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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이 죽은 사회, 쪼잔하게 따지는 철학, 그래 우리는 살만해졌는가?
‘덕’이 죽은 사회, 쪼잔하게 따지는 철학, 그래 우리는 살만해졌는가?
  • 최재목 영남대ㆍ철학과
  • 승인 2013.06.17 13: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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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목의 유랑ㆍ상상ㆍ인문학 39 바티칸 박물관의 「아테네 학당」앞에서

바티칸 박물관에 있는 그림 '아테네 학당'
로마의 5월, 새벽길을 걸어본다. 한때 고전이 있었던 자리. 아직 잠에서 덜 깨어나 어둑하다. 아우렐리우스의 말대로 ‘건강한 눈이라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단지 푸른빛만 보고자 한다면 그것은 이미 병든 눈이다.’(『명상록』, 유동범 역, 247쪽). 살아있는 눈으로, 오늘 라파엘로의 그림「아테네 학당」을 보러가는 날이다.

어릴 적 들었던, 남정희의 노래「새벽길」이 생각난다. ‘사랑은 하늘가에 메아리로 흩어지고/그 이름 입술마다 맴돌아서 아픈데/가슴에 멍든 상처 지울 길 없어라/정답던 님의 얼굴 너무나도 무정해/울면서 돌아 서는 안개 짙은 새벽길’. 봄날은 어느새 스산히 소멸해갈 터. 여름을 기다리며 내 연구실을 홀로 지킬 고국의 뚜껑이 열린 낡은 선풍기처럼, 인생도 뜨거움을 식히며 뚜껑이 열린 채 홀로 돌다 망가져버리고 마는 걸까. 사랑도 없이 내 영혼 속에 차갑게 쌓여만 갔던 책들, 지식들, 개념들. 결국 내가 지킨 것은 알음알이의 납골당인가.

‘뜨겁던 님의 입김, 너무나도 차거워…….’(「새벽길」2절). 나는 죽은 철학자들의 싸늘한 영혼의 입술을 지키는 열정 없는 노동자인가. 허허! 아우렐리우스가 나를 씁쓸히 비웃는다.

‘모든 인간의 생명은 영원하지 않으며 그것마저도 끝나가고 있다. 그런데도 당신은 스스로를 존중하지 않고, 오히려 타인의 영혼에 자신의 행복을 의탁하고 있다.’(28쪽). 그는 또 조언한다. ‘다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에 대해 무관심하다고 해서 불행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속 움직임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은 반드시 불행해진다.’(28쪽) 죽은 자들의 썩은 뼈나 지키지 말고 나 자신이나 잘 살피란다.

아침을 먹자마자, 나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나라 ‘바티칸 市國’(바티칸시티)으로 간다. 노자가 말한 바로 그 ‘작은 나라 적은 백성(小國寡民)’의 땅인가. 아니다! 이곳은 작지만 가톨릭교인 8억 명을 다스리는 대국이다. 바티칸 시국에 겨우 발을 들여놓자마자, 성베드로(산피에트로) 대성당으로 입장하는 꼬리에 꼬리를 문 줄이 되고 만다. 주변으로 포진한 로마 최고의 보물창고를 다 둘러보려니 시간은 없고 마음은 급하나, 무언가를 기다리는 일도 때로는 즐겁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나라 ‘바티칸 시티’. 작지만 가톨릭교인 8억 명을 다스리는 대국이다. 바티칸 시국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성베드로 대성당으로 입장하는 꼬리에 꼬리를 문 줄이 되고 만다. 사진=최재목

드디어 대성당에 입장. 미켈란젤로 24세 때의 걸작「삐에타」를 만난다. 아, 젊은 나이에 어떻게 돌을 저리도 흙처럼 주물러 댔을까. 또 50세가 넘었을 성모의 얼굴은 10대인 양 저리도 앳되기만 할까. 죽은 젊은 예수를 안고서도 슬픔으로 사무치기는커녕 고요와 엄숙만이 감돈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다. ‘숨은 것 보다 더 보이는 것이 없고, 자그만 것보다 더 드러난 것이 없다(莫見乎隱, 莫顯乎微)’(『中庸』)는 것이 저런 뜻일까. 눈부시게 빛나는 내면의 고요한 순결. 바로 죄 없는, 영원한, ‘처녀’의 모습 그것이다.

담벼락을 돌아 바티칸 박물관으로 간다. 이탈리아 원정 때 나폴레옹이 싹쓸이 해 간 이탈리아의 예술품들이 비엔나 회의(1816년) 결과로 이곳에 반환돼 전시됐다는데, 또 줄을 서야 한다. 웬 사람들이 이리도 많을까. 벽돌로 쌓은 높은 담벼락의 흠집에 뿌리 내린 풀들, 그 생명의 찬란함을 우러러본다. 아, 천천히 박물관에 들어선 순간, 직감한다. 반복, 역주행은 불가! 떠밀리면서 그냥 전진 뿐.

하지만 나는 벨베데레 궁전 뜰의「라오콘」상을 놓치지 않는다. 트로이의 사제 라오콘이 신에게 벌을 받아 그의 두 아들과 함께 바다에서 올라온 뱀을 상대로 사투를 벌이는데, 굵고 긴 뱀에 칭칭 감겨 죽어가는 나신은 처절하기만 하다. 그것도 잠시. 시스티나 예배당에서 만나는 미켈란젤로의 천장화「천지창조」와 제단 위의 벽화「최후의 심판」은 장엄함에 놀란다. 천장에 붙은 벌거벗은 몸뚱아리들은 연신 뚝뚝 떨어져 내릴 듯, 그 육감에 나는 푹 빠져든다.

그 무엇보다도 내 눈은, 라파엘로의 벽화가 가득한 ‘파엘로 방’들 가운데, ‘서명(署名)의 방’(역대 교황들이 문서에 서명하던 방)에 그려진「아테네 학당」에 딱 멎는다. 왼손에『티메오』를 들고 오른손의 한 손가락으로 하늘(→이상)을 가리키는 플라톤. 왼손에『에티카』를 들고 오른손은 수평으로 손짓(→현실)하는 아리스토텔레스. 소크라테스는 중앙을 약간 벗어나 사람들과 이야기에 열중인데, 디오게네스는 정면의 계단에 다리를 뻗은 채 비스듬히 누워 혼자 묵묵히 무언가를 읽고 있다. 필로소피아(philosophia)를 찾던 철학자들. 그들은 죽었지만, 그림 속에서 아직 건재하다.

‘지혜’(智. sophia)에 대한 ‘사랑’(愛. philo)은 서글픈 뜨거움으로 나를 응시하나, 아서라! 지금 ‘德’은 죽고, ‘인간됨’의 이야기는 하늘가에 메아리로 흩어진 지 오래다. 말끝마다 시비나 걸며, 말이 되는 지 논리나 따져대는, 쪼잔한 철학. 그래서 우리는 살만해졌는가. 지혜는 기억의 공동묘지에 쓸쓸히 묻혔다. 덕을 외치던 사람들의 이름은 더 이상 강의실의 입술마다 아프게 맴돌지도 않는다. 대학의 홈페이지에 쌓여 가는 것은 그저 논문목록 뿐. 그런 지식의 총량은 우리들 가슴에 멍든 상처만 남기고 있다. 한 때 스승이라 여겼던 책들, 글씨들. 나는 그네들을 조용히 마음속에서 불태운다. 굿바이! 정든 로마를 떠난다.

최재목 영남대ㆍ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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