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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是非 가리는 사회과학하다보니 內面 몰라 자기성찰 수단으로 붓을 잡았지요”
“평생 是非 가리는 사회과학하다보니 內面 몰라 자기성찰 수단으로 붓을 잡았지요”
  • 김영철 편집위원
  • 승인 2013.06.10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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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_ ‘孟子글귀’ 夫婦서예전 여는 송복 연세대 명예교수

 

▲ 송 복 교수는 서울대에서 정치사회학으로 박사학위를 했다. <사상계>, <서울신문> 기자를 지냈고,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하다가 2002년에 정년퇴임했다. 대한민국 사회학의 토대를 닦은 제1세대의 대표적 학자로, 1970년대 후반부터 왕성한 저술과 신문칼럼을 통해 한국 보수주의의 사상적 근거를 마련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조직과 권력』, 『 동양적 가치란 무엇인가?』, 『 한국사회의 갈등구조』 등이 있다. 특히 정년 후 임진왜란의 역사적 기원과 영향을 밝힌 『서애 유성룡: 위대한 만남』을 발표해 한국사와 동양학으로 학문의 영역을 넓혀 가고 있다. 사진=윤상민 기자

 


그의 불광동 서재는 묵향으로 가득했다. 묵향과 아울러 사방 벽과 마루, 탁자 등 이곳저곳에 붓글씨들이 걸려있고 널려있다. 언뜻 정돈되지 않은 듯 보여 지나, 반듯한 글귀들에서 전해지는 느낌은 예스럽고 푸근하다. 서예전을 준비 중인 송복(76) 연세대 명예교수는 헐헐한 작업복 차림이다. 카랑카랑한 원칙과 비판정신을 고수했던 사회학자로서의 면모와는 딴판인, 그의 말 마따나 50여년을 '붓 장난질'해온 자유로운 글쟁이의 모습이다.

오는 19일부터 25일까지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서 개최되는 송 교수의 서예전은 맹자에서 골라낸 160여개의 글귀를 전시하는 ‘孟子 글귀展'이다. 송 교수는 지난 1997년 가을에 첫 서예전을 열었는데, 그 때는 공자의 『논어』에 나오는 150 여개의 글귀를 골라 쓴 ‘논어 서예전’이었다. 송 교수의 서예전은 그때나 지금이나 동갑내기인 부인 하경희 여사와 함께 한다. 그러니까 ‘부부 서예전’이다. 송 교수에게 한문이나 서예는 일상적이다. 어렸을 적부터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경남 김해 진례마을에서 나고 자란 송 교수의 증조부가 한학자를 겸한 진사였다. 그러니 타고날 때부터 보고 듣고 쓰고 한 것이 한문이고 붓글씨다. 정식으로 한문을 배운 것은 아니었지만, 정식 서예는 서울대 문리대 1학년 때쯤 그 맛을 알다가 지난 1987년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1997년 무렵 서예가이며 서예이론에 정통한 玄庵 정상옥 박사(초대 동방대학원대학교 총장)에게 사사한다. 그에게 한문은 어떤 것일까.

그리고 한문은 그의 학문인 사회학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한문은 인문학이다. 인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상상력인데, 한문을 하면 상상력이 높아진다. 그래서 한문을 좋아하며 즐겨 읽고 쓰고 있다.” 송 교수는 이와 관련해 자신의 경험적인 관점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도 곁 들인다. “영어는 아무리 익히고 세익스피어 등의 좋은 글을 수 백 번 읽어도 입에서 단물이 안 나온다. 그러나 한문은 그렇지 않다. 예컨대 蘇東坡의 赤壁賦를 한 일천 번 읽어보라. 입 안에 단 침이 고인다. 단물이 나온다.”

“한문을 읽으면 단물이 나온다”
송 교수에 따르면 학문엔 3단계가 있다고 한다. 形臨과 意臨, 그리고 背臨의 단계다. 형임은 모방이다. 쉽게 이야기 하면 논문 등을 남의 것을 읽고 그 방식으로 자기 것을 쓰는 것이다. 그 다음 배임은 모방한 것의 의미를 깨치는 것이고 마지막으로 모방한 것을 등져 버리고 자신의 것을 써야하는 게 배임의 단계이다. 형태를 베끼고, 뜻을 베끼고, 그리고 나중엔 자신의 것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학문의 완성을 위한 이 마지막 배임을 하기 위해서는 상상력이 풍부해야 하는데 송 교수는 그래서 한문이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송 교수에게 한문과 이를 바탕으로 한 서예는 사회학자로서 살아온 인생에 대한 자기 성찰의 수단이기도 하다. 송 교수는 좀 특이한 경력과 이력을 지닌 학자이다. 말하자면 명망 있는 사회학자로서의 발자취가 그냥 공부만해서 자리 잡은 남들과 좀 다르다. 그는 저널리스트 출신이다. 1959년 대학 졸업을 앞두고 사회에 발을 내디딘 자리가 당시 장준하 선생이 발행하던 대표적 반체제, 진보성향의 잡지 <사상계>의 기자였다.

