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5 21:50 (목)
서양 중심적 기억담론은 한국에도 유효할까?
서양 중심적 기억담론은 한국에도 유효할까?
  • 김미경 히로시마시립대 평화연구소
  • 승인 2013.06.04 15:2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국제학술지 , ‘한국인의 기억’ 특집호 발행

영국 세이지(Sage)출판사에서 발행된 <기억연구저널(Memory Studies Journal> 4월호는 조금 특별하다. 바로 '한국인의 기억' 특별호를 표방했기 때문이다. '기억' 문제는 인류학, 사회학, 정치학, 문학 등에서 광범위하게 논의되고 있는 사안이기도 하다. 권헌익 캠브리짇 교수 등 8명의 국내외 학자가 참여해 서양중심적 기억연구를 경험적으로 검증하고자 한 이 작업은 새로운 기억 연구를 모색하는 데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한국인 기억' 특별호 편집장 김미경 교수가 관련 내용을 정리, 소개한다.


우리는 기억의 시대를 살고 있다. 인간과 역사는 기억으로 매개되고 기억되지 않는 역사는 존재의미를 상실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으면서 ‘우리가 무엇을 기억하고 망각하는지,’ ‘기억과 망각의 메커니즘은 무엇인지’ 등의 의문에 관한 탐색이 활발히 진행 중이다. 개인으로나 집단으로서 우리는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끊임없이 과거를 기억하고 망각하는 과정을 되풀이한다.

개인과 집단은 많은 기억을 공유한다. 기억의 1차 행위자는 물론 개인이지만 한 개인은 제도와 여러 집단과의 관계 속에서 기억을 형성, 저장, 보존, 전수하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개인의 기억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역사적 사건들이 우리 삶에 많은 굴곡을 남기면서 교직되는 것처럼 사회사와 개인사는 서로 어우러진다.

미시와 거시의 교직을 전제로 하더라도 개인과 제도의 기억을 엄밀히 구분해 볼 수는 있다. 예를 들면 개인의 기억은 가족이나 친구들과 같이 신뢰도가 높은 사람들이 들려주는 스토리텔링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친근한 관계 속에서 일상적으로 전달, 교환되는 내용이 기억, 인식형성에 중요한 기제이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제도의 기억은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만들어진다. 제도적 기억의 행위자들로 정부, 언론, 교육기관 등을 꼽을 수 있겠고 박물관, 역사교과서, 기념비, 다큐멘터리 영화 등이 제도적 기억의 매개물이다. 개인과 집단의 기억은 상호배타적이 아니라 상호작용하며 엮이고 또 엮여져간다.

기억담론의 태생적 한계

과거의 절대적 진실은 그 누구도 알 수 없다는 냉소주의(cynicism)가 기억장르의 근간을 이룬다. 양대 세계전쟁 중에 자행된 대량살상과 인종 학살의 잔혹성은 전진하는 역사(History)에 대한 불신으로 나타났고, 직접 느끼고 경험한 역사만을 믿을 수 있다는 저항으로 기억의 장르가 등장했다. 따라서 기억담론의 기원, 이론화, 경험적 분석 등은 매우 유럽 중심적이다.

이런 서양 중심적 기억연구를 비서양적인 맥락에서 검증해보려는 작업이 경험적으로 검증해보려는 작업이 8명의 국내외 학자가 참여한 <기억연구저널(Memory Studies Journal)>의 <한국인 기억> 특별호다. 이 저널은 영국 세이지(Sage)출판사에서 발행되고 있는 학술지다. 기독교적 세계관과 대중적 민주주의가 작용하는 서양의 기억은 문화적 세계관과 정치이데올로기의 결과물이라는 전반적인 합의가 이뤄진 상태이다. 하지만 이런 합의가 ‘한국적인 상황에서도 과연 유효한가’의 의문으로 이 특별호의 작업은 시작됐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해외 씨앗형 사업의 연구비 지원을 받은 작업이기도 하다.

<기억연구저널>은 인용빈도수로 측정된 영향력의 평가에서 기존 56개의 역사분야 저널 중 3위, 그리고 35개의 문화 분야 저널 중 3위에 손꼽히는 SSCI, SCOPUS 동시 등재 저널이다. 6년이라는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탄탄한 편집과 높은 학문적 공헌도로 급성장한 대표적 사례로 회자된다. 이런 세계유수의 저널에서 한국관련 특집호를 발행했다.

