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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곡된 이미지와 새로운 정체성 찾기
굴곡된 이미지와 새로운 정체성 찾기
  • 교수신문
  • 승인 2013.06.03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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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한국을 만든 40곳 23_ 인천항

 근현대 한국을 만든 40곳 목록
장충단공원, 명동·충무로 일대, 남산, 서울시의회 건물, 경복궁(광화문)일대, 덕수궁(정동), 서대문형무소, 탑골공원, 천도교 중앙대교당, 군산항, 부산근대역사관, 광주일고, 상하이 임시정부, 만주, 서울역, 경무대·청와대, 경교장(현 강북삼성병원), 이화장, 서울대(동숭동·관악), 부산 항구, 목포항, 소록도, 인천항, 제주도, 판문점·휴전선, 부산 국제시장, 거창, 지리산, 용산, 매향리(경기도), 여의도광장(공원), 마산(현 창원) 바다, 4·19국립묘지·기념관, 명동성당, 광주 금남로·전남도청, 울산 공단, 포항제철, 경부고속도로, 청계천·평화시장, 구로공단

▲ 1904년 호주 자신가 조지 로즈가 찍은 제물포항 모습. 오른쪽이 중국 조계지, 왼쪽이 일본 조계지였다. 작은 사진 위는 인천항 개항 백주년 기념탑으로 인천항에 대한 서로 다른 시선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비운의 조형물이다. 작은 사진 아래는‘성냥공장’으로 부업하던 당시 가정 모습을 재현해 놓은 수산박물관 전시관 내부의 풍경 한토막이다.

제물포는 조선시대 군항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는데, 대원군의 통상수교거부 정책이 끝난 1883년(고종 30년) 외세의 압력에 의해 상업항으로 개항됐다. 인천항은 심한 조석간만의 차이 탓에 전천후 하역작업이 불가능했으므로 民資와 정부투자로 1884∼1911년까지 항만시설이 건설됐다. 이후 한국의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끈 상징이 됐지만, 민족의 치욕과 굴욕을 드러내는 장소이기도 하다. 오늘날 인천항을 둘러싼 역사적·문화적 함의는 중층적이고 복합적이다.

‘인천항 개항 백주년 기념탑’(이하 기념탑)과 ‘인천의 성냥공장’은 그 한 부분을 보여준다. 기념탑은 인천항에 대한 서로 다른 시선 차이를 잘 드러낸다. 이 탑은 새로운 국가 정체성 만들기가 한창이던 1983년 전두환 정권에 의해 개항 100주년을 기념해서 만들어졌다. 해양물류의 중심지인 중구 신흥동 능해 IC 주변에 있는 이 탑은 기획 단계부터 항만으로 통하는 물류 흐름을 막을 뿐만 아니라, 시민의 접근도 어렵다는 문제점이 제기됐다. 하지만 권위주의 정권과 공무원들은 이 탑의 건설을 강행했는데, 건설에는 11억 원이나 소요됐다.

탑의 높이는 33m, 길이는 9m 규모로 선박 모양을 하고 있었는데, 배 100척은 개항 100주년을, 여인상은 희망과 전진을, 배에 탄 인물과 시민상 12기는 조국근대화의 기수들이 거친 파도를 헤치며 희망을 품고 힘차게 입항하는 모습을 상징했다. 하지만 근대 군국주의 건축을 연상시키는 이 모습은 시민에게 친근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철거된 ‘개항 기념탑’
시민과 시민단체들은 2001년부터 이 탑의 철거를 요구하기 시작했는데, 표면적인 이유는 차량 흐름의 방해였다. 하지만 숨겨진 진실은 지역 역사와 정체성을 둘러싼 가치와 시선의 문제였다. ‘평화와 참여로 가는 인천연대’를 중심으로 한 시민은 기념탑이 인천의 개항 역사를 왜곡하고 일제의 굴욕적인 문호 개방과 침략을 정당화하고 있는 상징물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인천항이 일제에 의해 강제로 문호를 개방하기 전부터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항구로 역할을 해온 만큼 개항역사는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가므로 이 탑의 철거는 정당하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주장에 대해 모든 인천 시민이 동의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지역성을 둘러싼 갈등이 촉발될 수밖에 없었다. 보수적인 인천시는 시민단체의 요구를 계속 무시하다가 여론이 급격하게 악화된 2002년 12월에야 철거를 결정했지만, 완전 철거를 위해서는 또 다른 9개월이 필요했다. 지역의 진보적인 시민단체들은 기념탑이 철거되자 인천 역사 바로 세우기의 새로운 장이 열렸다고 자축했다.

