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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세가·문장가 유성룡의 진수 선별 번역한 수작
경세가·문장가 유성룡의 진수 선별 번역한 수작
  • 교수신문
  • 승인 2013.06.03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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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전번역원 - 교수신문 공동기획 ‘고전의 숲’ 1. 『국역 서애집』

▲ 국역 서애집(2책) 유성룡 지음|임정기 외|민족문화추진회|1977
<교수신문>은 올해 창간 21주년을 맞아 한국고전번역원(원장 이동환, 전 민족문화추진회)과 공동기획한 ‘고전의 숲’을 이번 687호부터 격주로 소개합니다. ‘고전의 숲’은 한국고전번역원이 각고의 노력으로 번역해낸 한글 번역 문화의 정수를, 관련 번역자들이 직접 소개하는 연중기획입니다. 민족문화의 핵심을 이루는 선현들의 다양한 저작을 현대화한 이 작업은 한국문화의 저변을 확장하는 한편, 학문적·사상적 사유의 깊이를 ‘한글’로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것입니다. 다방면에 걸친 학술 연구와 사회 각 부문에서 해당 고전이 재음미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시대를 함께 하지 못하는 옛사람과의 만남은, 지식인들에게는 언제나 설레는 일이었다. 이를 맹자는 尙友라고 표현했다. 짧게는 수십 년, 많게는 몇 백, 몇 천 년의 시간적인 간격은 그들이 남긴 저술을 통해 극복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을 만나고, 어떤 글을 읽을 것인가. 경세에 능했던 사람도 있었고, 문장에 능했던 사람도 있었고, 학문에 능했던 사람도 있었다. 경세에 능했던 사람의 글에서는 통찰력과 기국을, 문장에 능했던 사람의 글에서는 미려한 수사를, 학문에 능했던 사람의 글에서는 심오한 경지를 읽을 수 있다.

아무리 전인교육이 이뤄졌던 옛날이라고 하더라도 한 사람이 두 가지 이상의 분야에서 커다란 능력을 드러내기는 쉽지 않았다. 문장이나 학문에 능한 사람은 경세나 행정에 어둡고, 경세에 밝은 사람은 문장이나 학문이 얕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문장에는 능하지만 학문에는 어두운 사람도 있고, 학문에는 능하지만 문장에는 능하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큰 틀의 경영에는 밝지만 작은 실무에는 어두운 사람도 있고, 작은 실무에는 밝지만 큰 틀의 경영에는 어두운 사람도 있었다. 西厓 柳成龍(1542~1607)은 그런 상식에서 벗어나는 인물이다. 東州 李敏求가 『西厓集』서문을 쓰면서 이를 확인하고 있다. “세상 사람들은 ‘늘 문장과 사업은 별개의 것이니, 시대가 태평하면 선비를 숭상하고, 세상이 어지러우면 장수를 등용한다.’라고 하니, 이는 그저 배운 것에 얽매이고 문사나 숭상하는 선비들의 경우일 따름이다.”

서애 사상 온축된 ‘잡저’ 먼저 읽어야
서애는 임진년 국난의 극복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던 경세가이자, 『맹자』의 문체를 잘 배운 이름난 문장가였다. 주자학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당시 학자들이 이단시하던 陸象山과 王陽明의 학설에까지 적극적으로 관심의 범주를 넓혔던 학자이자, 兵法에 밝은 실무형 이론가이기도 했다. 그만큼 그의 문집에는 다양한 내용이 담겨있고, 그로 인해 읽는 재미는 특별하다. 그러나 한문으로 된 방대한 문집을 읽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면에서 한국고전번역원의 전신인 民族文化推進會에서 번역한 『국역 서애집』은 좋은 길라잡이가 될 것이다.

문집 중에서 핵심이 될 만한 내용들을 선별해 번역했기에, 분량의 압박감에서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다. 간행한지 오래된 책이긴 하지만, 번역문의 표현이나 어휘가 내용의 이해를 방해할 만큼 거슬리지 않는다는 것과, 역량 있는 역자들이 참여해 오역이 적다는 것도 장점이다. 그 중에서도 雜著 부분을 먼저 읽어보기를 권한다. 일반적인 문집의 경우에는 잡저의 위상이 그다지 높지 않다. 작자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는 주로 詩, 書, 疏 등에 담겨 있는 경우가 많고, 잡저는 그와 같은 장르에 분류하기 어려운 잡기성의 글들을 모은 것이라고 보아도 무난할 정도이다.