아직 학문적으로 미숙하기 그지없는 필자가 편집장의 책임을 맡아 지난 4월에 출판된 6권 2호는 7편의 연구논문과 1편의 서평으로 구성돼 있다(http://mss.sagepub.com/content/current). 여기서 다뤄진 주제들은 필자가 수년전에 실시한 한국인의 자긍심과 수치심관련 여론조사의 결과에 바탕을 둔다. 한국의 대학생 432명이 참가한 인식조사에 의하면 한국의 역사에서 수치심을 유발시키는 사건들로는 일제 식민통치, 6·25전쟁, 각종 정치비리, 열강들의 태도, 광주시민항쟁, 국토분단, 각종 국제적 망신, 군사독재 등으로 나타났으며, 자긍심을 느끼게 하는 사건들로는 1988 올림픽 개최, 각종 국제 스포츠 대회 우승, 훈민정음 창제, 2002년 월드컵 개최, 경제성장, 금모으기 운동, 민주발전, 독립운동, 애국열사, 4·19 혁명 등으로 나타났다.

한중연의 해외 씨앗형 사업 지원

이에 김정철, 게리 앨런 파인 미국 노스웨스턴대 교수(사회학과)의 『친일인명사전』 발간을 둘러싼 매국이라는 행위에 관한 기억, 제롬 드 윗트 네덜란드 레이든대 교수(한국학)의 한국전쟁을 소재로 다룬 남북한의 소설 작품 속에서 (재)구성되는 적이라는 이미지를 비교·분석한 연구, 권헌익 영국 캠브리지대 교수(인류학과) 교수의 제주 4·3사건 희생자 추모의 과정에서 노정되는 지역사회 내부의 갈등과 화해의 가능성을 둘러싼 기억의 변화를 냉전과 탈냉전이라는 맥락에서 비교·분석한 연구논문, 문승숙 미국 밧사대 교수(사회학과)의 故 노무현 대통령의 기억으로 반항아, 주류정치인, 그리고 민주적인 지도자로 분류되는 집단기억 연구, 봉영식 아산정책연구원 연구원의 해결되기 어려운 한일 간 독도분쟁을 정치, 안보적 맥락 중심에서 통치 엘리트들의 정책행위들을 전략적 계산으로 분석한 연구, 김석영 캘리포니아 주립대(산타바바라) 교수의 북한에서 ‘통일의 꽃’으로 불린 임수경 씨의 방북을 담은 북한 제작 다큐멘터리물들이 종래의 김일성 일가 중심의 기억 만들기에 어떻게 도전, 결국 해체하고 마는지에 관한 아이러니를 분석한 연구, 필자의 한국의 구전문학에 나타나는 히로인들의 유형을 히어로의 전형을 그대로 모방하는 히로인, 한을 품은 저항인, 시대를 앞서가는 여성, 그리고 烈不烈의 여성상 등으로 분석한 연구 등의 7편의 연구논문들이 포함돼 있다. 서평으로는 월터 클레멘스 미국 보스턴대 교수의 『박정희 시대: 한국사회의 변동(The Park Chung Hee Era: The Transformation of South Korea)』( 김병국 등 공저, 2013년 하버드대학출판사 刊)가 실렸다.

한국인의 기억은 서양의 기억처럼 현재주의적인 면도 있는 반면에 상대적으로 매우 긴 기억의 파장과 무게를 지니는 전통주의적 면을 같이 노정시키고 있으며 과거사에 개인의 책임감과 사명감도 같이 투영시키는 개인과 기억공동체 사이의 좀 더 세밀한 교직의 패턴도 보여준다. 따라서  한국인의 기억은 서양의 기억패턴과 공통점을 가지는 동시에 주목할 만한 차이점도 노정시키고 있다.


김미경 히로시마시립대 평화연구소·사회학

필자는 미국 조지아대에서 사회학 박사를 했다. 미국 포틀랜드주립대 풀브라이트 방문교수를 지냈다. <North Korean Review >(SSCI Journal, McFarland Publisher)의 공동편집장으로 있으며, 2012년 미국 인터내셔널 스터디즈 어소시에이션(International Studies Association) 연례학술회의에서 2013년 인권분과 프로그램 체어로 선출됐다. <기억연구저널> '한국인의 기억' 특집호 편집장을 지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