이들은 이 여세를 몰아서 또 다른 굴곡의 상징인 자유공원의 맥아더 동상의 철거에 나섰지만, 남한 내의 심각한 좌우 이념논쟁만 촉발한 채 소강상태에 빠진다. 외부인에게 인천 또는 인천항과 가장 강하게 결합한 이미지 중의 하나는 성냥공장이다. 1923년에 발간된 『인천부사』에 의하면, 일본인이 이미 1885년 서울 양화진에 성냥공장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지만, 인천 향토사학자들은 최초의 성냥공장이 인천에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외국인이 1886년에 인천에 성냥공장을 세웠고, 생산된 성냥은 국내외로 팔려나갔지만, 양질의 일본 성냥이 수입되면서 이 공장은 망했다. 1917년 ‘조선인촌(성냥)주식회사’가 인천에 세워졌고, 남녀직공 500여 명이 연간 7만 상자의 성냥을 생산했다. 국내최대의 성냥공장이었는데, 당시 국내 성냥소비의 20%를 점유했으며, 학생들의 주요한 수학여행 코스였다. 인천에서 성냥공장이 번창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항구도시라 노동력이 풍부했고, 압록강 일대의 나무들을 신의주를 거쳐 인천항으로 반입하기 쉬웠고, 서울이라는 큰 시장이 인접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공장을 세울만한 큰 부지가 인천에는 아직 남아 있었고, 전력도 풍부했다. 공장 인근의 500여 가구가 성냥갑을 만들어 공장에 납품하면서 성냥산업은 인천지역 최고의 가내수공업으로 자리잡았다. 어떤 집은 전 가족이 이에 매달려서 생계를 꾸리기도 했고, 공장 인근 도로변은 햇볕에 말리기 위해 내놓은 성냥개비와 성냥갑으로 온 동네가 성냥공장처럼 보였다.

인천의 성냥공장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빈민가출신 500여 명의 어린 여공들에게 소중한 일터였다. 이 소녀들은 하루 13시간 노동하고, 고작 60전의 품삯만을 받았다. 하지만 인천의 성냥공장 아가씨들은 용감한 노동자이기도 했다. 냉혹한 현실에서 노동기본권 향상과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1931년 8월 26일 <동아일보>는 공장이 성냥 껍질 1만 개를 붙이는데 1원 70전씩 주던 품삯을 돌연 1할 감할 뜻을 발표하자, “조선인촌주식회사 공장 녀직공 1백70명 전부는 돌연 동맹파업을 단행하였다고 한다”는 기사를 싣고 있다.

1933년 6월 3일에는 “김단야 등이 조선인촌주식회사 직공들 조종하야 동맹휴업을 단행하는 등”이라고 이 신문은 보도하고 있다. 이 같은 노동운동은 1970년대 산업화시기에도 인천에서 가열차게 이어졌으며, 동일방직으로 대표되는 인천의 노동운동은 한국 민주주의 발전의 중요한 초석이 됐다.

‘성냥공장’과 항구도시의 노동력
하지만 이 같은 인천의 고단한 노동운동 역사는 외지인에게 하나의 재미있는 조롱거리가 되기도 했다. 한국전쟁 이후 수많은 젊은 남성은 군대에서 또는 술자리에서 여공을 성적으로 조롱하는 저속한 ‘인천의 성냥공장’이란 노래를 불렀다. 이 노래는 시간이 지날수록 그 내용이 더욱 더 저속해져 갔으며, 점차 외지인이 인천을 조롱하는 상징적인 노래가 돼 갔다. 이는 어느 사람의 주장처럼 “생계를 어린 여성에게 떠넘긴 식민지 남성들의 왜소한 마조히즘이 만들어낸 엉뚱한 사디즘”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사적·문화적 뿌리도 없는 ‘듣보잡’이 경제적 풍요를 누리던 것에 대한 수도권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과 질시의 감정이 표출된 것 일 것이다. 인천 경기가 침체하면서 이 노래를 듣는 것은 어려워졌다. 인천시가 송도, 영종도 그리고 청라지구에서 벌이는 ‘무모하고’, ‘도발적인’ 개발은 이와 같은 굴곡된 이미지를 벗어던지고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고 싶은 욕망의 표출일 것이다.

인천항은 서울과 수도권을 세력권으로 하는 서해안 최대의 항구이지만, 평택항이 뛰어난 입지조건과 對中 무역의 부상 덕분에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어쩌면 그다지 머지않은 시일 내에 평택항이 서해안의 제1항이 될 수도 있지만, 인천항의 수많은 역사적·문화적 향수와 추억을 대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조관연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 HK교수
독일 쾰른대에서 문화인류학을 공부했다(Ph.D.). 문화변동, 그리고 미디어와 문화의 상관관계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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