반면, 서애의 경우는 이 잡저가 매우 중요하다. 그의 주요한 사상은 거의 잡저에 집약돼 있다. 솥 속의 한 점 고기만 먹어보아도 그 솥 전체의 음식 맛을 알 수 있다[全鼎一???]는 말처럼, 잡저를 통해서 충분히 서애를 이해할 수 있다. 잡저는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宋나라 역사를 읽으면서 당대에 귀감이 될 만한 사건들에 대한 評說을 기록한 「讀史???測」, 장례를 치르는 의식과 관련해 의심나는 내용에 대한 견해를 기록한 「喪葬質疑」, 그 외에 사상, 학문, 경세론 등을 기록한 단편들을 수록한 부분, 기타 일반 문집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부류의 단편들을 수록한 부분 등이다. 「主宰說」, 「心無出入」, 「鳶飛魚躍」 등 程朱學 계통의 이론을 담은 글과 「王陽明」, 「象山學與佛一樣」, 「王陽明以良知爲學」 등은 서애의 학문적 사상을 논할 때 필수적으로 인용되는 글들이다.

양명학, 禪學에 관심이 많았다고 알려진 것에 비춰보면, 일견 여타의 정주학자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는 듯한 그의 견해에 실망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에 대해 지녔던 우호적인 시각을 감추지 못하고 보여주는 것은 「知行合一說」이다. “왕씨의 의도를 잘 살펴보면, 대개 당시 세속의 학문이 외면적인 것으로만 치닫는 것을 경계한 것이었다. 이에 한결같이 본심(本心)을 위주로 하여, 마음을 붙여서 강구하는 것을 모두 행(行)이라고 여겼던 것이니, 이는 굽은 것을 바로잡으려다가 곧음이 너무 지나치게 된 경우이다.” 의욕적으로 부국강병의 개혁적 정책을 추진하였던 송나라 神宗이 노년에 조회를 하면서 인재가 없다고 탄식한 것에 대해, “그러나 그때에도 정작 그렇게 된 연유를 돌이켜 찾을 줄을 모르고, 마침내 말하기를, “천하에 인재가 없다.”라고 하였으니, 참으로 한유(韓愈)가 이른바 “정말 천리마(千里馬)가 없는 것이냐? 아니면 천리마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냐?”라는 경우이다. 어느 시대고 인재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문제이지, 인재가 부족했던 것은 아니라고 일갈한 것은 「神宗有無人才之歎」이라는 글이다.

「人才說」에서는 제대로 된 인재의 등용을 위해 薦擧制를 적극 활용해야 한다고 구체화하고 있다. 붕당의 타파를 논한 「歐陽子朋黨論」도 결국 인재 활용론의 연장이다. “붕당의 실상은 저절로 분간되어, 진실로 눈을 가진 사람이라면 다 볼 수 있는 것이니, 분변하기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다만 소인들은 먼저 임금의 마음과 결탁하여 하나가 되는 까닭에 처음부터 시야가 가려져 분변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일 뿐이다. 세상에 만약 대인군자가 있어 붕당의 화를 제거하려고 한다면 다른 방도가 없다. 오직 먼저 그릇된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는 데에 힘써야 한다.”

‘연보’, 문집 읽어내는 길라잡이
「戰守機宜十條」는 왜란이 한창이던 1594년 영의정으로 있으면서 당시의 戰守에 관한 문제와 방책을 斥候, 束伍 등 10조목으로 나누어 논한 글이다. 국난을 극복하는 과정에서의 절박함을 생생하게 읽을 수 있다. 그 외에도 문학적 견해를 엿볼 수 있는 「離騷」, 「僧人能詩」, 「時雨山人」 등이 모두 잡저에 실려 있는 작품들이다. 잡저를 읽고 난 다음에는 ‘年譜’를 중심으로 읽으면서, 시기별로 관련된 작품을 찾아서 읽는 것이 좋다. ‘연보’에는 작품들의 창작배경이 담겨있는 경우가 많다. 또한 상소처럼 긴 산문의 경우, 상투적인 표현들을 제외하고 핵심적인 내용만 발췌, 요약해 놓기도 하였다.

독자의 입장에서는 여간 편리한 자료가 아니다. 문집은 한 개인의 평생의 저술을 모아놓은 것이다. 유년기의 작품과 장년기의 작품을 동일한 잣대로 감상해서는 안 된다. 문집을 읽을 때 흔히 범할 수 있는 오류 중의 하나다. 연보는 그런 면에서도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 국난 극복과 관련된 내용을 읽을 때에는 반드시 서애의 또 다른 역저 『懲毖錄』을 참조하길 바란다. 『징비록』은 서애가 임진왜란 7년 동안 몸소 듣고 본 사실들을 기록한 것이다. 사실적인 관계의 보완은 물론, 그 언론의 진정성을 느낄 수 있는 귀한 자료다.

권경열 한국고전번역원 번역사업본부장·한문학
필자는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박사를 했다. 한국고전번역원 고전번역연구소 소장을 지냈으며, 옮긴 책으로는 『대산집』(3,4), 『매천집』(3), 『국역 국조상례보편』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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