으로 끌려가면서 가마터의 불이 꺼졌고, 그 명맥마저 중단된 것이다.

도요토미가 최상의 찻사발로 극찬한 이도다완은 당시 웅천도요지에서 만들어진 것이 거의 확실하다. 지난 2002년 이 곳을 발굴 조사한 결과 모두 6기의 가마터가 확인됐으며 분청사기와 회청사기, 백자, 옹기, 이도類 등의 유물이 출토됐는데, 이 가운데 이도類는 당시 도요토미가 가져간 이도다완의 원류로 추정됐기 때문이다. 일본이 조선 사발을 이도다완이라고 부르는 배경에는 보개산 정골에서 생산된 사발이라는 의미가 보태진다. 이런 관계로 일본 이도다완의 원류가 바로 웅천도요지이고, 최웅택 사기장은 웅천 찻사발의 맥을 이으며 조선 도공의 도자문화 부활을 염원하는 장본인이다. 최 사기장은 진해 보개산 인근의 주포마을이 고향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보개산 일대를 뛰놀며 산기슭 곳곳에 흩어져 있던 사발 사금파리를 자연스럽게 접하며 성장했다.

그 사금파리 도편들로부터 어떤 강렬한 끌림을 받은 최 사기장은 30여년 전 어떤 운명의 흐름을 따라 보개산 기슭으로 돌아와 전통 가마를 묻고 불을 지피게 됐으며, 옛 가마터 곳곳에 말없이 널브러져 있는 도편들을 스승으로 삼아 선조 도공들의 땀과 발자취를 헤아리는 한편으로 국내와 일본의 각종 문헌들을 찾아 연구를 거듭한 끝에 400년 전 선조 도공들의 혼과 숨결이 깃든 웅천 찻사발을 재현하는데 성공한다. “말 없는 사기 조각이 스승이고, 옛 가마터가 학습장이었지요.

 다른 지역에 가서 찻사발 만드는 일을 배웠다면 훌륭한 선생님의 제자가 될 수 있었겠지만 그렇게 하지를 않았습니다. 웅천 사기장이 아닌 분께 배운다면 저는 웅천의 후예가 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나는 죽어도 웅천의 방식대로 하자는 의지가 있었고 옛 선조들의 그 방식대로 따라간 것이지요." 그는 웅천 사기장의 맥을 이으려는 의지의 배경과 관련해 이런 얘기를 들려준다. “보개산을 오르락내리락하던 어릴 적 어느 날, 산모퉁이에서 낯선 사람들을 발견한다.

그들은 땅을 파고 있었다. 호기심에 가까이 다가갔다. 우리나라 사람이 아닌 일본인이었다. 외국인을 처음 만난 반가움에 팔을 걷어붙이고 땅 파는 일을 거들었다. 그러나 그 후 일본인들이 도굴꾼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차올랐다. 그 일 이후로 산에서 보초를 서다시피 했다. 수상한 사람들이 나타나면 돌을 던져 내쫓았다.” 이런 경험과 함께 이 곳 보개산에서 400년 전 일어난 슬픈 얘기에 대해서도 들었다. 이곳 웅천 사기장을 포함한 125명의 도공과 그 가족들이 왜군에게 끌려 일본 나가사끼 히라도 섬으로 납치된 사건이다. 그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작은 가슴에 강한 분노와 어떤 책임감이 일렁거렸다.

▲ 최 사기장이 30여년간을 웅천도요지에서 주워모은 사발 사금파리들.

옛 陶片 스승 삼아 熊川도공의 맥 이어
그러나 일은 쉽지가 않았다. 군 제대 후, 작심한대로 보개산으로 들어와 웅천 사기장의 뒤를 잇는 일에 착수한다. 보개산 금곡요지 근처에 컨테이너를 설치하고 가마터에 살다시피 했다. 그러나 가마터를 들여다보는 것만으로 가마를 재현할 수는 없는 일. 가마를 빚는 게 급선무였다.

인근의 사기장을 찾아 가마의 원리를 묻고 겨우 가마를 만드는데는 성공했으나 그 이후도 고난의 연속이었다. 사발 반죽을 넣고 불을 때는 족족 모두 깨져 버렸다. 흙이 문제였던 것이다. 웅천의 옛 사기장이 보개산 흙을 썼다고 확신한 그는 매일 산을 헤매고 다녔다. 하지만 몇 해가 지나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헤매다 칠흑같은 밤이 돼 밤길을 내려오다 굴러 골반을 크게 다친 적도 있다. 그렇게 보낸 시간이 5년이다.

