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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 퍼거슨과 시민사회론
애덤 퍼거슨과 시민사회론
  • 교수신문
  • 승인 2013.06.03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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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요즈음 애덤 퍼거슨(Adan Ferguson, 1723~1816)의 『시민사회의 역사』(1767)을 읽고 있다. 가끔 부분적으로 들춰보기도 하고 이전에 쓴 글에서 그의 시민사회론을 언급하기도 했지만, 부끄럽게도 정독한 적은 없다. 사실 오랫동안 나는 퍼거슨의 시민사회론을 스미스의 정치경제학과 동일한 지적 계보로 이해해 왔다. 스미스가 역사 발전을 수렵, 유목, 농업, 상업 등 단계적으로 인식한 것과 마찬가지로 퍼거슨은 미개, 야만, 문명단계로 구분해 설명하려고 했다. 두 사람 모두 상업사회에서 분업을 발전을 중시하면서 이를 통해 개인의 자유, 정치적 안정, 법의 지배가 확립됐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왜 마르크스가 일찍이 퍼거슨을 가리켜 스미스의 교사라고 불렀는지 그 이유를 나는 잘 알지 못했다.

고전을 깊이 읽지 못한 까닭이다. 물론 퍼거슨은 스미스와 마찬가지로 근대 상업과 공업이 개인에게 더 넓은 가능성을 제공한다는 점에 동의한다. 그럼에도 그는 상업사회로의 이행 단계에서 사회는 곧바로 그 기초를 흔드는 모순적 상황에 직면하리라고 생각했다. 상업사회에 대한 퍼거슨의 비관론은 분업에 관한 견해에서 비롯한다. 그는 스미스와 마찬가지로 기술적, 사회적 분업이 생산력을 높여 시민사회의 발전에 기여한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그는 분업에 깃들어 있는 부정적인 면모를 깊이 성찰하기에 이른다. 분업은 노동의 불구화와 함께 개인의 창조적인 능력과 능동성을 잠식한다. 개인 차원을 넘어 사회적 연대를 파괴한다. 분업에 기초를 둔 상업사회의 발전 자체가 사회의 안티테제가 되는 것이다. 그는 분업이 사회생활뿐 아니라 정치생활에 미치는 영향을 더 우려한다.

개인의 사적 이익 추구가 정치적 열정을 억압하는 일종의 가치전도현상이 나타난다. 사적 이익만을 추구하는 경향이 상상력을 위축시키고 감성을 무디게 하며, 사회 구성원이 정치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시민적 덕목을 무너뜨린다는 것이다. 마키아벨리적 공화주의 담론이 퍼거슨에게까지 이어져왔음을 새삼스럽게 확인할 수 있다. 18세기 중엽 에든버러의 저명한 지식인들이 저지대 출신이었던 것과 달리 퍼거슨은 후진적인 고지대 출신이었다. 에든버러大와 세인트 앤드루스大에서 신학을 공부한 후 한동안 저 유명한 42보병연대(블랙 워치)의 군목으로 복무하기도 했다.

그가 시민의 정치 참여, 특히 시민군으로서의 참여행위를 중시한 것도 이런 이력과 관련될지도 모르겠다. 퍼거슨은 분업의 발전에 우려의 눈길을 보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사회의 좀 더 근원적인 문제, 사유재산과 그로부터 비롯되는 종속의 문제를 다룬다. 상업사회는 기본적으로 사유재산제도의 불평등한 소유관계에 바탕을 둔다. 이 착취관계에서 권력과 계급 불평등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동안 나는 퍼거슨이 ‘상업=산업사회의 진보’를 비판하면서도, 실제로는 그 불가피성을 받아들이는 보수적인 사회이론가라고 생각해왔다. 더욱이 미개, 야만, 문명으로 인류사를 구분하는 역사인식은 유럽중심주의의 발로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이 있다. 그는 ‘미개’에 해당하는 사회의 모습을 아메리카 원주민사회에서 유추해냈다. 이러한 서술방식은 흔히 ‘추론적 역사’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인간사가 그렇듯이, 그의 사유체계를 단선적으로만 평가하기에는 무리가 뒤따른다.

전통사회는 인간의 용기와 충성을 낳지만, 상업사회는 오직 인간을 유약하게 만들 뿐이라고 언명하는 데에서 그는 물론 보수적 복고론자의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착취관계를 중시하고 분업의 불안한 미래를 감지하는 데에서는 비판적 사회이론의 맹아를 찾을 수 있다. 보수와 진보의 언어가 뒤섞인 그의 이중적인 견해는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그 시대의 분위기 아래서는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퍼거슨이 제아무리 상업사회의 모순과 폐해를 지적했다고 하더라도, 그 폐해를 넘어설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한 것은 아니다. 그는 돌이킬 수 없는 그 시대의 추세에 경고음을 내고 문제점을 지적하는 데에 초점을 맞췄다. 그러나 일찍이 18세기 후반에 상업과 산업의 발전에 깃들어 있는 위험을 사전에 발견하고 경고한 그의 통찰력은 앞으로도 매우 귀중한 지적 자산으로 남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영석 서평위원/광주대·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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