그러다 잡지를 직접 만들어보겠다는 호기가 발동해 직접 잡지를 창간하게 되는데, 그 잡지가 바로 <청맥>이었다. <청맥>은 이후 공안사건에 휘말린 대표적 매체가 된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청맥>을 북한의 대남지하조직인 통일혁명당의 기관지로 발표했는데, 송 교수가 손을 뗀 후의 일이라 그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그렇지만 그도 중정에 끌려가 보름간 시달려야 했다. 그 후 지난 1973년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가 되기까지의 과정도 순탄하지 않은데, “살아온 과정도 그렇지만, 평생 시시비비만 따지는 사회과학을 하다 보니 정작 자신의 내면을 잘 모르고 있었다.

자기 성찰을 위해 붓을 잡았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송 교수의 이번 서예전의 주제는 孟子다. 왜 『맹자』인가. 물론 맹자의 글이 좋아서일 것이지만, 한편에는 송 교수의 사회과학자로서의 예리한 관점이 담겨져 있다. 그는 “『맹자』를 읽으면 내일의 중국이 보인다. 오늘의 북한도 그 모습 그대로 나타난다. 2천3백 년 전의 『맹자』에 담긴 글귀가 그것이다”라고 서예전 도록 서문에서 말하고 있다. 송 교수에 따르면 중국은 예나 지금이나 人義라는 가치가 아닌 利益이라는 利에만 집착해온 나라로, 이는 『맹자』의 「왕혜왕편」에 나온다. 유교국가로서의 이상은 있으나 현실과 실천이 없는 중국이다.

중국역사에서 보는 유교적 현실은 철저하게 폭군적이며 폭권적이며 폭압적이었다. 패권주의로 요약되는 중국의 역사에서 민생은 없었다고 송 교수는 말한다. 흔히들 말하는 牧民官이라는 용어가 이를 대변한다. 民을 짐승이나 다름없이 보았다는 것이다. 맹자에는 군주들이 ‘짐승을 몰아 사람을 잡아먹게 한다’는 率獸而食人이라는 표현이 수 없이 나온다.

철저한 인명경시와 ‘사람 죽이기’의 역사가 중국이라는 것이다. 인류 보편적 가치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이 같은 중국적 현실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고 그로써 내일의 중국 또한 利를 위해선 어떤 가치도 거부하고 파괴할 것이 틀림없다는 게 송 교수의 전망이다. 북한 또한 마찬가지다. 맹자에 擧지 首蹙알 이라는 구절이 있다. 백성들이 군주 등 윗사람들의 말만 들어도 머리를 아파하고 이마를 찌푸린다는 것이다. 백성들의 삶이 너무 곤궁하고 백성들의 재산은 모두 빼앗겨 집에는 쌀 한 톨이 없는데도 군주와 윗사람들은 그들 홀로 자기 자리만 즐기고, 오로지 자기들 몸만 받들고 있다(民窮財盡 南面之樂 獨以自奉其身)는 것인데, 이게 바로 오늘날의 북한의 모습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맹자』를 보면 중국과 북한이 보인다

▲ 지난 1997년 가을, 첫 서예전 때의 작품집에 수록된 論語 擁也 18편의 귀절. “知之者 不如好者 好之者 不如樂之者(알기만 하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
송 교수는 1980년대 이후 주요 일간지 칼럼 등을 통해 사회의 주요 이슈들에 대해 ‘보수적 가치’에 기반한 자신의 목소리를 가감 없이 내온 대표적인 지식인이다. 따라서 반대편에서 그를 보는 비판적인 시각도 적지 않다. 그는 그러나 그런 시각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어떤 시류에도 굴하지 않고 할 말은 하는 사회과학자로서의 역할과 양심은 견지하겠다는 소신이다.

이와 함께 그는 ‘자기 객관화’로서의 지식인을 강조한다. “내 글에 항상 반론이 많다. 신경 쓰지 않는다. 지식이라는 것은 多측면적이고 관점이 많다. 시각이 여러 가지인 데, 나는 지식인이 어떤 측면, 어떤 시각을 갖든지에 상관없이 스스로를 객관화시킬 수 있는 게 필요하다는 거다. 내 위치, 내 입장, 내 처지에서 생각하기 마련인데 그 걸 떠나서 내 입장이 아닌, 나로부터 나를 분리시켜 저쪽 벽에다 붙여놓고 마치 거울속의 나를 들여다보듯 나를 보는 것이다.

이 게 자기초월로서의 자기객관화이다. 지식인에게는 가장 중요한 덕목 중의 하나라고 본다.” 이런 관점에서 송 교수는 우리 지식사회의 황폐화를 지적한다. 모두 자기 위치에 고립되고, 자기 입장에 매몰되고, 자기 처지에 빠져있는 지식인들만 득실거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진보를 표방한 좌파만 橫行하고 있고, 진정한 보수주의자도 없다는 진단에 이른다.

송 교수는 자신의 붓글씨보다 아내인 月亭 하경희 여사의 글을 더 높이 친다. 겸손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자기보다 서예의 길에 더 먼저 입문한 것도 그렇고, 무엇보다 한학자이며 서예가인 故 空亭 김윤중 선생의 제자라는 점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송 교수의 학문과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에 한문 등 고전과 서예에 대한 천착이 더해지면서 느껴지는 모습이 있다. 바로 조선의 선비다. 그의 아호는 ‘心遠’이다. 명사형이 아닌 조건절 서술형태의 독특한 아호다. 陶淵明의 「雜詩」에 나오는 ‘마음이 멀어지면(心遠) 있는 곳 자체가 외진 곳(地自偏)’에서 따온 글이다. 그가 견지하고 있는 선비정신에 딱 들어맞는 호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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