“다른 지방에서 흙을 사다 쓰는 사기장이 많았습니다. 나도 그랬으면 진작에 성공했을지 모르지요. 그러나 다른 지역 흙으로 빚으면 그 건 더 이상 웅천 사발이 아니지 않습니까. 포기하면 포기했지 그런 타협은 하기 싫었습니다.” 그는 실제로 포기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사기장의 꿈을 접고 도회지로 나가려 작정하고 산으로 마지막 인사를 하러 갔던 날, 그는 천우신조로 웅천 사발의 소지(소재)로 쓰이는 백·황·적 세 가지 빛깔을 가진 보배산의 ‘삼백토’를 찾게 된다. 산에서 만난 어떤 도굴꾼으로부터 알게 된 보배산의 어느 곳이었다.

포기하려던 순간에 찾은 보배산의 ‘삼백토’
“그가 일러준 곳에서 땅을 팠더니 정말로 백토가 나오더군요. 자루에 가득 담아서 급한 마음에 잡물을 없애는 수비도 제대로 하지 않고 일단 반죽해 구웠습니다. 그런데 거짓말처럼 반죽이 터지지 않는 겁니다. 그날 가마를 부둥켜안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최 사기장이 보배산에서 이 삼백토를 담아오는 일도 중요한 일상의 하나다. 그는 아침 여섯시 반 정도면 작업실로 향한다. 지난 밤 마무리하지 못했던 일을 끝낸 후에는 배낭을 메고 보개산을 오른다. 반드시 챙겨가는 게 있다. 소주 한 병이다. 삼백토가 있는 지점에 도착하면 소주를 흙 위에 뿌리고 파기 시작한다. 그는 흙을 많이 캐지 않는다.

하루 한 배낭, 많으면 두 배낭쯤 캔다. 한 배낭 흙으로 만들 수 있는 찻사발을 대략 10개 정도. 캐온 흙은 소나무 가지에 걸러 물에 넣어 잡물을 없애는 수비질을 한다. 수비질을 마친 흙은 보름에서 두 달 정도 숙성시키면 점력이 생긴다. 숙성된 흙으로 찻사발을 빚고 성형을 한 뒤 일주일 정도 말려서 초벌구이를 한다. 초벌구이를 한 찻사발에 유약을 발라 구우면 비로소 찻사발이 완성된다. 한 4개월 정도 가마작업을 하면 1천점 정도의 찻사발이 나온다. 이 가운데 살아남는 것은 불과 수십 점 정도다. 나머지는 깨 버린다. 그는 철저하게 웅천 찻사발의 재현만 고집하고 있는 사기장이다. 그의 재현품도 물론 웅천 찻사발이지만, 그게 헤프고 헛되이 밖으로 나가 굴러나가 우습게 보이는 것을 경계한다. 그래서 그는 일부를 제하고 과감하게 깨버린다.

그의 작업장인 ‘웅천요’에는 옛 도기 파편인 사금파리가 가득하다.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많다. 지난 30년 동안 보개산에서 주워 모은 것이다. 그 가운데 그가 가장 아끼는 유물이 있다. 웅천 옛 도공들이 반죽할 당시 흙으로 굳어 남아있는 손자국과 발자국이다. 최 사기장은 이 사금파리를 가슴에 안고, 그 속에서 잠들기도 한다.

▲ 일본국보26호로 지정된 기자에몬 이도다완. 옛 웅천도요지에서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자다가도 일어나서 사금파리를 살핀다. 그는 그 속에서 옛 웅천 도공들의 숨결을 느끼며 배운다. 도예를 배운 적이 없는 최 사기장에게는 그만한 스승이 없다. 흙이며 유약, 물레질, 불의 강약 등 사발을 완성하는 모든 것을 순전히 사금파리를 보며 익혔다. 사발 굽에 맺힌 유약 망울을 일컫는 ‘매화피’ 만드는 법, 빙열(찻사발에 지진처럼 고르게 분포되어 있는 균열) 만드는 법도 혼자 공부하며 익혔다. 최 사기장은 선조가 했던 옛 방식 그대로 사발을 만든다. 그는 조선시대 도공들처럼 지금도 발 물레로 찻사발을 만든다.

그가 발 물레를 고수하게 된 것은 웅천도요지 인근에 마련했던 첫 작업실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기도 했거니와 조선 도공처럼 혼이 담긴 찻사발을 만들기 위해서는 발 물레로 빚어야 한다는 그 나름대로의 정신이 박힌 뚝심 때문이다. “발 물레질을 하니 조선의 미를 그대로 살릴 수 있는 게 아닐까 합니다. 그릇은 물레가 돌아 가는대로 만들어집니다.

혼신의 힘을 기울여 물레질을 하니 그 기운이 찻사발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지요.” 최 사기장은 웅찬 찻사발을 재현하는 작업과 함께 중히 여기며 하는 일이 하나 있다. 왜군에 의해 강제로 고향인 웅천땅을 떠나야 했던 옛 조선 도공들의 영혼을 기리는 일이다. 그는 매년 10월의 마지막 토요일, 조선 도공들이 끌려갔던 일본 나가사끼 히라도 섬과 웅천 보개산을 번갈아가며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피랍중 험한 뱃길에서 죽은 도공과 그 가족들을 위해서는 ‘해상 원혼 추모제’도 지내고 있다. 히라도에 끌려간 조선 도공들은 그 곳에서 망향의 아픔 속에 죽어 그 곳 공동묘지에 묻혔다. 어느 해인가 최 사기장이 그 곳을 참배했는데, 벚꽃이 묘소 주변에 가득한 것을 보고는 또 다른 아픔을 느낀다. 그후 그는 사비를 들여 묘소 주변의 꽃을 우리나라 무궁화로 바꿔 버렸다.

웅천 찻사발의 아름다움과 가치
웅천 찻사발의 아름다움과 그 가치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최 사기장은 어떤 기교와 장식도 하지 않고 무심으로 빚어진 자연미가 웅천 찻사발에 담겨있다고 말한다. “웅천 찻사발은 그릇의 선이 아름답고 단아하며 허리부분이 깊은 완형으로 허리에서 몸통에 걸쳐 둥글게 부풀어있어 꾸밈없는 자연스러움과 소박함이 그 으뜸으로 치지요.” 웅천 찻사발 안쪽에는 둥근 차앙금 자리가 있어 다른 찻사발과 구별이 된다. 일본인들은 그것이 작고 뚜렷하게 있는 것을 중히 여기는데, 특히 이를 작은 옹달샘이 비치는 것에 비유해 샘물이 솟아나오는 듯한 신비감을 갖는다고 하면서 그 아름다움에 반하고 있다.

그는 웅천 찻사발을 처음 만들 때나 지금이나 한 마음이다. 웅천 찻사발을 만든 선조 도공들의 정신과 그 속에 깃든 숨결을 고스란히 전하고 싶은 그 일념말이다. 웅천 사기장의 뒤를 잇는 1세대 임을 자부하는 최 사기장. 그는 지금 代가 끊기지 않고 이어져 나가기를 바라고 있다. “그래서 후학양성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저에게서 배운 한 10여 명 정도의 제자가 밖으로 나가 웅천 찻사발을 재현하고 있습니다. 현재도 7명의 제자가 웅천요에서 함께 동고동락하며 배우고 있습니다.” 최 사기장은 여러 대학들에서 교수직 제의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모두 거절했다. “학교에서 가르칠 것은 교수들이 해야 하고, 내가 해야 할 일은 내가 하면 됩니다.

찻사발 만드는 나는 흙 만지는 사람입니다. 흙 만지는 사람은 흙이 선생이고 흙 있는데가 공부하는 곳이지요. 나를 배우려는 사람들에게는 흙을 보는 심성과 흙의 교훈을 통해 우리 조상 도공들의 정신을 가르치면 되지요. 굳이 대학에 갈 필요가 없지요.” 최 사기장은 지난 해 11월, 그의 작업실인 웅천요에 도자기박물관을 개관했다. 웅천 찻사발을 알리기 위해 그가 바랐던 사안이다. 다른 한 가지의 과제가 있다. 30년 동안 주워 모은 도기 파편, 즉 도편을 함께 모아 전시하는 도편박물관을 짓는 일이다. 그 자신 도편을 통해 웅천 찻사발을 배웠기 때문에 후학 또한 그가 평생의 품을 들여 모은 도편으로 웅천 찻사발을 공부하기 바라는 염원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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